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6) -키케로(BC 106~BC 43) 『최고선악론』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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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
욕망을 절제하고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라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 ~ BC 43)는 로마 역사상 최고의 변론가, 연설가,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애국심이 투철한 전형적인 로마인의 심성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실천적 지식인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그가 고민하던 철학은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다. 이는 키케로의 사상적 깊이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상대적으로 너무나 위대했기 때문에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것이다.
물론 키케로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그리스 철학의 거성(巨星)이 보여준 사유의 독창성과 깊이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저술한 『최고선악론』 과 『의무론』을 읽고나면, 그리스 철학에 빛이 가려진 로마의 뛰어난 사상가의 면모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고민했던 핵심주제는 ‘최고선’과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소크라테스는 참된 지혜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무지와 싸웠다. 플라톤은 이상적 국가와 조화를 이루는 개인적 삶의 방향과 덕(arete)에 대해 고민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의 탁월성을 바탕으로 한 중용을 강조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각각 많은 제자들에게 전수되면서 다양한 학파를 형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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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 ~ BC 399) 좌상이다. 아테네 학술원 건물 앞에 있다. 뒤 편의 누대의 조각상은 아폴론이다. ©박경귀 |
키케로는 『최고선악론』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후 헬레니즘 시대에 만개된 그리스의 서로 다른 철학파인 에피쿠로스파와 스토아파의 관점을 절충하려 시도했다. 삶의 관점에 대해 각기 다른 입장을 가진 두 학파 철학자들의 논쟁을 키케로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소화한 담론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삶의 윤리에 대한 로마인의 행복론인 셈이다.
이 책은 모두 5권으로 이루어졌다. 1권과 2권에서는 에피쿠로스파의 사상과 비판을 다루었다. 3권과 4권에서 스토아파의 주장에 대한 비평을 제기했다. 5권에 이르러 두 사상을 절충한 키케로 자신의 관점을 서술하고 있다.
◇ 고통이 없는 쾌락이 최고선이다?
먼저 에피쿠로스파의 사상을 살펴보자. 창시자인 에피쿠로스(기원전 341~271)는 진리의 기준은 감각이나 감정 또는 쾌, 불쾌의 느낌에 의해서 제시된다고 보았다. 감각과 느낌이 올바른 판단과 의지를 결정하게 되므로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이 없는 상태가 쾌락이며, 세상의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는 생활이야말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물론 에피쿠로스가 주장하는 쾌락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오로지 신체적, 감각적 자극을 충족시킴으로써 얻어지는 그런 것과는 다르다. 진정한 쾌락은 인간의 맹목적 충동이나 열정과 탐욕 등에서 완전히 벗어난 내면의 혼란이나 고통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허영에 가득 찬 탐욕은 한계가 없다. 따라서 이를 만족시키려는 노력만으로는 결코 쾌락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에피쿠로스는 선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욕망의 충동과 불의한 것을 억제할 수 있는 지혜, 용기, 절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에피쿠로스가 “지혜롭고 도덕적이며 정의롭게 살지 않으면 즐겁게 살 수 없고, 즐겁게 살지 않으면 지혜롭고 도덕적이며 정의롭게 살 수 없다”고 한 말이 이를 함축한다.
하지만, 쾌락을 추구하면서 욕망을 절제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방탕하게 사는 사람도 그럴듯한 변명을 할 것이다. 고통이 없는 상태가 최고선이 아닌가, 자신은 바로 그런 쾌락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논리적으로 비난하기가 어렵다. 키케로는 에피쿠로스파의 쾌락론의 이러한 논리적 허점에 의문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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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의 제자이자 친구로 에피쿠로스 사후 학파를 이끈 중요한 철학자인 메트로도로스(Metrodoros, BC 331(330) ~ BC 278(277)이다. 아테네 고고학박물관 소장 ©박경귀 |
◇ 자유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감내한 것도 최고선 아닌가?
특히 에피쿠로스파가 사람들의 이기적 본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에도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은 인간들이 자신의 쾌락이나 편익을 위한 것이 아니면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키케로는 인간의 희생적 이타성이 발휘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반박한다.
인간은 신의, 정직, 도덕성을 지키기 위해, 또는 조국을 위해 자신의 고통을 마다하지 않을 때도 많다는 것이다. 고통을 스스로 감내하는 인간의 본성이 존재한다면 고통과 상반되는 쾌락만을 최고선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키케로는 인간 행위의 선택과정에서 도덕성이 쾌락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더군다나 에피쿠로스파는 육체에 관련되지 않은 정신적 기쁨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는 최고의 고통을 정신적 기쁨으로 보상받는 것으로 인식하기도 하는 인간의 위대한 이성적 측면을 무시한 오류라는 것이다. 키케로는 페르시아 전쟁 당시의 사례를 그 예로 든다.
