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장개석과의 비교…부통령 부정선거에 대한 민의를 존중 하야
1948년 대한민국을 세운 이승만, 1949년 대륙에서 대만으로 나라를 옮긴 장개석. 이 두 사람은 일제와 공산주의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자신들의 나라에서 정치를 한 모습은 전혀 상반된다.
 
장개석은 일제가 중국본토를 침략하였을 때, 그가 총통으로 있던 국민당이 중심이 되어서 중국공산당과 중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같이 일본에 맞서 싸웠다. 이승만 역시 미국에서 일본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을 했다. 미국에 이익에 부합하여 우리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장으로 활약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한반도는 해방이 되었다. 중국은 일본을 상대로 승전국가가 되었다. 이승만은 해방된 한반도에서 북한과 소련의 공산화 위협을 막고 대한민국을 세웠다. 그러나 한반도 이남 지역만 지켜내었다. 이북지역은 안타깝게도 소련에 의해 공산화가 되었다. 장개석은 국공내전에서 패한 이후 대륙에서 대만으로 국가를 옮겼다.
 
대한민국과 대만은 국내정치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 대만은 독재를 하였다. 우리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서서히 진행시켜 나갔다.
 
대만은 중국본토에 있을 때, 남경에서 총통/부 총통 선거를 실시했다. 대륙주민들이 선출한 국민대회의 대표들이 투표를 했다. 간접선거였다. 또한 우리나라의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입법위원선거가 국민들의 직접선거로 선출하였다. 이때가 1948년 이었다.

   
▲ 우남 이승만의 집권기간 내내 민주주의가 이루어졌다. 국회의원선거, 대통령직선제를 그의 집권기간 동안 꾸준히 실시했다. 그러나 3.15부정선거의 최종책임과 종신제 개헌으로 인해 그의 공적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있다.

 
대만으로 옮긴 1949년 이후 무려 20년간 선거는 없었다. 1969년 대륙에서 선출된 입법위원 중 사망한 사람에 의해 빈자리를 채우는 증원선거가 있었다. 본래 입법위원은 3년 임기였다. 그러나 대륙에서 선출되었으니 새로이 다시 뽑는 것도 대륙에서 해야 한다고 대만의 사법부가 결정을 했다. 그 전까지는 48년에 선출한 입법위원이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48년에 선출된 입법위원은 91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당시 대만의 정당은 국민당과 관제야당인 중국청년당, 중국사회민주당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입법위원은 국민당이거나 관제야당뿐이었다. 입법위원 선거 역시 국민당과 관제야당 후보로만 이루어졌다. 국민당의 일당독재나 다름없었다. 이것이 장개석이 총통으로 있으면서 죽고 나서도 지속되었다. 또한 1949년에 선포된 계엄령 역시 그가 죽고 나서도 지속되었다. 장개석은 1975년 사망했다. 대만은 1986년 계엄 하에 진짜 야당 민주진보당이 창당되었다. 1987년 계엄이 해제되었다. 1992년 입법원 총선거가 무려 44년만에 이루어졌다. 1996년 대만 최초로 총통직선제가 실시되었다.
 
대한민국은 1948년 유엔감시 하에 민주선거 4대원칙에 아래 5.10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국회의원 선거였다. 이러한 국회의원선거는 4년 간격을 두고 지속되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집권 내내 이어졌다. 또한 전쟁기간이었던 1952년 우리나라 최초의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역시 집권기간 내내 이루어졌다. 하지만 매끄럽지 못한 모습도 있었다. 이승만 집권 시기 제대로 된 야당이 존재했다. 1954년 이승만의 대통령 종신제 법안이 가결된 이후 야당통합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으로써 인의 장막에 가려 잘못된 길을 갈 때, 이를 막기 위해 1955년 통합야당 민주당이 창당되었다. 1959년 정부의 보안법 개정에 반대하였다. 1960년 정부여당이 야당부통령후보를 막고 여당부통령후보 당선을 위해 부정선거를 했다. 부정선거를 저지른 것으로 보아 야당이 관제야당이 아닌 진짜 야당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승만은 부정선거에 대한 민의를 존중하여 하야했다. 이승만 집권 시기 선거다운 선거, 야당다운 야당이 존재했다. 민주주의가 서서히 시작된 것이다.

   
▲ 장개석은 공산당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독재를 했지만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했다. 이승만은 이 땅에 민주주의를 들여온 인물이다./사진=연합뉴스

 
장개석은 그의 집권기간 내내 계엄령을 지속했고 총통도 죽을 때까지 유지했다. 선거다운 선거도 없었다. 이런 과오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대만을 있게 한 국부로써 기념관이 대북(타이베이)에 있다. 반면 이승만은 그의 집권기간 내내 민주주의가 이루어졌다. 국회의원선거, 대통령직선제를 그의 집권기간 동안 꾸준히 실시했다. 그러나 3.15부정선거의 최종책임과 종신제 개헌으로 인해 그의 공적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 그의 기념관조차 없다. 동상하나 세우는데도 온갖 방해가 있었다.
 
이승만은 장개석보다 민주적이었고 그것을 실현했다. 그의 집권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장개석은 공산당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독재를 했지만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했다. 이승만 그는 이 땅에 민주주의를 들여온 인물이다. 그런 인물을 위해 기념관을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 /강영모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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