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원수로 갚은 김재규…마지막 순간까지 "난 괜찮아"라며 눈 감아
   
▲ 김용삼 '박정희정신' 편집장,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기획실장
영웅의 최후

“총을 대통령 머리에서 약 50센티미터까지 가까이 대고 1발을 발사하여 대통령을 즉사시키고 나온 것이 기억되며…” (시해범 김재규의 진술)

은혜를 원수로 갚은 김재규, 박정희 대통령과 얽힌 인간적 에피소드를 밝힌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1979년 10월 26일 저녁.

박정희는 참선하듯 눈을 감고 정좌한 자세로 김재규의 총탄을 가슴에 맞았다. 동석했던 여성들이 놀라서 울부짖자 “난 괜찮아” 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는 박정희의 고향 후배로서 박정희는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현 구미시 상모동), 김재규는 선산군 선산면 이문리(현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가 출생지다. 두 사람이 서로를 알게 된 것은 1946년 9월 24일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하면서부터다. 

파란만장했던 박정희의 인생에서 조선경비사관학교는 만주 신경군관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이어 세 번째 입교하는 사관학교였다. 

박정희를 비롯한 2기생 196명은 80일 간의 교육을 마치고 1946년 12월 14일 소위로 임관했다. 졸업 성적은 1등이 신재식, 박정희는 3등이었다. 사관학교 졸업 후 군번 10166을 부여받고 춘천 8연대에 배속된 박정희는 1947년 10월 육사 중대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박정희가 최초로 사단장에 보임된 것은 1955년 양구의 보병 제5사단이었다. 그때 김재규는 보병 제5사단 35연대장이었다. 두 사람과의 관계는 김인만이 지은 『박정희 일화에서 신화까지』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가 발견된다.

   
▲ 2017년은 박정희대통령 탄생 100돌 및 서거 37주기가 되는 해이다./사진=박정희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잡지 '박정희정신-미래 100년 박정희에게 길을 묻다' 2017 1~2월 창간호


엉엉 운 김재규

어느 날 35연대 병기 창고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중요한 병기와 각종 장비가 다 불에 탔다. 이 사실이 즉각 상부에 보고되어 김재규는 박정희 사단장의 호출 명령을 받았다. 

“죄송합니다. 책임을 지고 연대장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박정희 사단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앞에 대기 중이던 지프에 올랐다. 

“타!”

박정희와 김재규를 태운 지프는 사단장 숙소에 도착했다. 사단장은 선반에서 양주를 꺼내 맥주잔 두 개에 가득 따랐다. 

“마셔!”

김재규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체질이었으나 죄인의 심정으로 술잔을 들이켰다. 몇 잔을 연달아 들이킨 김재규는 그 자리에 쓰러져 세상모르고 곯아 떨어졌다. 다음날 깨어보니 김재규는 사단장 침대에 누워 있었고, 사단장은 부관 방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자고 있었다. 다시 일어난 박정희는 아침상을 내놓고 또 양주를 들이키도록 했다. 얼마 후 참모장이 들어와 화재사고가 난 부대에 대한 처리가 완료되었음을 보고했다. 

“돌아가!”

그제야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연대 복귀를 명령했다. 연대장실로 오니 대기하고 있던 군수참모가 브리핑을 했다. 

“이번 화재사고로 소실된 장비가 많습니다. 소총, 기관총, 박격포, 무전기 손실분은 각 연대와 타 부대의 지원으로 충당됐고, 기타 소소한 장비는 동대문시장에서 구입해 채워놓았습니다. 병기고는 밤새 전 장병이 동원돼 깨끗이 완성시켜 놓았습니다.”

김재규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이 일화는 김재규가 보안사령관 재직 시절인 제5사단을 방문했을 때 부대장과 간부들에게 들려준 것으로, 그 자리에 참석했던 5사단 포병사령관 최갑석 대령이 증언한 것이다. 

