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한 부와 기업생태계 집착땐 국민경제 몰락 초래한다

좌승희회장의 차별화경제 강연 2부-세계 경제위기의 진실, 자본주의의 문제인가? (8.끝)

   
▲ 좌승희 미디어펜 회장, KDI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 전 한국경제연구원장
한국경제 어려움의 뿌리, 경제민주화
지난 반세기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는 물론 사회민주주의나 복지국가 실험이 실패하는 모습을 목전에 두고 볼 때 이제 한국경제가 벤치마크 할 선진국 모형은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정치권은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뿌리인 경제민주화를 추구하는 것이 모두 행복한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하고 경제민주화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있다. 여기서는 경제민주화의 의의와 경제적 영향 등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1. 경제민주화, 사회주의이념의 변종이다.
경제민주화란 무엇인가? 로버트 달과 같은 좌파 정치학자들은 경제적 평등 없이 정치적 평등은 없다는 시각에서 소득의 평등분배를 보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기업경영을 민주화하는 등 경제민주주의(Economic Democracy)를 주창하고 있다. (Robert Dahl, A preface to economic democracy, Cambridge, 1985, Polity press.)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정치적 자유와 평등의 실현은 단순히 일인일표의 절차적 민주주의로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자본주의사회가 농경사회에서 기업 자본주의사회로 전환되어 기업이 경제적 부의 창출주체가 되면서 기업 혹은 그 주주들은 그 들의 부를 이용하여 선거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실질적, 혹은 실질적 평등이 실현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부를 가진 자가 그 부를 이용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선거 결과나 정치적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경제적 불평등이 지속 심화되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는 일인일표라 하지만 실제로는 부자가 더 많은 표를 행사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정치적 평등이 실질적으로 실천되는 실질적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기업 경영을 민주화하여 평등한 소득을 보장하는 등 경제적 부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 결국 실질적인 정치적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는 길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일인일표의 민주적 의사결정제도를 기업 내부지배구조에도 적용하여 일부에게 집중된 주주권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업조직원 모두가 평등하게 한 표씩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소득과 부의 평등분배와 동시에 진정한 의미의 평등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여기서 로버트 달은 소득이 평등한 경제가 실질적 민주주의의 전제이며 이를 실현하기위해 기업의 경영을 민주화하여 기업을 모든 기업 구성원들이 동등하게 경영에, 직접이든 간접이든, 참여하는 자율관리기업(self-governing enterprise)으로 바꾸어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기업의 예로 과거 실패한 유고슬라비아의 노동자관리기업을 염두에 두고, 이러한 기업도 100년 이상 계속되었더라면 - 물론 사회주의독재가 아닌 민주정치시스템 하에서- 성공했으리라는 희망 섞인 기대를 피력하고 있다.

따라서 경제민주화란 정치영역에서 통용되는 일인일표의 민주주의 의사결정 방식을 경제 생활에도 적용하여 모두가 평등한 부와 소득을 누리는 경제적 평등을 실현하겠다는 주장인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경제민주화는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하더라도 결국 그 본질은 기업과 경제의 사회화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 서구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의 경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경제민주화를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의 경우도 이미 1987년 민주헌법이 “경제민주화를 위한 정부의 규제와 조정”을 선언한 이후 이미 20년 넘게 경제민주화정책들을 추진해 왔다. 그런데도 지난 19대 대선과정에서 보다 강력한 경제민주화 주장들이 난무했다. 대선에서 승리한 박근혜대통령은 집권 첫해인 지난해 중기고유업종 지정, 골목상권 규제, 마트의 의무휴업 규제, 일감몰아주기 규제, 금산분리 강화, 순환출자 규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유도 등 강도높은 경제민주화 입법들을 마무리한 바 있다.  

