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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
10월 유신의 국제정치학적 해석 (상)
- 닉슨 독트린과 미-중 접근이라는 국제정치의 대변혁이 야기되는 바람에 남북대화, 유신체제가 생성되었다. 당시의 국제정치 상황, 안보 상황이 없었더라도 유신체제라는 발상이 나올 수 있었을까?
- 중국을 소련으로부터 떼어 내기 위해 미국은 동안 지원했던 월남을 팽개치고 민족주의적 성향이 보다 강한 월맹이 월남을 무력 흡수 통일하도록 방치
- 10월 유신을 격하게 비판했던 필립 하비브도 프레이저 상원의원의 질문에 대해 "한국의 '위협에 대한 인식'은 정당하다"고 답변
- "역사가들이 균형을 잡았을 때, 그들은 박정희를 현대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지도자로 추대하리라고 생각한다."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
1. 서론
연구의 목적
박정희 시대 18년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집중적인 공격 표적이 되는 시기는 1972년 10월 17일부터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당했던 날 까지 지속된 소위 유신체제라는 시기다. 특단의 방식으로 헌정(憲政)을 중단시키고, 집권 기간을 사실상 종신제로 만들어 놓았던 유신체제는 7년 만에 종식되었다.
이 시대를 ‘오로지 한사람, 즉 박정희만을 위한 시대’ 라고 묘사하는 분석가도 있을 정도로 이 시대에 대한 평가는 압도적으로 부정적(否定的)이다. 유신 시대를 묘사하기 위해 한국의 지식인들은 물론 보통사람들조차 가장 널리 사용하는 단어는 “암울(暗鬱)한” 이라는 형용사다. 문자 그대로 캄캄하고 답답한 시대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 및 친족을 정치에서 철저하게 배재한 것으로 유명한 박정희가 예외적으로 중용하고 자문을 받았다는 육인수는 1994년 일본인 기자이자 박정희 연구가인 하야시 다케히코(林建彦)에게 “박정희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앞으로 50년은 더 있어야 할 것” 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육인수의 말대로라면 오늘의 시점도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엔 아직도 수 십 년이 더 지나야 할 시기상조의 시점이 아닐 수 없다.
박정희와 동시대를 산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생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특히 박정희의 큰 딸인 박근혜가 현직 대통령으로 집무중인 현 시점에서, 더구나 박정희로부터 이익 혹은 피해를 당한 인물들이 아직도 다수 생존중인 상황에서, 박정희를 ‘역사적 인물’로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는 너무도 이른 일 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시대가 종식된 지 40년이 다 되가는 오늘, 박정희에 대한 보다 객관적, 체계적 연구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 되었고, 특히 박정희에 대한 기억을 수집 보존해야 할 작업을 게을리 할 수 없는 시점이 되었다. 생생한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을 때 역사를 정리해 두는 것은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역사의 연구는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교훈을 얻기 위해서 하는 지적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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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가 통치했던 대한민국은 상대적인 약소국으로서 국가의 생존 그 자체가 국제체제의 제반 상황 변동에 그때그때 ‘적응’(adapt) 함으로써만 가능한 나라였다. |
박정희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박정희가 이념적으로 경도된 세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비하 및 매도되는 심각한 왜곡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 인물이, 특히 일반 시민들에 의해서는 오히려 공(功)이 많은 인물로 치부되는 박정희가 역사를 해석하고 기술하여 후대에 남기는 사명을 가진 지식인들에 의해서 거의 일방적으로 그것도 이념적, 의도적으로 매도당하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근자에 이르러 박정희의 공적을 인정하는 탁월한 연구 성과물들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유신과 유신시대에 대한 객관적 분석은 시기상조라는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다. 유신시대에 관한 연구는 객관적으로는 물론 우호적인 관점에서 조망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분위기가 무겁게 지배하는 시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신이라는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대형 정치 사건을 연구하기 위한 접근 방법과 해석은 다양해야 한다. 기왕의 연구들은 주로 ‘박정희라는 특정 개인’ 에 초점이 맞추어졌고 유신이라는 사건을 개인의 ‘사적(私的)인 권력추구’ 라는 측면에서 재단해 왔다. 이들에 의하면 10월 유신은 ‘독재적인 인간 박정희가 자신의 권력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단행 한 한국현대사에 오욕을 남긴 사건’ 일 뿐이다. 모든 국민이 힘들었고 오로지 박정희 일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유신 시대가 존재 했던 것이다.
이처럼 유신체제에 대한 기왕의 연구들은 주로 한 가지 방법론, 즉 박정희라는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방법에 과도하게 편중 되었고, 이념적으로도 편파적이었다.