1979년 10월 말, 최갑석이 보통군법회의 육군 심판관으로 궁정동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현장조사를 맡았다. 최갑석은 다른 사람도 아닌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궁정동의 그 때 그 순간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 만찬장에 있던 사람 중 생존자는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 가수 심수봉(본명 심민경), 그리고 대학생 신재순이었다. 신재순은 검찰 조사 과정에서 김재규의 대통령 시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문(검찰관): 그 상황을 이야기해 보시지요.
답(신재순): 조금 있다가 노래하다 키를 맞추고 있는데 총소리가 나며 “이 버러지 같은 놈” 하는 것밖에 못들었는데 조금 있다가 “피, 피, 왜 이래” 했습니다.
문: 그리고는 나갔었나요.
답: 예.
문: 좀 있다가 또 총성이 났지요.
답: 예.
문: 그때 각하가 어떻던가요.
답: 머리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식탁 옆으로 기울이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문: 그때 김계원 실장은 어떻게 하고 있던가요.
답: 총소리가 나고는 안보였습니다.
문: 조금 있다가 어떻게 되었나요.
답: 총소리가 나고 불이 꺼졌습니다.
문: 각하가 몸을 기울이고 있을 때부터의 상황을 말해보시오.
답: 불이 나가고 심수봉과 같이 각하를 부축하고 있는데 차 경호실장이 “경호원, 경호원”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문: 차지철 경호실장이 화장실에서 나온 이후에 기억나는 것이 있나요.
답: 각하를 일으켜서 식탁에 부축을 했는데 그때 김재규 부장이 나가더니 다시 들어와서 각하 머리를 향해 총을 겨눴는데 그때 놀래서 죽는구나 하고 실내 화장실로 갔는데 총소리가 계속 나더니 조용해진 것 같아서 보니 각하를 모시고 병원에 가시는 것 같아 나와 보니 검은 옷 입은 세 사람이 각하를 부축하고 갔습니다. (중략)
문(변호사 김수룡): 각하가 총에 맞은 건 언제 알았나요.
답: 총소리 나고 금방 누워계신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문: 총소리 나자마자 쓰러졌나요.
답: 아닙니다. 좀 기대면서 쓰러졌습니다.
문: 각하가 총 맞으시고 비명 같은 것 지른 일 없나요.
답: 숨소리가 거치셨습니다.

다음은 가수 심수봉의 검찰 진술이다.
문(검찰관): (김재규 부장이 차 실장에게) 쏘는 것을 봤나요.
답(심수봉): 예.
문: 어디에 맞았나요.
답: 차 실장 팔에 맞았습니다.
문: 총 쏠 때 차 실장과 김 부장이 이야기하는 것 못 들었나요.
답: 노래가 안 맞아 신경을 썼었는데 차 실장에게 욕을 하고 고함을 치는 것 같았습니다.
문: 뭐라고 욕을 하던가요.
답: “버러지 같은 놈”이라고 했습니다.

   
▲ 박정희는 참선하듯 눈을 감고 정좌한 자세로 김재규의 총탄을 가슴에 맞았다. 동석했던 여성들이 놀라서 울부짖자 "난 괜찮아"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사진=박정희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잡지 '박정희정신-미래 100년 박정희에게 길을 묻다' 2017 1~2월 창간호


“나는 괜찮아”

문: 그때 각하는 이야기 안했나요.
답: 못 들었습니다. (중략)
문: 차지철을 쏜 후 각하를 쏘고 나서 그 다음에 어떻게 했나요.
답: 처음에 차 실장에 쏜 소리를 듣고서 기타를 멈추고 각하 얼굴을 보니 정자세를 하시더니 눈을 감으시어서 제가 일어날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그때 부장이 또 총을 쐈는데 각하가 맞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때 불이 나갔습니다.
문: 김재규 피고인이 재차 사격하기 위해서 총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봤나요.
답: 우왕좌왕하는 것은 보았습니다.
문: 그때 불이 나갔나요.
답: 예.
문: 김재규가 다시 들어오는 것 봤나요.
답: 예.
문: 다른 사람에게서 총을 뺐는 것 봤나요.
답: 못 봤습니다.
문: 두 번째로 와서 어떻게 했나요.
답: 차 실장이 문갑으로 막고 있었는데 그때 1발 이상을 쏜 것 같고 그때 차 실장이 넘어지니까 탁자를 돌아서 저희가 부축하고 있는 각하에게로 와서 가까운 거리에서 머리를 쏘았습니다.
문: 증인은 어떻게 각하를 부축했나요. 
답: 제가 기타를 세우고 일어서 있는데 제 자리로 쓰러지면서 “나는 괜찮다”하더니 조금 있다가 신음소리가 나서 괜찮으시냐고 했더니 괜찮다고 하시더니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나서 부축해 앉혔는데 몸에서 피가 나서 그때야 다치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혼수상태였습니다.
문: 그때 신재순은 어디에 있었나요.
답: 저 있는 데로 와서 피를 막았습니다.
문: 김재규 피고인이 두 번째로 각하를 쏘러 올 때 눈이 마주친 일이 있나요.
답: 있습니다.
문: 그때 증인의 심정이 어떠했나요.
답: 무서웠습니다. 
문: 김재규 피고인이 각하를 다시 쏜 후 증인은 어떻게 행동했나요.
답: 머리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고 놀래서 밖으로 뛰어나갔는데 남효주가 부속실로 가라고 해서 그곳에 가 있었습니다.