그 주장들의 방향은 대체로 서구의 경제민주화 이념을 추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기업규제와 관련해서는 대기업의 순환출자금지, 출자총액규제 부활, 비은행산업의 금융산업 진출 금지(금산분리), 계열사 일감몰아주기 방지, 골목상권 진출 규제 및 중소기업 업종 부활 등이 대표적이다. 이같은 규제를 통해 대기업의 경영 및 투자 활동을 규제하여 대기업경제력 집중을 막자는 것이다. 또 재래상권 및 중소기업 등 취약부문에 대한 보호를 강화해야한다는 주장도 있다.  대기업 지배구조를 민주적 의사결정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경영민주화 주장도 있다. 대기업 그룹을 아예 분할 해체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까지 있다. 경제민주화로 표상되는 정책들은 이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 경제민주화는 사회민주적 경제평등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개인과 기업의 열심히 일하려는 의욕을 무력화하는 발전역행적인 정책이다. 경제는 민주화대상이 아니며, 경제를 활성화시키려면 대기업과 수도권규제등을 과감하게 풀어 투자의 물꼬를 터야 한다. 정부의 진정한 역할은 국민들에 동기를 부여하여 발전의 길에 나서게 하는 것에 있다. 시장의 차별화를 통한 동기부여 기능을 무력화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부당내부거래 규제 등 경제민주화 입법을 주도한 노대래 공정위원장이 국회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이런 주장들은 정의니, 공정이니, 공생이니 하는 여러 가지 정치적 미사여구로 그 명분을 포장하고 있으나 결국 논의의 본질은 기존 대기업의 경제적 영향력을 축소하여 보다 평등한 기업생태계를 만들어 내어야 경제부문에도 평등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경제민주화, 혹은 경제평등주의 이념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각 정당들은 보편복지를 위한 재분배정책의 강화를 공약화함으로써 서구 사회민주주의체제를 지향한다는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
그럼 이렇게 경제민주화를 하면 그렇게도 갈망하는“경제양극화 해소”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2. 경제와 기업은 민주화의 대상이 아니다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는 경제민주화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현실의 시장은 경제주체들의 경제적 성과에 따라 그 보상을 차등하고 구매력의 과다에 따른 경제적 영향력의 차이를 인정함으로써 동기부여를 통해 보다 높은 경제발전을 유도하는 “경제적 차별화를 통한 동기부여”장치라 했다.

경제적 차이, 차등, 차별을 통해 모두를 경제발전의 길에 나서게 동기 부여하는 것이 시장의 본질이다. 따라서 경제발전은 바로 경제적 불평등과 경제력의 집중과정을 통해 실현될 수밖에 없다. 평등한 부와 소득, 그리고 평등한 기업생태계를 만들어내면 혹은 만들어내고자 한다면 그 경제는 이미 변화와 발전의 동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은 모두가 동반성장하는 과정이지만 결코 같아질 수는 없는 과정이다. 그런데 만일 정부가 나서 경제를 민주화해서 각자의 성과에 관계없이 경제적 부를 평등하게 배분하겠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모든 국민들이 일안하기, 즉 태업에 나설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경제적 결과 또한 하향평준화를 통한 국민 경제의 몰락이 아니겠는가?
 

결국 경제민주화는 그 민주적 평등의 이상이 아무리 높다하더라도 경제적으로는 국민들의 일할 동기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경제정체를 불가피하게 한다. 나아가 경제민주화가 추진되면 정부의 공공정책은 항상 시장의 차별화기능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시행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경제발전에 역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재분배 복지, 사회정책이 확대되면 저성장, 실업, 재정적자의 위험은 증대될 수밖에 없다. 서구 유럽이나 일본 등 선진국들의 실패하는 사회민주주의 실험도 바로 경제민주화이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경제적 차이, 차등, 차별을 전제로 하는 경제작동 원리와 절대평등을 전제로 하는 일인일표의 민주주의원리와는 같이 갈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경제발전을 원한다고 한다면 경제는 결코 민주화대상일 수 없는 것이다.
 

한편 경제민주화 주창자들은 하나같이 기업경영의 민주화를 그 전제라고 생각하는데 그럼 기업경영은 민주화의 대상일 수 있는 것인가? 기업의 본질은 의사결정의 수직적 명령질서라는 조직원리에 있는 것이며, 이것이 시장과는 달리 기업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시장에서의 모든 거래는 거래조건에 대한 거래당사자간의 자발적 합의를 기초로 하기 때문에 수평적 질서를 기초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장거래를 위해서는 당사자 간의 거래조건에 대한 협상과정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래 협상과정은 정보의 불확실성 때문에 양(陽)의 거래비용을 수반하며, 이러한 거래비용이 지나치게 높으면 거래는 성사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기업의 내부거래는 협상이 아니라 수직적 명령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장거래에 비해 거래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따라서 기업은 높은 거래비용을 수반하는 시장거래 활동을 내부화하기 위한 장치로 등장하는 것이다. 기업의 등장 및 존재이유는 바로 기업내부의 자원배분이 수평적 협상이 아니라 수직적 명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기업특유의 조직 원리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기업의 의사결정 구조를 수평적 질서로 전환하면  기업의 거래비용 절약의 이점은 사라지고 기업의 존재이유 또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즉, 기업의 의사결정을 민주화하여 수평적 질서로 전환시키고, 모든 구성원들이 경영에 참여하게 되면 경영에 수반하는 거래비용이 급증하게 된다. 이는 기업자체의 유용성을 사라지게 만든다. 기업이 존재해야할 이유가 소멸되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기업경영을 민주화하여 모든 구성원들이 동등하게 경영에 참여하게 되면 각자의 성과에 관계없이 소득을 평등하게 나누거나 아니면 적어도 성과만큼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지기 어렵게 될 소지가 크다. 때문에 기업내부 활동에 있어 태업가능성이 커지고 기업의 효율성은 훼손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기업경영의 효율을 원한다면 기업은 결코 민주화의 대상일 수 없는 것이다.

