국가가 타인의 '배울 자유'를 강제해야 하나…공교육 존치 논란
교단유감2: 학교는 죽었다

대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철학을 모르는 사람조차도 그가 남긴 불멸의 한마디는 알고 있을 터다. "신은 죽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알고 있지만, 신의 죽음을 선언한 다음 그가 어떤 말을 이어나갔는지는 사실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가 써내려간 완전한 문장은 이렇다. "신은 죽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초인을 소망해야 한다."

여기서 니체가 말한 초인이란, 천국의 속삭임이 아니라 지금 딛고 있는 이 땅에 충실한 자다. 니체는 신성이 사라진 시대에야 완전한 인간 승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한 사람이다. 신자들에게는 당연하게 느껴지는 '신의 존재'를 지움으로써 니체는 충실한 한 인간의 삶이 어떤 삶인지 설명해냈다.

절대왕정의 시대가 떠나고 공화정이 들어섰다. '당연시되던 것들'의 몰락은 세상의 멸망으로 귀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눈부신 인류 발전의 역사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요즘 유행하는 '창조적 파괴' 또한 일맥상통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 창조적 파괴의 일환으로서 나는 오늘 '학교의 해체'를 말하고자 한다. '학교'. 대한민국 국민의 취학률은 99%다. 몇몇의 특수한 경우를 빼고는 100%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취학 연령이 되면 국가에서는 자동적으로 입학을 '명령'한다. 실제로 그 명령에 불복하면 사법 처리를 받게 된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 학교의 존재는 '옳다, 그르다’의 판단을 벗어난 당연함이 되었다.

우리가 그토록 당연시하는 학교의 역사는 몇 년이나 되었을까? 가장 오래된 공립학교의 역사를 가진 나라는 미국이다. 그들은 270년 전부터 '보통지식 습득을 위한 장소'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고,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에 의해 '공립학교 체제'라는 것이 제안되었으며, 그의 사후 30여년 뒤 받아들여졌다. 즉, 학교에 관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미국조차 그 역사가 180여년에 불과하다는 거다.

   
▲ 기존 학교는 그 역할을 축소해서 일종의 교육복지 차원의 운영이 가능하지 않을까. 교육 수요자의 요구에 맞춰 다양한 수준의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시장 속의 학교'들이 생기면 어떨까./사진=미디어펜


우리나라 학교의 역사는 어떨까? 조선시대 서당, 서원의 역사를 제외하고, '근대 학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1894년에 관립으로 설립된 교동 소학교가 그 시작이었다. 즉, 최대로 길게 잡아 120여년이다.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는 것에 방점을 찍고 싶다. 즉, 학교라는 제도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절대적인 제도'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 학교라는 건 왜 지어졌는가?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교육하기 위하여'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재차 물어보겠다. 교육은 꼭 학교에서만 이뤄질 수 있는가? 왜 학생들을 한 곳에 모을 필요가 있었을까? 가가호호 가정교사를 들이거나, 이전에 이뤄지던 것처럼 '도제식'으로 가르치면 될 일 아닌가? 왜 학교라는 것이 생겼나?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아는 것이 '공교육 존치 논란'의 핵심이다. 학교 시스템은 동일 학령아동을 보다 쉽게, 보다 더 많이 모으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이른바 경제성과 수월성의 논리다. 교육행정학 개론의 첫 머리가 경제학자 테일러의 이론을 배우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은 많은 바를 시사한다. 공장 컨베이어 벨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양질의 공산품처럼, 학교는 '평균적으로 적당히 교육받은 학생들'을 대량으로 배출해내기 위해 세워졌다.

그런 점에서 이젠 학교를 향해 이런 의문을 던지는 것이 가능하다. "왜 꼭 학교에서만 배워야 하느냐?". 학령아동을 쉽고 빠르게, 많이 모을 수 있는 장소가 학교뿐만이 아닌 시대가 오지 않았나. 학교가 아니어도 동일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곳은 정말 많다. 시공간의 물리적인 제약을 완전히 없앤 정보통신도 있지 않나. (우리는 TED 강의를 지하철 하굣길에 볼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최근 학교를 향한 이러한 공격에 대해 학교 시스템과 공교육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학교가 또 다른 강점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바로 인성 교육과 사회성 교육이다. 인성과 사회성. 이를 배우려면 '또래집단' 형성이 쉬운 학교가 제격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글쎄. 여기에 대해선 마뜩찮은 점이 많지만, 단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인성교육과 사회성교육이라는 재화를 다른 교육 생산 주체들은 제공할 수 없는 걸까? 가령, 지금 사교육으로 일컬어지는 시장에서는 인성교육과 사회성교육을 못 가르칠까? 공교육보다야 낫지 않을까 하는 것이 솔직한 대답이다.

물론 21세기 들어 학교에도 많은 변화가 시도되었다. '특성화 학교'로 대표되는 다양화 정책이 바로 그것인데, 이 또한 효과에 대해선 많은 의문이 산적해 있다. 애초에 수월성과 경제성의 논리 위에 세워진 학교에 다양화를 집어넣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 학교의 해체는 창조적 파괴의 일환으로 검토해야 한다. 우리가 그토록 당연시하는 공립학교의 역사는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미국조차 180년에 불과하다./자료사진=연합뉴스


"그럼 정말 학교를 역할을 죄다 시장에 넘기고 학교를 다 없애자는 얘기냐?"하고 물으신다면, 그건 그렇지 않다. 기존의 학교는 그 역할을 축소해서 일종의 교육복지 차원의 운영이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일종의 대안적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 교육 수요자의 요구에 맞춰 다양한 수준의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시장 속의 학교'들이 생기고, 기존의 학교는 최저한도의 인간다운 교육을 제공하는 장소로 변신을 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유독 교육 재화의 내용과 수준은 국가가 독점하는가? 왜 국가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타인의 '배울 자유'를 강제하는가? 학교를 대체할 수 있는 곳이 셀 수 없을 만큼 생겨난 오늘날, 이제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때도 되었다. 

"학교는 죽었다."

글을 마치며 니체가 선언했던 신의 죽음과 그럼으로써 비로소 가능했던 인간 존재의 해명을 생각한다. 그의 말을 빌려 부족하지만 한 마디 패러디를 붙여본다. 그리고 어쩌면 답을 이미 알고 있을 물음을 남긴다. 학교가 죽은 자리에 우리는 무엇을 소망해야 하는가? /정경봉 부산교육대 교육학 석사과정

(이 글은 자유경제원 자유북소리 '교육고발' 게시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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