조갑제 기자는 궁정동 안가 식당에서 벌어진 시해 장면을 취재하여 소개했다. 조갑제 기자의 당시 긴박했던 시해 장면을 소개한다.

정보부장 의전비서관 박흥주 대령은 이기주, 유성옥과 함께 대통령 경호원들을 죽이기 위해서 주방 안으로 집중사격을 가한 뒤 안이 조용해지자 나동(棟) 건물을 오른편으로 돌아서 현관 앞으로 뛰어갔다. 어두운 잔디밭에서 흰 와이셔츠 차림의 김재규가 황급하게 뭔가를 작동시키려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구부린 자세로 양손을 비비는 것 같았다. 불발된 권총의 노리쇠를 앞뒤로 진퇴시키려 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다가간 박흥주 대령은 “박 비서관입니다”라고 하면서 김재규의 두 팔을 잡으려고 했다. 김재규는 박 대령의 손부터 보았는데 총이 없었다. 그는 팔꿈치로 박 대령을 밀고는 다시 현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현관에는 위에 달려 앞뒤로 흔들거리는 쪽문이 붙어 있었다. 박흥주가 그 쪽문 사이로 보니 안쪽 마루에서 양복 상의를 벗은 김계원 실장이 안방에서 나와 후다닥 뛰는 것이었다. 황급히 피하는 모습이었다. 

이때 김재규는 차지철이 권총을 차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간 마음이 급한 게 아니었다. 그는 고장 난 권총을 고치지도 못하고 현관에서 마루로 다시 뛰어 들어가는데 플래시를 든 박선호 의전과장과 마주쳤다. 박 과장은 대기실에서 두 경호관을 사살하고 마루로 나와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김재규는 들고 있던 자신의 권총을 바닥에 던져 버리고는 박선호의 권총을 낚아채더니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 직전 차 실장이 화장실에서 빠져나와 “경호원, 경호원” 하면서 문 쪽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차지철이 흘리는 피가 오른쪽 벽 아래를 따라서 선을 그렸다. 차지철이 문으로 뛰어나가려는 찰나에 권총을 들고 들어오는 김재규와 딱 맞서게 됐다. 김재규가 박선호로부터 받아든 38구경 리볼버 5연발 권총에는 세 발이 남아 있었다. 원래 다섯 발이 장전되어 있었는데 박선호가 두 발을 쏘았던 것이다. 차지철은 안쪽 병풍 옆에 있던 장식용 문갑을 방패처럼 치켜들었다. 

“김 부장, 김 부장….” 

차지철은 애원하고 있었다. 그는 문갑을 앞세우고 김재규를 향해 덤벼들었다. 김재규는 차 실장의 가슴을 향해서 한 발을 발사했다. 탄도검사 결과에 따르면 피격 당시 차지철은 문갑을 들고 자세를 낮추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오른쪽 가슴 상부에서 들어간 총탄은 허파 부위를 지나 왼쪽 등 아래로 진행하다가 몸속에서 멈추었다. 

육군과학수사연구소 법의과장 정상우 소령의 사체검안서에 따르면 이 제2탄이 치명상으로서 혈흉(血胸)에 의한 호흡부전과 심장부전을 일으켜 죽음에 이르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한 20여 분 뒤에 일어난 김태원에 의한 두 발의 총격은 확인사살이 아니라 이미 죽었거나 죽을 사람에 대한 사격이란 뜻이 된다. 차 실장은 잡고 있던 문갑과 함께 뒤로 넘어졌다. 와장창하는 소리와 함께 문갑 속에 있던 물건들이 쏟아졌다. 이때 심수봉이 박정희 곁을 떠나 방 안을 뛰쳐나갔다. 