사회과학적 사건을 분석하기 위한 일반적인 연구 방법은 사건의 주요 당사자인 개인 그 자신에 관한 연구와 더불어 그 개인이 처한 ‘상황’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웅은 시대를 만든다(英雄造時)는 말과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時造英雄)는 말이 함께 존재한다.
박정희가 유신의 핵심적인 인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적당한 조건과 상황이 없었을 경우에도 박정희가 유신조치와 같은 정치적 사건을 기획하고 수행에 나갔을 지의 문제도 함께 다루어 보자. 박정희의 공과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박정희가 당면해 있었던 국내정치 상황은 물론 국제정치 상황, 북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박정희가 통치했던 대한민국은 상대적인 약소국으로서 국가의 생존 그 자체가 국제체제의 제반 상황 변동에 그때그때 ‘적응’(adapt) 함으로써만 가능한 나라였다. 박정희 이후 7명의 대통령이 나라를 통치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한국과는 국력이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성장한 현재 박정희 이후 8번째 대통령이자 그의 장녀인 박근혜 대통령이 통치하는 이 나라도 아직은 국제체제를 이끌어 가기보다는 ‘적응’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박정희 집권 기간은 대한민국이 건국 이후 당면했던 어떤 시대보다 더욱 충격적인 국제정치의 변동이 부단하게 발생했던 시점이었다. 심지어 박정희는 자신을 죽이겠다고 온 북한의 게릴라들이 한국군과 전투를 벌이는 총성 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청와대에서 근무해야 했던 대통령이었다.
1968년 1월 21일 남파된 31명의 북한 특공대원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김신조는 체포 된 후 ‘청와대를 기습하여 박정희를 비롯한 요인들을 암살’ 하러 왔다고 당당히 말했다. 더 구체적으로는 박정희의 목을 따러 왔다고 말했다. 유신체제는 이처럼 대통령의 목숨 그 자체가 실질적으로 위협 당했던 준전시(準戰時) 상태의 정치 상황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박정희가 구상했던 정치 체제의 구체적 표현이었다.
본 연구는 당시의 국제정치 상황, 안보 상황이 없었더라도 유신체제라는 발상이 나올 수 있었을까? 라는 문제를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보다 구체적으로 1968년 1월 21일 북한 게릴라의 청와대 습격 사건과 48시간 후 야기된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 호 납치사건, 그 다음해인 1969년 4월 15일 EC 121 미국 정찰기 피격사건, 1969년의 7월 닉슨 독트린, 이에 뒤이은 주한미군 7사단의 철수, 월남을 포기하려는 미국의 태도, 미국과 중국의 접근, 남·북한 간의 접촉과 7·4 남북공동선언 등, 당시 ‘패러다임’ 을 뒤흔들 정도의 국제정치적 사건들이 없었어도 1972년 10월의 비상사태 선포 및 유신체제 성립이 가능 했을까? 라는 의문에서 본 연구를 시작하려는 것이다.
사회과학도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인과관계를 연구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테일러(A J P Taylor)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저서에서 히틀러를 당시 상황에 반응했던 일반적인 정치가로 분석했다가, 수많은 학자들의 비난 대상이 된바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출현은 1차 대전 이후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처절한 보복정책,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기력, 버터 한 조각이 수억 마르크에 이르는 기가 막힌 인플레이션 상황 등이 배경이 되었다. 적어도 히틀러는 합법적인 선거 과정을 통해 정권을 획득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테일러는 특정 개인들이 아닌 당시의 국제정치 및 독일의 정치·경제적 환경에 초점을 맞추어 2차 대전의 원인을 분석 했던 것이다.
테일러 교수의 접근 방법을 사용해서 분석할 경우 박정희와 10월 유신은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 있는 당연한 상식적 모습과는 판이한 모습으로 보여 질지 모른다. 본격적인 연구는 아니지만 이미 한국 학자들도 유신체제의 국제정치적 원인에 대해 간간히 언급한 바 있었다. 예로서 고(故) 이기택 교수는 “닉슨 독트린과 키신저의 아시아 구상은 한반도에 있어서 본질적인 변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하나는 남·북한 관계의 정치협상 개시였으며, 둘째로는 대내정치의 변화로서 유신체제의 성립이었다.”고 분석한 바 있었던 것이다.
