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평등하게 한다는 1인1표 경제평등주의,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어

좌승희회장의 차별화경제 강연 2부-세계 경제위기의 진실, 자본주의의 문제인가? (7)

   
▲ 좌승희 미디어펜 회장, KDI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 전 한국경제연구원장
경제양극화는 평등주의 경제정책체제의 결과다

1) 동반발전 안 되는 양극화 현상은 인재(人災)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는 네트워크 경제이다. 그래서 흥하는 이웃이 있어야 내가 흥한다는 명제를 피할 수 없다. 네트워크를 통해 끝없이 발전의 노하우와 시너지가 서로 공유되어 퍼져나간다. 내 주위에 나보다 흥하는 이웃이 많을수록 나의 성공가능성은 커지며, 역으로 성공노하우를 배울 수 있는 흥하는 이웃이 없이 내가 성공할 길은 없다.

그래서 오늘날의 네트워크 자본주의경제는 칼 마르크스적인 계급투쟁의 장이 아니라 성공노하우의 공유를 통한 동반발전의 장이다. 그래서 우리의 신 발전원리의 세계관은 “흥하는 이웃이 있어야 나도 흥한다.”로 요약할 수 있다.
반면 칼 마르크스의 세계관은 “흥하는 이웃이 있으면 내가 망한다.”로 요약할 수 있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리에 뻗치는 것과 같이, 흥하는 이웃의 성공노하우들이 물이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서로 무임승차를 통해 퍼져나간다. 그래서 자본주의 경제는 그 본질상 동반발전을 만들어낸다. 칼 마르크스는 세상의 이치를 거꾸로 본 셈이다.

그러나 실제 이 효과가 잘 나타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 차이는 바로 그 사회의 경제제도나 정책이 경제주체들끼리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 시너지의 공유를 원활히 할 수 있게 해주고 있느냐의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 동반성장을 막아 소위 양극화를 조장하는 경우는, 우선 평등주의 정책으로 흥하는 이웃, 수양산의 등장을 원활히 도와주지 않아서 아예 수원지가 고갈되는 경우다. 불필요한 규제로 상생의 유인을 약화시켜 수원지의 수문을 닫아 놓아 하류가 고갈되기도 한다. 아니면 국민들의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여 물이 넘쳐흐르지만 손수 물을 길어올릴 생각은 안하고 정부만 쳐다보고 있게 하는 경우도 있다.

   
▲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흥하는 이웃이 있어 나도 흥한다'는 네트워크 경제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반면 칼 마르크스적 경제관은 '흥하는 이웃이 있어 내가 망한다'는 평등주의와 갈등의 경제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서구가 성정정체의 덫에 걸리고, 우리경제도 경제민주화조항을 헌법에 삽입한 지난 87년이후  저성장과 양극화로 어려움을 겪는 것은 평등주의 경제정책에서 비롯됐다. 반기업 반시장적 경제민주화 입법에 총력을 기울여온 민주당 을지로위원회 의원들이 국회에서 경제민주화 입법 촉구를 요구하는 회견을 갖고 있다.

양극화는 이 모든 원인으로 인해 조장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요인들이 소위 자본주의 경제의 적하효과(trickle-down effect)나 혹은 스필오버효과(spill-over effect)나 네트워크 외부경제 효과(network external economy)와 같은 동반성장 메커니즘의 작동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어떠한 제도가 이런 문제를 초래할까? 흥하는 이웃이 있어 내가 망한다는 계급투쟁적 이념에 빠져, 흥하는 이웃을 고율과세로 폄하하고 취약한 계층이라고 무조건 지원하여 도덕적 해이에 빠지게 하는 동기부여에 역행하는 평등주의적 경제제도가 문제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서구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이 걸어온 지난 50여 년의 역사와 지난 30여 년의 우리의 경제정책 역사가 이를 웅변하고 있다.