경제변화의 원리와 기업의 존재이유가 이러한데도 경제와 기업을 민주화하게 되면 부나 소득은 다소 평등해질지 모르나 경제의 정체를 통해 모두가 다 하향 평준화되어 경제양극화 해소는 고사하고 모두가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경제민주화가 오늘날 경제양극화의 뿌리다(이절의 내용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좌승희, 김창근, <이야기 한국경제>, 2010, 일월담 참조.)

한국 경제는 이미 지난 20년 이상을 경제평등주의 이념을 실현하기위한 경제민주화의 길을 걸어왔다. 더구나 1987년 당시 헌법 119조 ②항이 무리 없이 도입되게 되었음은 이미 한국의 사회적 분위기가 경제민주화를 수용할 만큼 평등주의적 성향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보편화된 대기업규제 정책, 무차별적 중소기업 육성 정책과 농업보호 정책, 지역균형 발전 정책, 수도권 규제 정책, 교육평준화 정책, 전투적 기득권 노조의 방치, 재분배 복지 정책의 지속적인 확대 등은 바로 경제민주화이념의 틀 속에서 이루진 것이다. 따라서 경제민주화 정책 기조는 어제 오늘일이 아니라 이미 우리나라 정책체제에 깊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50여년 한국경제의 발전사를 살펴보면, 전반 30여년은 연평균 8~9%의 초고속 성장에 수출과 내수, 대기업과 중소기업, 성장과 일자리 그리고 분배가 동반 개선되는 양질의 발전을 실현하여, 세계은행 등 국제기관이나 학계로부터 가장 모범적인 동반성장국가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후반, 경제민주화 정책 기조가 도입된 이후 1990년대부터 20여 년은 반대로 잠재성장 능력의 장기 추세하락 속에 그와 같은 동반성장 메커니즘이 작동되지 않아 소위 경제양극화가 심화되어 왔다. 한국경제의 잠재성장 능력은 지난 20여 년간 지속하락하고 있으며 조만간 추세적으로 영(零)%성장을 면치 못하게 될 전망이다. (<그림 7> 참조).


                <그림 7> 한국경제의 장기 잠재성장율 추이

   
 

지금 경제민주화 요구를 촉발시키는 이 모든 불균형의 심화추세가 바로 우리가 선진화, 경제민주화를 내걸고 경제운영을 평등주의 정책 체제로 전환한 1990년대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럼 한국의 개발연대(1960대-1980년대) 동반성장은 어떻게 가능 했는가? 수출주도 성장전략 하에서 성장하는 수출기업들이 수출의 과실을 국내투자로 환원시킴으로써 수출이 내수부문과 고용을 늘리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과이다. 당시의 한국기업들은 정부의 적극적인 독려 하에 내수투자를 늘릴 수 있었다. 당시에는 노조를 지나치게 억압한 문제가 있었지만 1990년 대 이후와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투적 노조는 없었다.

당시에는 수출을 많이 하여 대기업이 되는 것이 더 많은 투자를 할 수 있는 이점이 되었으며 경제력집중 규제라는 이름으로 대기업들의 국내투자를 규제하는 일은 없었다. 당시에는 대기업이기 때문에 수도권에 투자하는 것을 막는 수도권규제정책은 없었다. 대기업들이 수출 과실을 국내에 환원하는데 큰 제약이 없었다. 수출종합상사들이 수출을 늘리는 일은 중소기업들과의 연대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다. 수출이 바로 중소기업들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그럼 왜 양극화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동반성장이 안 되고 있는가? 근로자를 위한다는 전투적 노조방치, 작기 때문에 지원하는 중소기업지원정책, 크기 때문에 규제하는 대기업규제, 지방을 위한다는 수도권규제 등 경제적 약자를 더 우대한다는 경제민주화 정책들이 결국은 투자할 능력이 있는 기업들의 해외투자를 과도하게 조장함으로써 좋은 일자리를 해외에 팔고 소위 비전 높은 청년들이 기피하는 중소기업 일자리만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장하기 때문에 규제받는 대기업들은 해외로 떠나고 99%이상이 중소기업이고 88%이상이 중소기업 일자리인 한국경제, 중소기업이 성장하기보다 중소기업으로 남아있음이 더 유리한 인센티브구조를 만들어내는 중소기업육성정책 속에서 한국경제가 일자리문제와 경제하향 평준화 에 봉착하게 됨은 너무나 당연한 경제적 결과이다.
 