닉슨 독트린과 미·중 접근이라는 국제정치의 대변혁이 야기되는 바람에 남북대화, 유신체제가 생성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필자 역시 이 같은 시각에 동감하고 있으며 본 연구는 이기택 교수의 이상과 같은 분석을 보다 체계적으로, 학술적으로 규명해 보려는 학술적 시도를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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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단의 방식으로 헌정(憲政)을 중단시키고, 집권 기간을 사실상 종신제로 만들어 놓았던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7년 만에 종식되었다./사진=박정희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잡지 '박정희정신-미래 100년 박정희에게 길을 묻다' 2017 1~2월 창간호 |
연구의 방법
▶분석 수준(Level of Analysis)
기왕의 10월 유신 관련 연구는 박정희 1개인의 성향에 초점을 맞춘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본 연구는 이제껏 별로 시도 되지 않았던 연구 목표를 가지기 때문에 이 시도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방법론이 필요할 것이다. 우선 사회과학적인 현상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행위의 주체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행위 주체는 인간 및 인간들로 이루어진 제도 혹은 조직이다. 즉 개인, 회사, 사회 혹은 국가 등이 행위의 주체로 분석되어 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행위자들은 진공 상태에서 자의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행동을 하도록 한 특이한 환경이 존재했을 것이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처럼 1930년대 독일의 나치 독재 정당, 2차 세계대전, 유대인 학살 등 인류사의 대사건들을 ‘광인(狂人) 히틀러’라는 하나의 변수만 가지고 충분히 설명될 수 없는 일이다. 다른 학문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1960년대 주로 미국의 국제정치학자들은 국제정치 분석 방법에 대해 치열한 방법론적인 논쟁을 전개한 적이 있었다. 케네스 왈츠(Kenneth N. Waltz)는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을 보완해서 출간한 『인간, 국가 전쟁』이라는 저서에서 국제정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개인, 국가, 국제체제를 모두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왈츠의 저서는 국제정치학 연구 방법론에 관한 논쟁을 야기했고, 국제정치학의 과학적 연구 운동을 주도했던 데이비드 싱거(.David Singer) 교수는 「국제정치학에서 분석 수준의 문제점」이라는 유명한 논문을 발표, 각 방법론의 장점과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데이비드 싱거 교수는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국제정치적 사건들을 기술하고, 설명하고 예측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예측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학문의 연구는 적어도 발생한 현상을 잘 묘사하고 이를 잘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데이비드 싱거 교수는 국제정치의 사건을 묘사하고 설명하기 위해 연구자들은 국가와 국제정치라는 두 수준으로 나누어 분석할 수 있는데 각 수준은 마치 숲을 볼 것이냐 나무를 볼 것이냐의 문제와 같다고 했다. 국가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 세밀한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큰 그림은 놓칠 수 있다. 국제체제에 초점을 맞추는 분석은 큰 그림은 잘 보지만 세부적인 내용을 놓칠 수 있다. 데이비드 싱거 교수는 연구자들이 어떤 수준의 분석을 택하느냐는 각자의 선호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은 ‘국제체제’ 에 초점을 맞춘 분석을 선호한다고 했다.
그의 논문 제목에 ‘문제점’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는 이유가 있다. 그는 두 수준의 분석은 철학적, 논리적으로 합쳐질 수 없는 것인데 학자들이 무의식중에 다른 차원의 분석을 혼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국가들 간의 힘의 불균형상태, 즉 환경 요인을 전쟁의 원인으로 분석 한 후, 어떤 특정독재자 때문에 어떤 특정 전쟁이 발발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박정희의 유신 체제를 설명하기 위해 박정희와 당시 대한민국이 당면했던 ‘국제정치 상황’에 초점을 맞추는 분석을 시도한다. 과연 당시 대한민국이 당면했던 국제정치적 환경, 특히 안보 환경이 없었다 해도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성립 시켰을 것인가?
