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김연주 기자]늑장공시 논란을 빚고 있는 한미약품이 불성실공시법인 지정 우려에 공시를 지연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4일 한국거래소 등에 따르면 제약회사는 기술 판매 계약을 체결하면 상용화까지 가정한 전체 계약금액을 모두 수주한 것으로 공시한다.
그런데 제약회사의 기술수출은 완성품을 판매하는 제조업은 물론 토목공사나 선박 건조 등 장기간 계약이 진행되는 수주산업과도 확연히 다른 형태를 띤다.
제약·바이오 업체들은 신약 기술을 수출하면 계약금으로 10%가량만 받고 나머지는 임상실험 단계별로 진척이 있을 때마다 더 받는 식으로 수익을 챙기는 '마일스톤'(단계별 기술료) 계약을 한다.
언제든지 해지될 수 있는 이런 계약이 실제로 철회되기라도 하면 전체 공시 공액의 상당 부분은 가공의 숫자로 전락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한국거래소는 아직 바이오·제약업종의 특성을 고려한 별도의 기준을 정하지 않고 다른 업종과 마찬가지로 전체 계약금액을 공시하도록 하고 있다.
이 절차에 따라 한미약품은 지난해 7월 베링거인겔하임에 항암제 기술을 수출할 때 전체 계약금 8500억원을 공시했다.
당시 한미약품은 공시 기준이 모호하다고 판단하고 거래소에 찾아가 전체 금액을 공시할지, 계약금만 공시할지 문의했으나 거래소는 전체 금액을 공시해야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거래소 관계자는 "전체 금액을 공시하면서 각주 등을 통해 총 계약기간이나 현금 유입구조를 알리는 것이 일반적"이라며 "이는 바이오업종뿐만 아니라 사실상 조선, 건설 등 다른 업종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최근 제약·바이오 기업들이 급속히 외형 성장을 하면서 기술수출도 늘어나고 있지만 공시제도가 이를 뒤따라 주지 못한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 나올 만한 대목이다.
마일스톤 계약을 하는 제약업종은 전체 금액만 공시토록 할 것이 아니라 단계별 마일스톤 내용을 공시하게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계약이 중도 파기돼 정정공시를 낼 때 계약금이 원래 액수와 50% 이상 차이 나면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될 수 있는 기존 규정도 제약업계에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제약업종 특성상 신약 개발 과정에서 기술 자체의 한계가 드러날 수도 있지만 경쟁사 동향이나 의학계 트렌드 등 여러 외부 요인이 작용해 개발 자체가 중단될 가능성이 상존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원래 공시한 계약금액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면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될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한미약품이 지난달 30일 항암제 기술수출 계약 해지 내용을 장 개시 30분쯤 지난 오전 9시29분께 공시한 데는 불성실공시법인 지정 우려를 해소하느라 지체된 탓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약품 관계자는 "계약 중도 해지로 당초 공시액의 10분의 1 수준인 718억원을 받게 돼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며 "이 때문에 회사 공시 담당자가 거래소를 직접 찾아가 설명하고 진행 상황을 회사 상부에 보고하느라 적절한 공시 시간을 놓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한미약품 공시 담당자는 30일 오전 8시30분에 여의도 거래소에 도착해 8시40분부터 공시를 위한 절차를 진행했다.
거래소 공시 담당자는 이때 사안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장 개시 전에 공시하고 추후 필요할 경우 정정공시를 하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하지만 불성실공시법인 지정 여부를 놓고 혼선을 겪으면서 한미약품 담당자는 회사 내부 보고를 하느라 지체해 결과적으로 장이 시작된 후에 공시하게 됐다는 것이다.
한미약품 관계자는 "여러 사정이 있었지만 장 개시 전에 공시하지 못해 일부 투자자들에게 손해를 끼친 점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다"고 덧붙였다.
거래소 측은 "기존의 공시 계약금액에서 50% 이상 변경되면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될 수 있지만 귀책사유가 없으면 예외가 될 수 있다"며 "이번 건은 베링거인겔하임 측이 계약을 취소한 데 따른 것이기 때문에 불성실공시법인 지정 대상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한미약품이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될 가능성을 지나치게 우려해 몸을 사리다가 보니 일처리가 늦어지게 됐다는 얘기다.
[미디어펜=김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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