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번복후 '옥상옥' 조건제시 반복…김부겸 "침몰하는 배 바라만 볼건가" 자성
[미디어펜=한기호 기자]정권 비선실세 파문 속에서 논란의 핵인 최순실씨와, 공세 대상이 된 여권의 생각보다 기민한 대처에 야권이 입장 번복을 거듭하는 등 우왕좌왕하는 모양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은 야권이 주도해온 개헌 논의를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 내 개헌'으로 시한을 정하고 나서자 24일 최순실씨의 대통령 연설문 수정 정황 확보 보도 관련 진상규명을 빌미로 거부했고, 이후 야권이 선창(先唱)한 '최순실 특검'을 새누리당도 26일 당론으로 받아들이자 세부사항을 두고 협상을 벌인 끝에 청와대 인적쇄신 등 선결조건을 요구하며 협상을 백지화했다.

이런 가운데 더민주 문재인 전 대표와 박원순 서울시장, 국민의당 안철수 전 상임공동대표와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 등 야권 지도자들이 거국중립내각 구성을 잇따라 제안, 새누리당이 전날(30일) 이를 전격 수용하자 더민주는 다시 거부로 돌아섰다.

추미애 대표는 줄곧 최씨의 즉각적인 입국을 종용했다가 전날 최씨가 귀국하자 즉각 체포하지 않은 검찰이 '수사 쇼'를 하고있다고 쏘아붙였고, 같은날 새누리당의 거국중립내각 제안 수용에도 "듣고싶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다"며 "오물같은 데다 다시 집을 짓겠다는 말이냐. 집이 지어지겠나"라고 원색 비난으로 대응했다. 

당일까지도 요구했던 청와대 우병우 민정수석·안종범 정책조정수석 등 수석라인과 이재만·정호성·안봉근 비서관 등 이른바 '문고리 3인방'의 사퇴 요구가 관철된 후엔 "게이트 수습용 인선", "은폐·국면전환용 조치"라고 치부했다.

이는 마치 자신들이 먼저 제안한 것조차 정국 상황 및 정략적 의도에 따라 보류하는 것으로 비춰져, 일관성과 전략적 대응이 결여됐다는 지적을 초래하고 있다. 각자 수권정당을 자처하면서도 정작 정치공세에만 치중하고 있어 정국 정상화 의지가 결여된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야권 내부에선 대선을 앞두고 정국 최대의 호재를 맞고서도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비판, 청와대와 여당의 전략에 말려든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와 비등하게 맞서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31일 오전 최고위원회의에서 "야당이 제안한 개헌, (최순실) 특검, 거국내각 (여당이) 받으니까 걷어차버렸다. 도대체 왜 이러는가. 원하는 게 뭔가. 무슨 대안이 있나"라며 "아노미상태로 대한민국을 만들어가겠단 것 아닌가"라고 일갈했다.

뒤이어 정세균 국회의장 주재로 여야 원내교섭단체 3당 원내대표 회동이 있었지만 정 원내대표는 야당 지도자들에게 같은 물음을 재차 던진 뒤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우상호 더민주 원내대표는 오전 회의에서 여당의 거국내각 제안 수용을 '국면전환용 카드'로 치부하고 ▲특별법 제정에 따른 최순실 '별도 특검'을 비롯해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신설 ▲어버이연합 청문회 ▲세월호 특검 합의를 등 오랜 정쟁사안까지 선결 조건으로 내세우며 타결 가능성을 더욱 멀어지게 했다.

앞서 더민주는 당 지도부가 직접 거국중립내각을 요구한 적은 없지만, '상왕' 격인 문재인 전 대표를 비롯해 대권 주자들을 중심으로 거국내각 요구가 잇따르면서 사실상 당 전체의 요구로 읽혀왔다.

국민의당 역시 당론화 과정을 거치진 않았지만, 박지원 비대위원장이 거국내각을 언급하고 안철수 전 대표가 총리를 포함한 내각 총사퇴를 주장하는 등 전현직 대표가 나서면서 거국내각 구성 요구가 당의 입장으로 해석됐다.
 