유신 체제를 박정희라는 독재적 인간의 권력욕 추구 결과라고 보는 연구들은 이 같은 질문을 부질없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연구를 상당부분 진행 한 후, 본 서문을 쓰는 필자는 1960년대 후반과 1972년 10월 이전까지의 존재했던 것과 같은 국제정치 환경이 없었다면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고, 시도했다고 해도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즉 박정희의 10월 유신 체제를 촉발 시킬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소들이 당시 한국이 당면한 국제체제 속에 내재 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 한국사회가 처한 국내정치 상황도 유신체제의 성립을 촉발 혹은 정당화 시킨 ‘구조적 조건’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박정희의 유신 체제를 보다 포괄적,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당시 한반도 주변 국제 정세는 물론 북한상황 및 한국의 국내 정치적 여건에 관한 분석도 추가해야 할 것이다. 본 논문은 일단 연구의 범위를 주로 국제체제의 측면에 한정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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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의 7월 닉슨 독트린, 뒤이은 주한미군 7사단의 철수, 월남을 포기하려는 미국의 태도, 미국과 중국의 접근, 남·북한 간의 접촉과 7·4 남북공동선언 등 당시 국제정치적 사건들을 함께 보아야 한다./사진=박정희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잡지 '박정희정신-미래 100년 박정희에게 길을 묻다' 2017 1~2월 창간호 |
▶자료의 문제
유신이라는 한국 현대 정치사의 중요한 정치적 사건 혹은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필요한 문건들이 많겠지만 박정희는 암살당함으로써 생을 급격히 마감하는 바람에 회고록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자신이 통치하던 기간 동안 비교적 꼼꼼히 기록을 남겼으며 박정희를 보좌했던 동시대의 인물들이 남긴 회고록과 분석 자료들도 적지 않다. 박정희가 유신 이전 권력을 장악한 1961년 5월 15일 군사 쿠데타 이래, 10월 유신을 단행하던 1972년 10월 까지 한국이 처한 국제정치 상황을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알아내기 위해 박정희를 보좌했던 인물들의 회고록 및 여타 기록들을 참고할 것이다.
10월 유신을 국제정치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역시 미국 측의 자료가 결정적으로 중요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10월 유신 시대를 설명 할 수 있는 미국 측 비밀문서들이 공개되어 있고 10월 유신과 관련된 미국 주요 정책 결정자들인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 장관의 회고록들이 다수 출간 되어 있는 상태다. 이 같은 자료들을 섭렵함으로써 당시 한국의 국제정치 체제 및 상황을 규정할 수밖에 없었던 미국의 대 한반도 및 아시아 정책과 박정희의 10월 유신에 대한 미국 측의 인식 등을 구명할 수 있으리라 판단된다.
북한 문제 역시 당시 박정희의 10월 유신을 서명할 수 있는 외부 요인이 아닐 수 없었다. 닉슨 독트린으로 인한 미국의 월남포기, 미국과 중국(당시 중공)의 접근, 주한미군 철군 계획의 현실화 등 박정희가 미국과 국제사회로부터 처한 상황을 북한이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은 노골적으로 박정희를 암살하기 위한 특공대를 보낸 이후 한반도에서 지속적인 대남(對南)은 물론 대미(對美) 도발 정책을 지속했다. 미국 정찰기 격추사건, 미국 첩보함 푸에블로 호 납치사건을 단행, 베트남 패망의 상황을 한반도에도 구현 시키고자 노력했다. 이처럼 박정희가 처한 상황은 외환(外患)의 연속이었다.
이 같은 외환적 상황 아래 박정희는 북한과의 직접 담판을 시도했고 그것은 7·4 공동성명으로 나타났다. 그는 북한과의 대화를 10월 유신 단행의 근거로 제시하는데 전체주의 1인 독재 체제와 상대하는데 민주정치 제도는 효율적인 것이 못 된다는 그의 평소 생각이 유신체제에 반영된 것이다.
북한 관련 자료는 아직 대부분이 비밀이지만 당시 박정희를 보좌, 대북 관계를 담당했던 관리들의 글이 상당 부분 출간 된 상황이다.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10월 유신은 북한의 반응에 대한 박정희의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분석 할 수 있을 정도의 자료는 축적 돼 있다고 보인다.
2. 10월 유신의 국제정치적 원인
국제정치 상황의 변화
10월 유신이라는 정변이 진솔한 마음에서 나온 우국충정 때문인지 혹은 개인의 권력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였는지를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10월 유신을 단행 한 이유가 국내정치적인 이유보다는 압도적으로 국제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을 단행하며 발표한 선언문은 그 같은 비정상적 조치를 취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격변하는 국제정치’ 때문이라고 강변한다.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결단한 이유를 ‘조국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번영을 희구하는 국민 모두의 절실한 염원을 받들어 우리 민족사의 진운을 영예롭게 개척해 나가기 위한’ 것이라고 전제한 후 ‘지금 우리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막대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비록 당시 주한 미국 대사 하비브(Philip Habib)는 박정희의 유신선포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박 대통령이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자신의 국내입지를 강화해야 한다고 믿고 있을지 모르지만 객관적으로 현재의 상황을 판단할 때 이러한 조치가 불필요하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미국 정부에 보고했다.