2) 경제적 불평등 없이 발전은 없다.
경제적 차이나 차등이 없이, 즉 경제적 불평등이 없이 경제발전은 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경제적 불평등을 통해 모두를 동기부여 하여, 더 열심히 부의 창출에 나서도록 유인함으로써만 경제발전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시장이 바로 이런 기능을 한다. 여기서 생기는 경제적 불평등은 아름답지는 않지만 시장의 변화를 지속시키는 필요조건이다. 시장은 항상 불완전하지만 적어도 차등과 차별을 만들어냄으로써 발전을 ‘견인하는’ 장치인 셈이다. 결국 경제적 불평등이 없이는 경제적 역동성과 부의 창출노력도 이끌어 낼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셈이다. 그래서 경제적 평등은 그 아름다운 정치적 이상에도 불구하고 발전역행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날 지구상의 경제 중에서 경제적 평등을 만들어내기 위한 정치적, 경제적 노력을 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 1인 1표의 민주주의는 국민 다수가 모두 평등한 부와 번영에 대한 바램을 버리지 않는 한 불행하게도 경제평등주의 정책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경제적 평등을 이상으로 내거는 사회민주주의 이념이나 체제가 보편화되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바람이 안타깝게도 시장의 차별화 기능을 무력화시키고 발전역행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모두의 행복을 위한다는 노력이 역설적으로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3) 양극화는 민주정치가 만들어내는 경제 하향평준화 과정이다.
그동안 인류는 경제적 평등이라는 정치적 이념에 따라 시장의 동기부여 기능을 차단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경제발전을 바라고 부유한 삶을 기원해 온 셈이다. 지금 인류가 부딪치고 있는 많은 경제문제들, 특히 양극화의 문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문제라기보다는 경제평등주의 이념을 추구해 온 민주주의 정치의 결과이다.

우리가 사는 시장이 경제적 차등을 초래하기 때문에 불완전하다고 하여 이를 인위적으로 보다 평등한 사회로 바꿔보겠다는 민주정치의 노력이 오히려 모두를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동기부여가 안 되는 사회, 즉 경제적 차등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는 경제정체를 피할 길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소위 2:8이니 1:9니 하는 ‘양극화’는 경제평등을 추구하는 민주주의 정치 하에서 경제정체로 인해 모두가 가난해지는 과정으로 오히려 경제의 ‘하향평준화’ 현상이라고 불러야 옳다고 생각한다. 논란과 분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양극화라 자극하고 있지만 90%가 다 어려워지는 상황을 어찌 양극화라 할 수 있는가. 모두 다 어려워지는 경제하향평준화 과정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노무현 정부는 정권내내 1대 9대의 프레임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부자와 서민, 수도권과 지방, 서울대와 지방대, 행정수도 이전 등으로 갈등과 분열을 조장했다.

4) 자본주의는 악이고 민주주의는 선이다?
그동안 인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즉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경제적 불평등을 가져오기 때문에 악(惡)이고, 민주주의는 평등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선(善)이라며 하느님처럼 믿어 왔다. 그러나 경제적 평등을 추구해온 평등민주주의는 오히려 가난의 보편화에 기여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우리가 던지는 질문은 “그럼 모두가 같아지지는 않지만 모두의 발전을 가져오는 자본주의 시장은 악이고, 모두가 평등하지만 모두를 가난하게 만드는 평등지향 민주주의는 선인가?”라는 질문이다.

오히려 지금은 자본주의를 더 평등한 체제로 개혁한다하여 이미 평등지향 민주주의에 의해 왜곡된 우리의 삶의 현장인 시장을 또다시 평등주의적 이념의 잣대로 제단하려 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오히려 1인 1표의 민주정치가 그동안 초래한 경제적 왜곡과 불평등의 심화현상을 풀어내기 위해 민주정치의 경제적 영향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할 때는 아닌지 우리 모두 생각해 봐야할 때이다. 자본주의 4.0이니 뭐니 하여 시장을 더 왜곡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그동안 가난의 보편화를 가져온 민주주의에 의한 시장 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해 오히려 민주주의 4.0을 고민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세습군주제를 대체하여 국민의 투표에 의해 지도자를 뽑는 정치제도로 등장한, 1인1표의 절대적 평등 원리에 기초한 민주주주의 제도가 정치영역을 벗어나 경제사회 모든 영역의 의사결정방식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해온 과정이 지난 200여년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만일 시장에서의 성공과 실패, 나아가 사회에서의 성공과 실패가 개인의 노력(과 때로는 운)에 의해서가 아니라 1인1표의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를 상상해 보라. 이런 사회야 말로 동기부여가 차단되고 모두가 태업에 나서는 필멸의 길로 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좌승희 미디어펜 회장, KDI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 전 한국경제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