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나는 우파에 끌립니다
보수, 진보의 개념이 나에게는 없었다. 열심히 살아오다가 자유경제원에 들어왔고 거부감 없이 자유주의 사상을 알고 공부하게 되었다. 물론 자유경제원을 알기 이전에 ‘일베’, ‘수구꼴통’ 등이 언급된 부정적인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 그 단어들과 함께 ‘보수’라는 단어가 불편하게 다가왔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저 ‘느낌’만 있었지 내용은 몰랐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 스스로 보수라고 얘기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것이다.
학창시절부터 관심을 두었던 것은 ‘사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라는 개인에 대한 궁금증이 시작이었다. 그래서 대학을 심리학과로 진학하였다. 심리학과 함께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개인’과 ‘집단’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보수’와 ‘진보’는 몰랐어도 그 이념적 차이를 가져온 철학을 공부한 것이다. 나는 ‘개인’과 ‘자유’의 가치를 느꼈고, 알고 보니 내 생각은 ‘보수’의 이념과 맞닿아 있었다. 나는 나와 맞는, 나를 설명해주는 ‘이론’을 찾은 것이다.
심리학을 배우다 보면 흥미로운 실험들을 접할 수 있다. 상식을 뒤집기도 하고 상식을 증명하기도 한다. 기억에 남는 실험 중 하나가 군중심리에 관한 것이다. 5~6명의 사람들을 모아두고 간단한 퀴즈를 내고 정답을 한명씩 말하게 하는 실험이었다. 여기서 한 명 빼고는 모두 틀린 답 하나를 공통적으로 말하도록 구성된 실험 보조들이었다. 피실험자는 아무 것도 모른 채 항상 마지막으로 말하게 되어 있었다. 앞에서 모두 같은 답(틀렸지만)을 말했고 피실험자가 대답할 차례가 되었을 때 그를 쳐다보며 무언의 압박을 가한다. 처음에는 소신 있게 정답을 얘기했다가도 2번 3번 반복되자 결국 나머지 사람들과 같은 답을 얘기한다. 사실 누가 봐도 명백한 답이 있는 퀴즈였는데, 결국 틀린 답을 선택하는 이 결과는 인상 깊었다. 비슷하게는 길거리에서 3명 정도만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는 것이 있었다.
이 외에도 사람이 집단이 되었을 때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그리고 한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과 이야기를 접했다. 소개한 실험에서 볼 수 있듯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집단의 의견을 따르도록 분위기만 조성을 해도 ‘개인’은 사라졌다. 또 3명만 있어도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보게 만들 수 있었듯이 쉽게 휩쓸릴 수 있었다. 그저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것에 따라간 것이다. 이런 것을 시작으로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가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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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은 이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 가치를 지키고 성숙시켜야한다는 점에서 보수를 택했다./사진=연합뉴스 |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이를 망각하거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다. 혹은 나는 그렇지 않고 이성적으로 판단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도 그저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니 좋은 것이겠거니 했다.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1위, 메인뉴스, 공유가 많이 된 글만 보고 그게 옳을 것이라 전제하고 보았다. 한편으로는 ‘인권’이나 ‘평등’을 얘기하며 같이 잘 살자고 하니 긍정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찜찜한 면이 있었다.
‘평등’, ‘인권’, ‘민주주의’와 같은 좋은 말을 외친다고 옳은 것은 아니다. 그저 좋은 말일 뿐이다. 그들이 말하는 평등은 개개인의 다름을 고려하지 않고 똑같은 의견을 가지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차별을 없앤다는 의도는 아름다웠지만, 그 방법은 결국 그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생각을 주입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차별주의자’, ‘몰상식한 사람’, ‘매정한 사람’ 등과 같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이 정말로 평등과 인권을 원한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모두가 행복하고 진정한 의미로 평등하길 원한다면, 개인을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존중하는 ‘자유민주주의’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내가 공부하면서 느꼈던 충격 중 하나는 ‘인식’에 대한 것이었다. 철학에서 인간이 세계 혹은 자아를 인지하고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은 다들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중세의 신 중심 세계관에서 벗어나면서 근대 서양에서는 인간 이성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이성으로 세계를 온전히 인식할 수 있다거나 이성조차도 확신 할 수 없다거나 하는 논쟁이었다.
현학적이나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보고 느끼는 세계가 거짓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오류에 대해 경계하게 되었다. 누구나 틀릴 수 있었고,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은 기준에 따라 달라 질 수 있음을 느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이렇다 저렇다 정해놓고 판단하는 것이 이상했다. 당시 이슈였던 최저임금법이나, 도서정가제 등과 같은 법에 대해 ‘기준은 누가 정하지?’ 라는 의문이 생겨 쉽게 동의하지 못했었다. 결국 나는 계속해서 개입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좌파보다는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얘기하는 우파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은 이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 가치를 지키고 성숙시켜야한다는 점에서 나는 ‘보수’를 택했다. 비록 아직은 공부해야할 것이 더 많고 설익은 생각일지라도 내게 딱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앞으로도 누군가가 완벽하게 옳을 것이라는 자만을 경계할 것이다. 그리고 개개인의 상호작용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시장경제를 믿을 것이다. /노하나 자유경제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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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업과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계속해서 개입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좌파보다 시장경제의 자유를 얘기하는 우파에 끌릴 수밖에 없다./사진=미디어펜 |
(이 글은 자유경제원 젊은함성 게시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노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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