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 (1) 플라톤(BC 427~BC347)의 <정치가>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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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
플라톤의 대화편 중 <소피스트>와 <정치가>, <국가>에서는 정치가와 철학자, 유사 철학자의 특징과 역할이 여러 방식으로 기술되고 논의된다. <소피스트>가 철학자 연(然)하는 소피스트의 정체를 집요하게 밝혀내고 있다면, <정치가>에서는 참된 정치가의 기능이 어떠해야 하는지, 즉 참된 치자(治者, politikos)의 본 모습을 규명하고 있다. 여기서 도출되는 ‘왕도적 치자’(basilikos)는 <국가>에서 논의되는 철인왕에 다름 아니다. 이런 통치자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이상국가’의 주체에게도 상당부분 투영된다.
플라톤은 <정치가>에서 바람직한 정치가의 기능과 기준을 ‘드러내기’ 위해 상당한 분량의 변증술로 논의를 이끈다. 플라톤의 대화편 읽기는 이래서 많은 인내심이 요구된다. 특정 개념을 도출하기 까지 ‘그것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묻고 대답하는 문답법(dialektike)를 통해 조금씩 그 개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나로 된 커다란 바위를 정으로 끊임없이 쪼아가면서 그 속에 확고하게 내재해 있던 개념의 상을 밖으로 꺼내는 작업 같기도 하다. 마치 미켈란젤로의 조각 작품이 돌속에 갇힌 온전한 형체를 드러내기 위해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작업의 과정에서 탄생했듯이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산파술(産婆術)이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대화편이 이런 문답법의 대표적 예를 보여준다. 최종적으로 도출한 명제는 간명하다. 하지만 이를 도출하기까지의 치열한 논증의 문답이 바로 지혜를 찾는 과정 그 자체로서 더욱 중요하다. 독자들이 이러한 과정에 몰입하지 못하고 막바지에 도출되는 몇 가지 당연하게 여겨지는 명제에만 집중할 경우 이는 플라톤의 표면적 이해에 그치게 되기 십상이다.
◇ 지혜를 갖춘 ‘왕도적 치자’는 없을까?
플라톤은 이 책에서 변증술의 절차들을 구체적으로 수행하면서 통치자의 기능이 무엇인지 논리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사용되는 변증술의 핵심 방법은 ‘나눔’이다. 바로 통치술을 동물의 양육술과 인간양육술의 이분법적 나눔을 통해 인간양육술의 일종으로 파악해내는 방식이다.
플라톤이 전술, 재판술, 수사술로부터 치술(治術)을 구분해내는 것도 같은 이치다. 전술, 재판술, 수사술이 왕도적 치술을 행사할 수 있는 보조적, 기여적 원인(synaitia)이지만, 그 자체가 왕도적 치술의 핵심적, 근본적 원인은 아니다. 플라톤의 화자들의 대화를 통해 이러한 개념들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설명한다.
플라톤이 제시하는 최선의 통치는 법률에 의한 통치가 아니다. 사실 이는 ‘차선의 통치’이다. 최선의 통치는 지혜를 갖춘 ‘왕도적 치자’에 의한 통치다. 인간 통치와 관련된 완전한 지식을 갖춘 자만이 왕도적 치술을 행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왕도적 치자’는 현실적인 정치가의 모습이 아니라 원론적인 의미에서의 통치자다. 현실에 존재하기 어렵지만, 이상적 지향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 때의 왕도적 통치가 법 위의 통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법률의 공백을 보충해주는 초월적 위치의 통치에 가깝다.
참된 왕도적 치술이 요구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국가의 법률은 인간 사회 개개인의 모든 상황에 적합한 적용을 그때그때 제시해주지 못한다. 즉 법률은 보편적 상황을 전제하여 입법되는 것이므로, 변화하는 상황에 놓인 개개인에게 적합한 적용을 위해서는 법률이 미처 제시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통찰적 적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탁월함(arete)과 지식을 갖춘 통치자는 가장 올바른 것을 지성(nous)과 기술을 통해 국가 안의 모든 이들에게 적정한 보살핌을 베풀 수 있게 된다.
플라톤은 왕도적 통치술의 핵심기능을 옷감의 직조술에 비유한다. 씨실과 날실을 알맞게 엮어 짬으로써 훌륭한 모직옷감이라는 직물을 만들어내듯이 훌륭한 통치술은 지식과 기술의 적정한 교합이 이루어질 때 제대로 발휘된다. 왕도적 통치는 판단술이며, 일종의 지식(episteme)이여야 한다. 인간의 통치와 관련된 이러한 기준으로서의 지식은 지혜(phronesis)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지혜를 갖춘 통치자만이 법률이나 관습의 공백을 뛰어넘는 통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법률이 없이도 다스릴 수 있는 왕도적 치자의 전제 조건은 최선의 것과 가장 올바른 것을 정확히 판별해서 모든 이들에게 이로운 결정을 해 줄 수 있는 지혜를 갖춰야 한다는 의미다. 이런 ‘지성과 기술을 겸비한’ ‘국가의 바른 경영의 가장 참다운 기준’을 갖춘 정치가가 현실에서 존재할 수 있을까?
◇ 무절제한 민주주의에 정치가의 용기와 절제가 필요
플라톤은 이런 최선의 정치가를 기대했지만, 그 역시 현실적으로 이런 철인 정치가의 출현이 어렵다고 보고 ‘차선의 방법’(deuteros plous)으로서 성문화된 법률을 구상한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지혜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 마치 지식이 있는 사람인 양 성문법을 어겨서까지 자신만의 관점에서 나온 최선을 행하겠다고 요구한다면, 이는 잘못된 욕구에 사로잡힌 ‘참주’(tyrannos)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참주는 법률을 벗어날 때, 엄청난 해악을 만들어낸다. 이는 '왕도적 치자'와 유사 '왕도적 치자'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결과의 극명한 차이다. '왕도적 치자'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을 보여준다.
플라톤의 왕도적 치자에게 어울리는 정체(政體)는 무엇일까? 왕도적 치자가 곧 군주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군주정, 귀족정 등 소수가 지배하는 정체에서 왕도적 치술이 더 용이하다고 본다. 민주정체의 경우 이성과 지혜보다 데마고그(demagogue, 선동가)의 선동에 휩쓸릴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의 판결을 내린 것도 시민의 직접 평결이었다. 플라톤은 집단적 이기와 오류를 낳던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 폐단에 대해 절감하고 있었다. 플라톤이 "모든 것이 무절제한 것들일 경우 민주제에서 사는 것이 일등감이지만, 모든 것이 질서정연할 때는 우리는 이 정체에서 가장 살아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가 왕도적 치자를 절실하게 희구한 배경이 아닐까.
왕도적 치자에겐 용기(andreia)와 절제(sophrosyne)가 씨실과 날실처럼 결합되어야 한다. 플라톤은 이런 완벽한 정치가가 있다면 일인통치일지라도 최선의 정체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물론 플라톤이 도출해낸 정치가의 기능과 자격은 현실적으로 완벽하게 구비하기가 쉽지 않다. 정치가가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국민의 불신과 조롱을 받는 것도 정치가의 본질적 기능인 통치술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최선의 통치를 해 낼 수 있는 정치가가 되기 위해, 지혜와 덕을 쌓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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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의 <정치가> |
☞추천도서 : 『정치가』, 플라톤 지음, 김태경 옮김(2011, 5쇄), 2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