김재규는 다음 순간에 벌어진 상황을 1979년 11월 8일에 작성한 제2차 자필진술조서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차 실장을 거꾸러뜨리고 앞을 보니 대통령은 여자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있어 식탁을 왼쪽으로 돌아서 대통령이 있는 데로 가자 거기에 앉아 있던 여자가 본인의 얼굴을 쳐다보며 공포에 떠는 눈초리로 보고 있어 총을 대통령 머리에서 약 50센티미터까지 가까이 대고 1발을 발사하여 대통령을 즉사시키고 나온 것이 기억이 되며….” 

제2탄은 박정희의 오른쪽 귀 위로 들어가 뇌수를 관통하고 콧잔등까지 나와서 살 속에서 멈추었다. 이것이 치명상이 되었지만 즉사는 아니고 아직 생명은 붙어 있었다. 끝까지 대통령 곁을 지킨 신재순은 김재규가 방에 들어올 때 발밑으로 푹 파인 아래쪽으로 숨었다가 차지철을 쏘는 총성을 듣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박정희를 안고 있다가 다가오는 김재규와 눈이 마주쳤다. 신재순은 지금도 “그것은 인간의 눈이 아니라 미친 동물의 눈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녀는 김재규가 박정희의 머리에 총을 갖다 대었을 때는 ‘이제는 나도 죽는구나’ 하고 후다닥 일어났다. 실내 화장실을 향해서 뛰는 그녀의 등 뒤에서 총성. 귀가 멍멍하고 잠깐 정신이 나갔다가 깨어 보니 주위가 조용했다. 

방 안은 화약 냄새로 자욱했다. 신 양은 실내 화장실 안에서 문을 잠그고도 손잡이를 꼭 잡고 있었다. 김재규가 박정희의 머리를 향해 쏜 총탄은 이 5연발 리볼버의 네 번째 총탄이었다. 

김재규는 시해 과정에서 김계원과 나눈 대화에 대해 합수부 조사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1979년 11월 8일 2차 자필진술조서). 

본인: 나는 한다면 합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보안 유지를 철저히 하십시오. 
김계원: 뭐라고 하지. 
본인: 각하께서 과로로 졸도했다고 하든지 적당히 하십시오. 
김계원: 알았어.

궁정동 시해 현장에 있었던 가수 심수봉은 당시의 충격으로 인해, 그리고 타의로 무대를 떠나 오랜 기간 방황을 해야 했다. 무대에 올라 노래 한 곡 부르기 어려웠던 시절, 심수봉을 위로해주고 도와준 사람은 ‘박정희의 철강 동지’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이었다.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을 수사했던 이건개는 5년 후 10·26 사건이 발생하자 또 다시 박 대통령 암살 현장을 수사하게 됐다. 대통령 부부의 마지막 현장 수사를 동일한 인물이 맡게 된 것이다. 가수 심수봉 씨로부터 흉탄을 맞고 쓰러진 박정희 대통령이 “난 괜찮아”라고 말했다는 증언을 청취하는 순간, 5년 전 육영수 여사의 저격 장면이 눈앞에서 섬광처럼 스쳐 갔다. 

박 대통령 부부는 마지막 순간까지 국가 원수로서의 위엄을 지키며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던 것이다.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의 증언

김재규의 총에 맞은 박정희 대통령을 병원으로 옮긴 사람은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다. 그는 ‘10·26 사건’과 관련하여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구속 기소되어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82년 5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후 1988년 특별 사면 복권 되었다. 그는 검찰 진술조서에서 박 대통령 시해 이후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40분경 대통령 각하 만찬장소인 서울 종로구 궁정동 소재 중앙정보부 식당에서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내란 목적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전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 및 경호실 요원들을 살해한 후 본인은 각하 시신을 서울지구국군병원으로 모셔 놓고, 청와대 비서실장실로 갔다가 같은 날 21시 30분경 국무총리와 내무 및 법무 장관 등과 함께 육본 벙커로 가서 계엄선포를 논의하던 중 국방장관실로 옮아가 장관 부속실에서 국방장관 노재현과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에게 김재규가 대통령 각하 시해 범인이라고 알려주고 그 다음날 오전 0시 40분경에는 본인이 사건 현장에서 범인으로부터 빼앗은 권총 1점을 증거물로 육군참모총장에게 제출한 사실이 있습니다.”