그럼에도 일단 여당의 거국중립내각 수용에 반대의사를 분명히 한 것은 그 진정성과 함께, 주말 동안 급속도로 전개된 여권의 수습 움직임과 검찰 수사 등 일련의 과정에 대한 의구심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 원내대표가 일찍이 야권의 우병우 수석 사퇴 주장에 동조해온 데다, 문 전 대표의 거국내각 제안에 '개헌'을 전제로 충분히 고려할 만하다는 입장을 내비친 바 있어 근거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더민주의 거듭된 '선 입장번복 후 조건제시'는 사실상 '최순실 사태'로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 회고록 파문이 수면 밑으로 가라앉은 효과와 동시에 확실하게 잡은 정국 주도권을 내줄 수 없다는 정략적 의도가 크게 작용했다는 관측이다.

국민의당도 유사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안 전 대표는 이날 비상대책위원-국회의원 연석회의에서 "지금 정부와 여당은 작전 펼치듯 기획 대응하고 있다"며 "(25일) 대통령의 녹화사과 이후 최순실의 인터뷰, 고영태 귀국, 조인근 전 연설비서관의 모르쇠 해명, 최순실 전격 귀국, 청와대 비서진 교체, 새누리당의 거국중립내각 수용 등이 일사천리로 이뤄지고 있다"고 여권의 협조적 태도를 문제삼는 논리를 폈다.

이 중 특히 새누리당이 주장하는 상설특검 도입에 대해 야권은 대통령이 특별검사를 임명하는 방식이라며 애써 외면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박지원·박영선·박범계 등 현직 야권 중진 의원들 주도로 2014년 만든 뒤 단 한번도 활용한 적 없는 상설특검 제도를 또다시 부정하는 격이라는 허점을 노출하고 있다. 

현행 상설특검법은 법무부 차관·법원행정처 차장·대한변협 회장·국회 추천 4명 등 7명으로 구성된 특검추천위에서 특별검사 후보 2명을 추천하면 대통령이 1명을 임명하도록 한 반면, 별도특검법은 여야 합의로 추천된 특검 1명을 대통령이 임명한다.  두 제도 모두 특검 추천에 여야 의견이 반영되지 않을 수 없는 형태로 자의적 임명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가운데 거국중립내각을 가장 먼저 주장한 문 전 대표 측은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청와대 비서진과 황교안 국무총리 라인으로는 진실규명이 불가능하고 이런 상황에서 리더십 공백을 메우는 방안으로 거국내각을 말한 것"이라며 "사태에 책임이 있는 집단이 마치 거국내각을 주도하는 것처럼 상황을 끌고 가면서 게이트를 덮으려는 것 자체가 적절치 않다"고 한발 뺐다.

이날 오전 최고위에서 추 대표는 자당이 거국내각 수용하기 이전에 여당이 진상규명을, 우 원내대표는 진상규명을 위해 여당이 별도 특검에 응해야 한다고 '옥상옥(屋上屋)' 식 주장을 내놨다. 국민의당에선 이상돈 의원이 PBC 라디오에서 "새누리당의 거국내각 제안은 자기들이 정국을 주도하려는 것"이라고 치부했다.

그러나 야권 내 거국내각 요구가 사그라들지 않으면서 내부 혼선도 적지 않은 양상이다.

더민주 대권주자 중 1명인 김부겸 의원은 페이스북 글을 통해 "차기 집권을 준비하는 정당은 침몰하는 배를 바라보고만 있어선 안 된다"며 거국내각 논의 착수를 촉구, "대통령은 국회의장과 여야 대표들이 준비한 밑그림을 그대로 수용하고, 거국중립내각이 조속히 출범할 수 있도록 모든 협조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한시가 급하다"고 주장했다.

국민의당 천정배 전 공동대표도 "대통령은 자신의 허물을 깊이 반성하고 진심으로 엎드려 사죄한 뒤 수사를 자청해야 한다"며 "그런 전제에서 여야 대표를 만나 거국내각일 수도 있고 다른 방법일 수도 있지만 수습책을 논의하라"고 거국내각 카드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더민주는 이날 오전 의총에서 거국내각을 포함한 타개책을 논의했지만 초재선 의원을 중심으로 거국내각 수용을 주장, 지도부에선 반대 의견을 내면서 의견일치를 보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야당 지도부가 거국중립내각을 뒤늦게 뒤로 미루고 교통정리를 시도하고 있지만 백가쟁명식 의견 표출을 잠재우지 못한 데다, 스스로 내세운 선결요건인 별도특검 등 관철을 위한 대여(對與) 협상과 장외투쟁 여론, 정국정상화 지연 책임론 제기 가능성 등이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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