또한 하비브의 전문은 박정희가 극단적 조치를 강행하는 진정한 목적은 야당을 무력화하고 통치권을 강화해 적어도 앞으로 12년간 장기 집권하겠다는 의사의 표명, 이것을 막지 못하면 남한에는 명실상부한 독재정부가 출현하게 될 것 이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하비브는 박정희의 유신 선언을 주로 박정희의 개인적인 권력욕에 맞추어 평가하고 있지만 당시 국제정치 상황과 이에 대응하는 미국 외교정책의 급변은 미국 사람들도 모두 가히 ‘혁명적 변화’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 미국 외교정책의 변화는 박정희로 하여금 “북한의 도발에 대한 남한을 비호하려는 미국의 의지가 약해지고 있는 상황”으로 인식하게 했던 것이 사실이다.
오버도퍼 기자는 박정희를 경제정책과 관련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기는 했지만 ‘개인적인 치부는 하지 않았고 부정부패와도 거리가 멀었다’고 평가함으로써 10월 유신을 박정희의 개인적인 권력욕보다 박정희가 감지했던 안보 환경의 변화에 보다 큰 원인이 있던 것으로 보고 있다.
1960년대 중반 북한이 소련과 중국으로부터의 자주성을 주장하면서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던 것은 불문가지의 진실이며 이 같은 와중에 미국이 월남전에서 발을 떼기 시작하며 동시에 동아시아의 다른 곳에 대해서도 군사력을 감축하기 시작했다. 미국 외교정책의 급변은 그 동안 한국이 국가안보를 위해 전적으로 의존해 왔던 미국이 과연 한국을 과거처럼 지켜줄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박정희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의 한국에 대한 방위공약 준수여부’를 의문시 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기도 했다. 박정희가 유신 선언문에서 “지금, 우리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기존 세력 균형 관계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는 이 변화가 우리의 안전 보장에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위험스러운 영향을 미치게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같은 변화는 곧 아시아의 기존 질서를 뒤바꾸는 것이며, 지금까지 이곳의 평화를 유지해 온 안보 체제마저도 변질시키려는 커다란 위협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미국이 과연 앞으로도 한국을 과거처럼 지켜줄 것인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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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가 예외적으로 중용하고 자문을 받았다는 육인수는 1994년 일본인 기자이자 박정희 연구가인 하야시 다케히코(林建彦)에게 “박정희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앞으로 50년은 더 있어야 할 것” 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육인수의 말대로라면 오늘의 시점도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엔 아직도 수 십 년이 더 지나야 할 시기상조의 시점이 아닐 수 없다./사진=박정희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잡지 '박정희정신-미래 100년 박정희에게 길을 묻다' 2017 1~2월 창간호 |
박정희는 당시 전 지구적(global)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던 데탕트(긴장완화) 분위기와 닉슨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 키신저 박사가 주도하는 국제 권력 정치(power politics)의 진면목에 대해서도 냉혹하고 정확한 이해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제정치학자들이 말하는 세력균형 이론은 강대국들을 결코 소멸되지 않아야 할 대상으로 보지만 약소국들은 강대국들의 힘의 균형을 위해, 국제정치의 험악한 판 위에서 때로는 소멸되기도 하고 때로는 분열되기도 하며 때로는 강대국들의 싸움터가 되기도 한다고 본다.
박정희는 1960년대 말엽 이후 전개되는 국제정치 상황을 강대국 세력균형 정치의 귀환으로 보았다. 그는 유신 선언문에서 “긴장 완화의 본질은 아직까지도 열강들의 또 하나의 새로운 문제 해결 방식에 지나지 않으며, 이 지역에서는 불행하게도 긴장 완화가 아직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는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긴장 완화라는 이름 밑에 이른 바 열강들이 제3국이나 중소 국가들을 희생의 제물로 삼는 일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 지역에서 다시는 전쟁이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우리의 솔직한 현황인 것입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국제정치의 파도 속에 흔들리는 약소국인 대한민국의 처지를 절절하게 묘사했다.
당시 박정희의 이상과 같은 상황에 대한 처방은 “국제 정세가 이러할진대, 작금의 변화는 확실히 역사상 그 어느 때 보다도 뚜렷하게 우리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고 개척해 나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엄숙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였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라는 언급은 민족주의적인 언급인 동시에 국력을 ‘총체적인 하나’로 만들겠다는 언급이었다.
남북대화
10월 유신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변수가 국제정세의 급변, 미국 외교정책의 급변이라면 또 다른 변수는 1972년 본격적으로 시작한 남북 대화라는 변수였다. 박정희는 국제정세의 급변에 대처하는 수단으로 남북 대화를 개최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전화의 재발을 미연에 방지하고 평화로운 조국 통일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우리는 27년간의 기나긴 불신과 단절의 장벽을 헤치고 이제 하나의 민족으로서 남·북간의 대화를 시작한 것입니다”, “금년 5월 2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나의 뜻에 따라서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의 최고 당국자들과 만나 조국의 평화통일 방안을 포함한 남·북간의 현안 문제들에 관하여 서로 의견을 교환한 뒤, 지난 7월 4일에는 역사적인 남·북 공동성명이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되었습니다.”