다음은 김계원 비서실장의 검찰 진술 내용이다.

문(검찰관): 진술인은 청와대에서 육군본부로 왜 가게 되었는가요.
답(김계원): 본인은 위와 같은 조치를 취하고 청와대로 들어가 각하가 돌아가신 사실을 알리기 위해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을 소집하여 놓고 있는데 육군본부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받아보니 김재규가 국무총리 등을 모시고 육본 벙커로 오라고 하므로 그곳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태에 대처하기 위하여는 계엄을 선포하여야 하는데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총장이 청와대로 오지 못한다고 하여 청와대에서 그곳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문: 진술인이 육본 벙커로 가보니 어떠했나요.
답: 본인과 총리 및 내무·법무장관 등이 육본 벙커에 도착하여 벙커 내 육군참모총장실로 들어가보니 장성들이 많이 와 있고 전군에 비상이 걸린 것 같아 보였는데 전부 침울한 표정으로 조용히들 앉아 있었습니다. 
문: 그곳에서 김재규를 보았나요.
답: 예. 본인이 육본 벙커에 도착한 후부터 계속 김재규와 함께 있었습니다.
문: 진술인과 김재규가 있을 때인 육본 벙커 내에서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가 각하 시해 범인이 누구인가, 사고 장소는 어디인가 등에 관하여 질문을 받은 사실은 없나요.
답: 그런 사실이 전혀 없습니다. (중략)
문: 진술인은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총장에게 김재규가 각하 시해 범인이라고 알려주었다는데 사실인가요.
답: 예. 사실입니다. 같은날 오후 11시 30분경 국방부 내 국방장관실에서 국무총리 등을 모시고 계엄문제 등에 관하여 논의하다가(당시 김재규도 함께 있었음) 잠시 김재규의 눈을 피해서 밖으로 나와 장관 보좌관실로 가서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총장을 불러서 “각하를 시해한 범인이 김재규다”라고 알려준 사실이 있습니다.
문: 진술인이 위와 같은 말을 하니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총장은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답: 본인이 위 장소에서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총장에게 “각하를 시해한 범인이 김재규다”라고 말을 하자 국방장관은 깜짝 놀라는 것 같았으나 육군참모총장은 그리 놀라는 눈치는 보이지 않았으며 국방장관이 “그럼 당장 잡아야지요” 하니까 육군참모총장이 “예, 곧 하겠습니다”고 하면서 더 이야기를 하려다가 김재규가 불쑥 들어오므로 본인은 화제를 돌려 계엄군에 관한 특식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면서 그 방을 모두 나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벙커로 내려가고 본인과 국방장관 및 김재규는 다시 장관실로 들어가 계엄에 관하여 논의하였던 것입니다.
문: 진술인은 정 총장이 김재규 체포 지시를 하는 것을 보았나요.
답: 못 보았습니다. 
문: 김재규를 체포한 것은 언제 알았나요.
답: 본인은 위와 같이 국방장관실로 되돌아 와 있었는데 약 30분 정도가 흘러가도 김재규 체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므로 본인은 궁금하고 답답하여 김재규가 잠시 눈을 파는 사이에 동실(同室)을 나와 벙커로 내려와서 육군참모총장에게 김재규 체포 여부에 대하여 재촉하고 있는데 그 다음날인 27일 오전 0시 40분경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총장실로 들어와서 김재규로부터 압수한 것이라고 하면서 권총을 내놓았으며 바로 그 직전에 정 총장이 어딘지 전화를 걸더니 김재규를 잡았다고 이야기하여서 본인은 김재규가 체포된 것을 알았습니다.

김재규를 변호했던 한 변호인 이야기

1973년 봄에 충청도 시골에 사는 한 처녀가 육영수 여사 앞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사연인즉 시골마을 산사(山寺)로 올라가는 길목에 조그만 가게를 차려놓고 장사를 하던 시골처녀가 절에서 고시공부를 하면서 생활용품을 사러 가게를 자주 찾은 서울 총각과 서로 좋아하게 되어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청년이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에는 태도를 돌변하여 “위자료를 줄 테니 관계를 청산하자”고 한다는 요지였다.

