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지호 기자] “개인투자자가 선물에 투자하려면 기본예탁금 3000만원, 옵션은 5000만원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사전교육 30시간과 모의투자교육 50시간을 이수해야 실제 투자에 뛰어들 수 있어요. 또 옵션에 투자하려면 1년의 선물투자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건 개인에 선물·옵션 투자하지 말라는 얘기와 뭐가 다릅니까. 그 시간과 비용이면 차라리 대학을 하나 더 다닐 수 있겠네요.”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의 볼멘소리다. 금융당국이 ‘투자자 보호’라는 명분으로 개인에 지나치게 엄격한 진입장벽을 들이대면서 파생상품시장이 지나치게 위축됐다는 불만이다. 파생상품시장의 축소는 결국 국내증시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24일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거래량 기준으로 지난 2010년 글로벌 1위였던 국내 파생상품시장은 지난해 12위로 추락했다. 그 사이 4위였던 인도가 2위로 올라서는 등 중국, 홍콩, 일본과 같은 아시아권 파생상품시장은 급성장했다.
과거에 비해 국내 증시의 변동성이 떨어지긴 것도 이유지만, 이처럼 국내 파생상품시장이 쪼그라든 것은 무엇보다 개인투자자에 과도한 규제 장벽을 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실제로 2000년대 초반 개인투자자의 코스피200 선물 거래량 비중은 60%, 코스피200 옵션 거래량 비중은 70%를 넘겼지만 현재는 20%대 수준으로 주저앉은 상태다.
키코(KIKO) 사태와 검찰의 주식워런트증권(ELW) 거래 수사 등이 이어지면서 책임회피에 다급했던 정부와 금융당국은 2012년부터 각종 파생상품 시장 규제를 쏟아냈다. 그해 3월에는 코스피200지수 옵션 계약 단위(승수)를 10만원에서 50만원으로 5배나 인상했다. 2001년 500만원이었던 개인투자자 기본예탁금은 2014년에는 3000만~5000만원으로 급격히 올렸다. 문제가 생기면 아예 차단해버리는 ‘탁상행정’의 전형이었다.
이에 따라 지난해 장내파생상품 거래량은 8억 계약으로 2011년 대비 80%가 급감했다. 투자자보호라는 규제 도입 명분과는 달리, 국내 투자자들은 상대적으로 보호장치가 미미한 해외 파생상품시장으로 쏠렸다. 저금리가 고착화되고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투자자들이 국내 파생상품시장이 막히자 외국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2010년 약 50조원이었던 국내 투자자의 월평균 해외 파생상품 직접투자 규모는 지난해 250조원으로 5배나 폭증하면서 국부 유출에 대한 우려마저 불거지고 있다.
국민연금과 우정사업본부 등 기관투자자 파생상품 차익거래에 대한 과세도 파생상품시장 거래 위축의 또 다른 요인이다. 정부 산하기관인 이들에 세금을 매기면서 국가가 국가로부터 세금을 걷는 우스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기초자산의 거래 위축을 초래하면서 결국 증권거래세가 더욱 감소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0.1% 이익을 기대하는 차익거래에서 거래세 0.3%를 내면 오히려 손해가 나기 때문에 우정사업본부는 차익거래 규모를 급격히 줄였다. 결국 우정사업본부에 대한 과세 이후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세수가 762억원 줄었을 뿐 아니라, 국내 파생상품시장을 외국인이 주도하면서 호가스프레드가 커지는 투기적 시장으로 변질되고 있다.
이처럼 불합리한 규제로 국내 파생상품이 고사상태 위기에 놓였지만 금융투자업계는 금융당국과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벙어리 냉가슴 앓듯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투자업계 고위관계자는 “금융당국에서 파생상품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한다”며 “시장을 안정시켜야 하는 정부의 입장이 이해가 가지만, 업계의 얘기를 전혀 듣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세수가 줄고 파생상품시장도 죽었지만 사태의 주범인 정부는 팔짱만 끼고 지켜보는 복지부동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금융세제과 관계자는 “우정사업본부에 과세하는 게 법이나 조세원칙 상 문제가 없다”며 “국내 파생상품시장이 꼭 1등을 해야 하나”고 반박했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도 “파생상품시장의 활력이 과거에 비해 줄었다는 점은 인정한다”면서도 “개인투자자가 함부로 들어가야 하는 시장은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을 제외한 글로벌 파생상품시장이 매년 10% 정도씩 성장하고 있고 리스크 관리 등 경제적 순기능을 고려할 때 파생상품시장의 경쟁력을 부활시키기 위한 조치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우정사업본부에 대한 거래세 부과도 결국 국가의 세금이 이전되는 수준에 불과해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 개인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투자자예탁금과 사전교육 등은 국제적으로 거의 유일한 제도”라며 “이를 완화하되 선물·옵션 계좌개설부터 적합성 요건을 강화하고 손실계좌에 대해 주기적인 관리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른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영리법인도 아닌 국가기관 우정사업본부에 정부가 거래세를 매기는 것은 결국 세금을 이전하는 수준에 불과한 조삼모사식 정책”이라며 “파생상품시장도 죽이고 세수도 떨어뜨리는 이해할 수 없는 행태”라고 비판했다.
[미디어펜=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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