박정희가 유신체제 성립의 근거로 제시한 남북 대화는 북한이라는 이질적인 체제와 대화를 진행하기 위해서 대한민국이 하나의 ‘일사불란한 체제로 일치단결해야 한다는 논리’로 귀결 되었다. 적대적인 상대와 대화하는 경우, 특히 그 상대방이 1인 절대 권력을 보유한 전체주의 권력일 경우 자신도 체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논리는 비교적 자연스럽게 성립될 수 있다.
박정희는 “이 민족의 과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비록 이념과 체제가 다르다 하더라도 우리는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대화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신입니다” “그러나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의 주변에서는 아직도 무질서와 비능률이 활개를 치고 있으며, 정계는 파쟁과 정략의 갈등에서 좀처럼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같은 민족적 대과업마저도 하나의 정략적인 시비 거리로 삼으려는 경향마저 없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김일성 절대 권력과 대화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한국 역시 일사분란의 철통같은 단결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국제 정세의 거센 도전을 이겨내면서, 또한 남북 대화를 더욱 적극적으로 과감하게 추진해 나가야 할 중대한 시점에 처해 있습니다. 이 같은 시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줄기찬 예지와 불퇴전의 용기, 그리고 철통같은 단결이며, 이를 활력소로 삼아 어렵고도 귀중한 남·북 대화를 더욱 굳게 뒷받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급변하는 주변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나갈 수 있는 모든 체제의 시급한 정비라고 믿습니다.”
박정희는 “우리 헌법과 각종 법령, 그리고 현 체제는 동·서 양극 체제하의 냉전 시대에 만들어졌고, 하물며 남·북의 대화 같은 것은 전연 예상치도 못했던 시기에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국면에 처해서는 마땅히 이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로의 일대 유신적 개혁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며 유신을 단행한 목적을 밝힌다. 박정희가 유신을 정당화시키며 제시한 두 가지 요소는 국제체제의 급변과 남북 대화인데 두 가지는 모두 국제정치적인 환경 요소들이 아닐 수 없었다.
박정희는 이처럼 10월 유신을 통해 자신의 독재 권력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모두’ 외적인 상황 변수들에서 찾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가 인식했던 국제안보 환경 변화는 대한민국 국민들과 국제사회, 특히 미국 그리고 북한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일까?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단행하기 2~3년 전인 1968년 이래 한반도와 국제정치 상황을 살펴봄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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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시대 18년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집중적인 공격 표적이 되는 시기는 1972년 10월 17일부터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당했던 날 까지 지속된 소위 유신체제라는 시기다./사진=박정희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잡지 '박정희정신-미래 100년 박정희에게 길을 묻다' 2017 1~2월 창간호 |
3. 박정희 정권의 안보환경: 북한
박정희가 권력을 장악한 1961년 이후 초기 6년(1961~1967) 동안 국제정치는 서서히, 그러나 본질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사건 이후 인류 전멸의 핵전쟁 위협에서 간신히 벗어난 미국과 소련 두 나라는 소위 데탕트(detente, 긴장완화)라는 화해의 시대를 열기 시작한 것이다.
미·소 강대국의 세계 정치 차원에서는 데탕트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지역적인 차원에서도 데탕트가 진행 된 것은 아니었다. 예로서 월남에서는 국제공산주의 세력의 지원을 받는 게릴라가 오히려 더욱 준동, 월남 사회를 점차 혼돈에 빠뜨리고 있었다. 미국은 월남의 공산화는 동남아 전체의 공산화를 의미한다는 도미노 이론에 의거 월남전에 서서히 개입하기 시작했다.
쿠바 미사일 사건 당시 소련이 미국에게 굴복했다고 생각하고 소련도 믿을 것이 못된다고 생각한 북한의 김일성은 소위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을 확보한다는 목표 아래 ‘4대 군사로선’이라는 것을 채택, 대대적인 군사력 확충에 나서기 시작했다.
