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낚시전문대기자이자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하응백씨가 국악계의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는다는 의미에서 그 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경기산타령과 서도산타령의 선후 문제와 문화재종목 사유화에 대한 의견이 담긴 글을 기고했다. 이에 본지는 3회에 걸쳐 하응백씨의 특별기고를 전재한다. [편집자 주] 놀량사거리(서도산타령)와 경기산타령의 진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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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응백 문학평론가 |
4. 놀량사거리와 경기산타령의 선후관계
서도입창(놀량사거리)과 경기입창의 선후 관계에 대해 이창배는 『한국가창대계』에서 "서도의 놀량사거리와 남도의 화초사거리는 모두 서울 놀량에서 파생되었다."(p.318)고 하며 또한 "서도 놀량, 앞산타령, 뒷산타령, 경발림은 서울의 잦은 산타령 즉 도라지 타령만 이름을 바꾸어 경발림이라 한 데 불과하다"고 하면서, 그 근거로 "이는 서울 산타령의 시조인 의택이 제자인 종대와 더불어 금수강산으로 이름높은 평양에 가서 달 밝은 밤에 부벽루에 올라 굽이치는 대동강을 바라보며 목청 좋게 <놀량>과 산타령을 불렀다 한다. 이에 본래 서도의 명창인 허덕선과 김방울이 이를 듣고 모방하여 지금의 <놀량>이 된 것이다"(p.318)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창배의 이러한 진술로 인해 그후 상당히 오랫동안 경기산타령이 산타령의 원조라는 인식이 강하게 국악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이창배의 진술을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창배가 서도 <놀량>을 <경기산타령>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진술하는 대목, 즉 의택과 종대가 평양에 가서 달 밝은 밤에 부벽루에 올라 굽이치는 대동강을 바라보며 목청 좋게 <놀량>과 산타령을 불렀고, 이에 본래 서도의 명창인 허덕선과 김방울이 이를 듣고 모방하였다는 진술은 아무래도 신빙성이 없고 설화적이다.
왜냐하면 둘이서 산타령을 불렀다는 점도 그렇고, 이를 허덕선과 김방울이 한 번 듣고 모방하였다는 것도 그렇다. 아무리 뛰어난 음악성을 가진 명창이라 하더라도 달밤에 한 번 듣고 놀량을 다 배웠다? 놀량 가사의 길이나 음악의 난해성을 생각하면, 하루 밤에 한 번 듣고 배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쉽게 배울 수 있는 노래라면 산타령은 경기건 서도건 문화재 종목에서 해제되어야 마땅하다.
허덕선과 김방울이 의택과 종대에게서 하룻밤에 배웠다는 전설이 있기에, 이 전설을 토대로 <서도 놀량>이 <경기 산타령>을 모방하였다고 하는 결정적인 근거라고 하기에는 논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한참 미흡한 것이다. 설사 의택과 종대가 평양에 가서 산타령을 불렀고, 허덕선과 김방울이 그 소리 한 자락을 배웠다하더라도 그것이 <서도 놀량>과 <경기 산타령>의 선후관계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아닌 것이다.
보다 확실한 것은 여러 문헌 자료의 분석과 <서도 놀량>과 <경기 산타령>의 가사 분석과 선율 구조의 분석을 통해서만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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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왕의 남자 스틸 컷. |
20세기 초반에 발행된 여러 잡가집을 보면 '판염불, 앞산타령, 뒷산타령, 자진산타령'의 계열과 '놀량, 사거리, 중거리, 경발림'의 순으로 나오는 계열, 두 가지가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판염불 계열이 현행 <경기 산타령>이며, <놀량> 계열이 현행 <서도 놀량>이다. 즉 20세기 초반에도 이미 다른 두 계열의 입창이 동시에 존속했던 것인데, 이 가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서도 놀량>이 더 고형(古形)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1870년에서 1873년 사이에 만들어진 신재효본 『박흥보가』와 『변강쇠가』에 <놀량>의 연희방식과 가사가 일부 보이는데, 그 가사가 <서도 놀량>에 훨씬 가깝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직접적 증거는 될 수 없지만 1965년 김천흥과 이두현이 조사한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 12호> 봉산탈춤 분분을 보면 제 3과장에 사당패가 등장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때 부르는 것도 <서도 놀량>이다.
또한 최근의 연구결과(신현남의『산타령연구』, 서울대학교대학원, 2009. 이 논문은 <산타령>에 대한 최초의 박사학위 논문이다)에 의하면 "경기 놀량과 앞산타령은 서도 놀량과 사거리의 선율을 차용했으며, 경기 산타령은 서도 경발림의 선율을 상당부분 가져왔음을 말해준다"(앞의 책. p.247)고 한다. 신현남은 결론적으로 "사설부분에서 경기 산타령이 서도 산타령을 차용하였듯이 음악에 있어서도 경기가 서도의 것을 가져다 보다 복잡하고 불규칙한 전문성을 요하는 음악으로 만든 것"(앞의 책. p.247)으로 결론짓는다.
서도입창인 놀량사거리와 경기산타령의 선후관계에 대한 결론을 말하자면 서도의 놀량사거리가 더 고형(古刑)이다. 그렇다고 서도산타령이 경기산타령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둘은 사당패 소리가 전승되어 서도와 서울 경기 지방에서 각각 발전 전승한 것이기에 둘 다 중요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다.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그렇다면 국악 전반에 걸쳐 해박한 지식과 전승 계보관계를 잘 알고 있었던 이창배가 왜 이런 허황한 전설 같은 진술을 했을까? 그 이유는 바로 일제 강점기에는 경기산타령이 서도의 놀량에 비해 열세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창배로서는 경기산타령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역사성에 대한 어떤 근거를 마련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 필요성에 의해 전설 같은 이야기를 제시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창배는 경기산타령과 사당패가 불렀던 판염불이 상관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애썼다.
이창배는 "그런데 이 서울의 산타령이 남사당에서 불리어졌다고 하는 학자가 있으나, 이것은 전혀 틀린 말이다. 남사당이 부르는 <판염불>은 산타령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뿐더러 그 사람들은 <산타령>을 알지도 못한다. 남사당의 예능보유자인 남운룡에게 필자가 물었더니 '우리 남사당은 전혀 모른다'고 하며 자기네들은 판염불만을 부른다고 분명히 말하였다. 이런 계제에 잘못 알았던 유래를 바로잡는다"(이창배, 『한국가창대계』,P.319)라고 진술한다.
1970년대 이후 남사당은 판염불과 산타령과의 관계를 모를 수 있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 판염불은 서도의 놀량의 영향을 받아 속화하면서 판염불은 사라지고 산타령만 남았기에 남사당이 산타령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놀량(산타령)은 1870년대까지는 분명 사당패가 담당한 것이었고, 이 이후 지역 토착화가 진행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이창배는 경기산타령이 사당패와는 상관없는 소리라고 극구 바로 잡았을까?
그 이유는 바로 이창배의 양반 의식에 있을 것이다. 경기산타령이 사당패의 소리를 이었다면, 그 자신은 사당패의 소리로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가 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창배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내용이다.
경기산타령 예능보유자인 이창배는 첫째 경기산타령이 사당패의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야 했을 것이고, 둘째 서도산타령보다 경기산타령이 정통성이 있다는 것을 또한 입증해야 했었다. 그런 이유에서 이창배는 의도적으로, 혹은 자기 암시로 사실과는 다른 주장을 펼쳤었고, 그런 내밀한 이창배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던 국악계로서는 이창배의 주장에 아무 의구심 없이 맞장구를 쳤던 것이 그간의 사정이었다. /하응백 문학평론가
[하응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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