육 여사는 이 편지를 박정희에게 전달했다. 박정희는 법무부장관에게 조사를 시켰는데, 조사 결과 이 여성의 편지 내용 그대로였다. 박정희는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고 정의와 진실을 수호해야 할 법관으로는 자질 면에서 곤란하지 않겠는가”라는 의견과 함께 신직수 법무장관에게 처리를 맡겼다. 

이 사람은 법관에 임용되지 못하고 변호사로 개업했는데, 10·26 사건 뒤 수십 명의 변호사들이 김재규 변호를 자원했을 때 초기 변호인 명단에 이 사람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는 박정희의 고향 후배로서 박정희는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현 구미시 상모동), 김재규는 선산군 선산면 이문리(현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가 출생지다.


박정희에게 은퇴를 권유한 구상 詩人

시인 구상은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나사렛 예수』를 집필하던 중 친구 박정희가 서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한 달 전인 1979년 9월, 구상은 정치적 저항이 격화되고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고는 친구 박정희가 걱정되어 청와대를 찾았다. 그날 구상은 비장한 목소리로 친구에게 어려운 부탁을 했다.

“이제 임자가 물러날 때가 된 것 같소.”

구상은 30년 지기에게 은퇴를 권했고, 박정희는 침묵을 지켰다. 현관까지 배웅하던 박정희의 모습이 쓸쓸했다. 친구의 죽음 소식을 들은 구상은 집필을 중단하고 박정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진혼시(鎭魂詩)를 써 내려갔다. 

‘국민으로서는 열여덟 해난 받든 지도자요 
개인으로는 서른 해나 된 오랜 친구 
하느님! 하찮은 저의 축원이오나 
인류의 속죄양 예수의 이름으로 비오니 
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고이 쉬게 하소서 
이 세상에서 그가 지니고 떨쳤던 
그 장한 의기와 행동력과 질박한 인간성과 
이 나라 이 겨레에 그가 남긴 바 
그 크고 많은 공덕의 자취를 헤아리시고 
하느님, 그지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 
설령 그가 당신 뜻에 어긋난 잘못이 있었거나 
그 스스로가 깨닫지 못한 허물이 있었더라도
그가 앞장 서 흘린 땀과 
그가 마침내 흘린 피를 굽어 보사 
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길이 살게 하소서’

진혼시를 써내려가는 구상의 귓전에 오랜 친구 박정희의 이런 목소리가 생생하게 울렸다.

“내가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무얼 하려는지 사람들이 몰라도 좋소. 내가 죽은 뒤에는 무엇을 하다 갔는지 알겠지.” 

박정희 집무실에서 발견된 8·18 도끼만행 당시의 미루나무

1979년 11월 중순,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후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은 대통령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갔다. 주인 없는 집무실에는 날마다 한 장씩 뜯어내는 일력(日曆)이 10월 26일에 멈춰져 있었다. 비서관들은 육영수 여사의 사진이 붙어 있는 대통령 집무용 책상과 각종 유품을 챙겨 유가족에게 인도했다. 

유가족들은 대통령 재임 기간에 외국 국가원수들에게서 받은 선물 등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없는 유품들을 따로 정리하여 6톤 트럭 1대 분의 유품을 반납했다. 그 유품들은 국립박물관으로 갔는데, 반납된 유품 중에는 특이한 물건이 하나 있었다. 바로 판문점에서 베어온 미루나무였다. 박정희는 문제의 미루나무를 청와대 집무실에 가져다놓고 오래도록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1976년 8월 18일, 박정희는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겼다. 

‘이들의 이 만행을 미친개한테 물린 것으로 참고만 있어야 할 것인가. 언제까지 참야야 할 것인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격인 이들의 이 만행을 언젠가는 고쳐주기 위한 철퇴가 내려져야 할 것이다. 

저 미련하고 무지막지한 폭력배들아.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지어다. 미친개 한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 /김용삼 '박정희정신' 편집장,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기획실장

(이 글은 박정희 대통령 서거 37주기 및 탄생 100돌을 맞아 박정희기념재단이 2017년 창간한 '박정희정신'에 게재된 글입니다. '박정희정신-미래 100년 박정희에게 길을 묻다'라는 주제하에 김용삼 박정희기념재단 기획실장이 쓴 '영웅의 최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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