1968년 월남 전쟁은 점차 더 수렁과 같은 상황으로 빠져 들어갔다. 월남에 다수의 병력을 파병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미국이 주한미군을 빼서 월남전에 참전시킬 것을 두려워한 박정희는 한국군의 월남전 파병을 먼저 제의해야 할 정도였다. 국내의 거센 반대가 있었지만 박정희는 1964년 9월 11일 1차 파병을 시작으로, 1966년 4월까지 4차에 걸쳐 약 5만 명의 한국군을 베트남에 파견했다. 그러나 1968년 선거에서 베트남 전쟁을 명예롭게 종식 시키겠다는, 사실은 월남을 포기 하겠다는 닉슨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베트남의 미래는 공산 게릴라들의 승리로 귀결될 것이 확실해 보였다.
이 같은 상황 진전에 고무된 북한은 1967년 이래 도발을 급격히 증대했고 1968년이 시작되자마자 서울을 직접 공격표적으로 삼기조차 했던 것이다. 1966년 북한의 대남도발은 35건이었는데 1967년에는 131건으로 늘어났고, 1968년 1월 21일 북한 특공대 청와대 인근 1㎞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1·21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8년 1월 21일 북한 특공대인 124군부대 요원 31명이 대한민국의 청와대를 기습, 대한민국의 대통령 박정희를 제거한다는 침투 작전을 단행했다.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김신조는 “박정희의 모가지를 따러 왔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31명의 북한 특공대는 청와대 습격과 요인 암살을 위해, 대한민국 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7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은 후 야음을 이용하여 대한민국 수도권에 잠입했다. 이들은 청운동 세검정 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게 되자 수류탄 및 기관단총을 쏘면서 저항했다.
이들은 한국 언론에 의해 무장공비(武裝共匪)로 지칭되었으며 대한민국 군·경은 1월 31일까지 서울특별시 청와대 인근 및 경기도 지역에서 이들을 소탕하기 위한 대규모 작전을 전개했다.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은 적의 총탄에 맞아 사망했고, 124부대 소속 31명 중 29명이 사살되고 김신조는 투항했으며, 한 명은 도주하여 북으로 넘어갔다.
도주한 무장공비는 차후 조선인민군 대장으로 진급한 박재경이며, 총정치국 부총국장을 역임했다. 이 사건 이후 박정희는 ‘국가안보 최우선주의’를 선언, 예비군과 육군3사관학교를 창설했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도 교련 교육이 실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일성은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으로,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전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과의 오찬 자리에서 1·21 청와대 기습 사건에 대해 자신은 아는 바가 없었다고 말했으나, 1·21 사태 당시 남파공작원이었던 김신조는 이를 북한의 상투적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1·21 사태는 북한이 남한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하기 위한 노골적인 시도였다. 국제관계에서 적국의 지도자를 암살하기 위해 은밀한 스파이 작전을 전개하는 경우는 있을지 몰라도 특공대를 파견한다는 것은 역사상 그 사례가 없는 일이다.
박정희는 1·21 사태를 기화로 김일성과는 국가 차원은 물론 개인적 차원에서도 원수의 관계가 되었을 것이다. 자신을 공개적으로 살해하려한 인물을 용서할 수 있는 정치지도자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청와대는 자신을 살해하겠다고 침투한 공산군과 한국군이 교전을 벌이는 총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장소였다는 사실은 이후 박정희의 대북관, 국가안보관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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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 특별기획전' 전시 모습.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개발을 하기 전까지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사진=미디어펜 |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1·21 사태가 발생, 서울 및 경기도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진지 이틀째 되는 날인 1월 23일 낮 12시경 동해에서 미국의 정보 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의해 납치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푸에블로 호는 당시 공해상에서 작전 중이었지만 북한은 초계정, 전투기를 동원 의도적으로 미국 선박을 납치했다. 이 사건은 한반도의 안보 상황을 6·25 이후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갔지만 박정희에게는 특히 울분을 참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가 서울에 출현했던 날 분노한 박정희는 포터 주한 미국 대사를 불러 “한국군을 이틀 안에 평양에 침투 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포터 대사는 “대통령께서 그렇게 할 의사가 있으시면 단독으로 하십시오” 라고 대꾸했다. 미국은 이 사건으로 북한과 전쟁을 할 처지는 아니었다. 박정희는 이러한 미국의 미온적 태도에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화가 났지만 미국의 동의 없이 북한을 공격 할 수는 없었던 노릇이었다.