대기업투자에 대한 규제들이 때에 따라서는 사회정의나 공정 혹은 정치적 이유로 의미 있을 경우도 있으나 경제적으로는 수출및 제조 대기업들의 국내투자 감소와 그에 따른 국내 일자리감소, 국내중소기업과 서비스부문에 대한 수요 감소 등을 초래함으로써 수출과 내수, 대기업과 중소기업, 제조업과 서비스업 간의 양극화현상을 오히려 더 심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지금의 정치권은 경제민주화로 초래된 경제양극화와 왜곡을 더 적극적으로 경제민주화를 해서 풀겠다는 형국인 셈이다.

성장하는 기업이 아니라 작은 기업이 우대받는 경제에서 좋은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연목구어와 다름없다. 동반성장을 위한 답은 간단하나 실천은 어렵다.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투자할 능력이 있는 기업들이 국내투자를 늘릴 방안을 정부와 기업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한다. 대기업규제와 수도권규제 문제를 풀지 않고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내기는 어렵다. 전투적 기득권 노조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책은 없다. 진정으로 기업투자에 도움 되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기업의 의향은 물어보지도 않고 정부가 나서 “경제민주화를 해서 투자할 능력이 있는 대기업들의 투자를 규제하여 일자리 늘리겠다.”는 정책은 연목구어에 다름 아니다.
 

수출및 제조 대기업들의 국내 투자기피로 좋은 일자리 부족과 소위 경제양극화에 직면한 한국경제 문제의 해법은 경제민주화가 아니라 투자할 능력이 있는 기업들이 투자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소리를 낼 수 있는 정치지도자들이 등장하지 않는 한 한국경제의 미래는 암울하다.

VI. 결어: 어떠한 정치도 정책도 국민의 동기를 차단하면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오늘날 세계경제와 한국경제가 부딪치고 있는 경제문제들의 핵심 원인은 바로 국민들에게 일할 동기를 부여하기 보다는, 국민들의 뜻에 따른다하여 국가가 국민들의 경제생활을 보장한다고 약속함으로써 다수 국민들의 일할 동기를 차단하는데서 연유하고 있다.

시장은 끝없이 “열심히 하지 않고는 경제적 부를 쌓을 길이 없다”고 하는데도 정치계와 정부는 나서 “시장은 잘못됐습니다. 우리가 시장이 만들어낸 불평등을 고쳐 모두를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고 약속을 하고 있으니 국민들이 동기부여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열심히 일하지 않는데 경제성장이 가능할 수는 없으며, 그래서 재정이 건전해질 수 없는데 복지지출은 더 늘려야 하니 재정적자와 국가부채의 증가는 필연적 결과이다. 이에 따라 금융 불안은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난 반세기 이상을 선진국을 중심으로 세계경제가 걸어온 “모두 번영하는 행복의 길”의 종착역인 셈이다.
 

그래서 정부의 진정한 역할은 국민들에 동기를 부여하여 발전의 길에 나서게 하는 것이지, 시장의 차별화를 통한 동기부여 기능을 무력화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님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장의 동기부여 기능을 활성화하는 정부만이 발전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경제적 차등을 없앤다고 시장에 개입하여 차별화기능을 무력화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적 차별화를 통해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취약한 경제주체들의 역량을 키워주고 모두 스스로 돕는 자로 태어나도록 유도함으로써, 모두 같아지지는 않지만 모두 발전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70억 인류의 지속가능한 발전의 길”이 아닌가 싶다.

열심히 앞서가는 경제주체들은 보다 많은 성공노하우와 시너지를 창출하도록 격려하고 ·유도하여 자본주의 경제의 트리클다운 효과를 극대화해야 한다. 동시에 취약한 경제주체들은 스스로 돕는 자를 우대하는 경제적 차별화를 통해 동기부여해야 한다. 이를 통해 그 역량을 키워나가는 것만이 지속가능한 발전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경제는 모두 같아지지는 않지만 모두 발전하는 동반성장의 장이다.

그러나 모두 경제적으로 같게 만들고자 시장에 개입하면 모두 망하는 하향평준화를 피할 길이 없다. 일인일표의 민주주의 하에서 경제평등주의 정치이념이 경제의 왜곡을 초래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70억 인류의 경제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없다. /좌승희 미디어펜 회장, KDI 국제정책대학원 초빙교수, 전 한국경제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