그러나 1·21 사태에 대해서는 미온적이던 미국은 푸에블로호가 납치당하자 즉각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출동하고 동아시아 주둔 미군에 경계태세를 발동했으며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을 비난하는 등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결국 월남전에 발이 묶인 미국은 군사작전을 단행하지는 않았지만 납치된 승무원을 구하기 위해 온갖 초지를 취했다. 주한미군 사령관은 미군과 한국군에게 데프콘 2(DEFCON 2)를 발동, 비상태세에 돌입하도록 했다
박 대통령은 미국이 청와대 습격 사건 같은 중요한 도발에는 미온적인 반면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해 흥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목숨을 빼앗으러 온 무장공비 공격과 푸에블로호 납치에 대응하는 미국의 태도는 너무나 달랐다. 군사적 수단이 여의치 않은 미국은 소련 등 북한 종주국과 중립국 등을 통한 외교적 해결을 시도하고 있었다.
북한은 푸에블로호 사건을 해결하는 방편으로 판문점을 통해 협상할 수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미국은 이를 받아들이고자 했다. 무장공비 습격사건과 푸에블로호를 함께 다루어 달라는 한국 측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국은 한국을 제외한 채 북한과 비밀 테이블에 앉았던 것이다.
‘한국을 빼 놓은 채 한반도의 허리에서 마주 앉은 미국과 북한의 비밀 접촉은 한국 조야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것은 곧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바뀌었다.’
월남전에 5만 명 이상의 대한민국 국군을 파견해서 미국의 입장을 지지해 준 박정희는 미국이 한국의 위기에도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은 박정희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았고 박정희는 분노했다. 결국 존슨 대통령은 포터 대사의 건의에 따라 박 대통령의 불만을 풀어주기 위해 미국 대통령 특사로 사이러스 반스(Cyrus Vance)를 파견, 미국은 대한(對韓) 방위공약을 재천명하고 의회에 계류 중인 1억 달러의 추가 군사원조 법안을 적극 추진할 것을 약속했다.
미국은 외교 및 비밀 교섭을 통해 1968년 12월 22일, 납치 11개월 만에, 1명의 사망자 시신과 생존 푸에블로호 승무원 82명 전원을 북한으로부터 돌려받았다. 미국은 북한이 요구한 사과를 함으로써 사실상 항복문에 가까운 문서를 북한에게 건네주었다. 미국은 차후 공식으로 문서가 무효라고 주장했지만 푸에블로호 사건의 시말은 자국 이익이 얽힌 문제에 미국이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박정희는 이 사건을 통해 미국을 대하는 자세에서 모종의 교훈을 얻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후 1969년 4월 15일 동해상에서 EC-121 미국 정찰기 납치 사건이 일어났는데, 역시 미국은 막강한 힘을 과시하는 등 무력시위를 벌이기는 했지만 결국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한 채 상황을 마무리 하는 패턴을 보였다. 박정희는 이 같은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절절히 느꼈다. 그는 1971년 1월 1일 신년사를 통해서 미국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국가이익을 위해서는 어제의 적국을 오늘의 우방으로 삼고, 피도 눈물도 없는 적자생존의 논리를 내세우고 있는 냉혹한 생존경쟁의 시대에 있어서는 힘없는 민족은 세계무대에서 영원히 낙오되고 만다는 것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이 시련을 극복하는 데는 우방의 지원이나 협력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들의 굳센 결의와 분발과 단결이며 피와 땀을 흘려가며 국력을 기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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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 2017 특별기획전 '잘 살아보세-희망과 도전의 시간들'의 개막식이 지난달 10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렸다./사진=미디어펜 |
자신의 목을 자르겠다고 당당히 말하는 북한의 무장공비, 한국이 위태로울 때는 뒷짐 지고 있던 미국이 자국군이 당한 손실에는 팔을 걷고 나서는 모습, 그러나 결국 북한과 비밀 협상을 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미국의 모습 등을 본 약소국의 독재자 박정희는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10월 유신 선포 두 달 전인 1972년 7월 17일 제헌절 경축사에서 박정희는 “대의제의 이름으로 비능률을 감수했던 적은 없는지… 자유만을 방종스럽게 주장한 나머지 사회기강의 확립마저 독재라고 모함하지 않았는지… 민주주의가 마치 분열과 파쟁을 뜻하는 것으로 본의 아니게 착각한 일은 없는지…” 라고 말함으로써 유신체제 출범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대한민국을 책임지고 있던 지도자가 박정희가 아니었다면 그 사람은 박정희와는 전혀 다르게 행동 했을까? /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이 글은 박정희 대통령 서거 37주기 및 탄생 100돌을 맞아 박정희기념재단이 2017년 창간한 '박정희정신'에 게재된 글입니다. '박정희정신-미래 100년 박정희에게 길을 묻다'라는 주제하에 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이 쓴 '심층분석, 10월 유신의 국제정치학적 해석'(상편)입니다. 미디어펜은 이를 상, 하편으로 나누어 게재합니다.)
[이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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