스파르타 왕인 레오니다스는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페르시아 군을 맞아 그리스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300명의 용사와 함께 용감하게 대항하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들에게 최고선은 쾌락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최고의 육체적 고통과 극단적 죽음을 정신적 즐거움으로 보상받았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겠냐는 것이다.
이렇게 키케로는 쾌락을 최고선으로 여기는 쾌락주의의 맹점을 공박했다. 쾌락만을 추구하게 되면 모든 판단의 기준을 이성이 아닌 감각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 그러다보면 필연적으로 가장 감미로운 것을 최상의 쾌락이라고 여기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키케로가 에피쿠로스파의 사상에 더욱 비판적이었던 데에는 정치적 판단도 한 몫 했을 것 같다. 에피쿠로스파는 개인주의적 경향이 강했다. 당연히 개인의 안락을 도모하고 공동체의 책무에 소홀한 측면이 많았다. 로마 시민에게 적극적 정치 참여와 참전 등 공공적 책무의 수행을 권장하던 로마 지도층으로서 에피쿠로스파의 주장이 로마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중대한 위협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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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케로의 흉상이다.
출처: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Cicero_-_Musei_Capitolini.JPG |
◇ 자연적 본성과 조화를 이루는 미덕이 최고선?
스토아파는 에피쿠로스보다는 개인들에게 덜 고립적인 삶의 방식을 제시했다. 스토아 학파를 창시한 제논(기원전 333~262)은 인간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으로서 미덕 추구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과의 조화를 위해서는 경험뿐만 아니라 이성을 사용해야 하며, 이를 위해 정의, 용기, 절제와 같은 완벽한 미덕을 갖춰야 한다고 말한다.
스토아파는 특히 본성에 부합하는 삶을 최고선으로 보았다. 도덕성이 그 자체로서 추구되고, 도덕적 불명예가 그 자체로 회피되는 것도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부모가 자식을 양육하는 것도, 자식이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도 본성에 의해서다. 개인이 모여서 사회 공동체를 이루고 국가의 법률에 복종하고 시민의 책무를 수행하는 것도 본성의 발현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본성에 의한 그 자체의 추구 행위라는 점에서 쾌락과 유익의 동기에 의해 우정이나 정의가 성립된다고 보는 에피쿠로스파의 견해와 다른 점이다.
하지만 키케로는 스토아파의 허점도 지적한다. 스토아파가 규정하듯 본성에 따른 도덕적 삶만이 최고선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다양하고 소소한 일상의 의무나 기쁨이 배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건강에 관한 관심이나 가사에 관련한 근면함, 국가의 통치나 상거래 질서의 유지, 생활의 의무들을 선한 덕목에서 소홀히 다루면, 결국 더 큰 도덕성도 소멸하고 마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스토아파가 인간의 본성이 과연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에 관해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한 것이다. 즉 지나치게 이성을 중시하고 일상적 감성과 욕망에 대한 금욕주의를 강조한 스토아파의 이상주의를 지적한 셈이다.
◇ 감성과 이성을 절충한 중용이 최고선이다
에피쿠로스파와 스토아파의 사상을 절충하고자 키케로가 제시한 이론은 아카데미파 안티오코스의 견해와 맥락이 같다. 덕은 행복에 충분한 것이지만, 최고도의 행복 상태에서는 육체적이고 외적인 것들도 행복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키케로는 에피쿠로스파가 감성을 중시한 데 반해, 스토아파가 이성을 강조했던 각각의 주장을 포괄하고자 했다.
인간은 정신과 육체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정신은 감각에 의해 지도되고, 마음은 인간의 본성 전체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결국 정신과 육체의 덕에 의해서 채워지는 대로 인생이 추구되게 된다는 것이다. 때로 감각적 쾌락을 쫒기도 하고, 때로 이성적 인도에 의해 삶이 정돈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성과 감각의 상호작용, 즉 육체의 건전함과 마음의 완전한 이성에 의해 누적되는 덕이 최고선에 근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조화된 최고선을 이루기위해선 감성과 이성의 중용이 필요하다.
키케로의 절충적 철학은 앞서 비판했던 두 학파의 이론처럼 정밀성을 갖추지는 못했다. 하지만 행복한 삶의 모습과 행태에 대한 로마인들의 실용적 관점을 충분히 대변하고 있다. 특히 최고선에 대한 대안적 담론을 보여주는 제5권의 대화편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인생의 경험이 일천한 로마의 청년들이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당시 키케로는 27세, 동생 퀸투스는 24세, 아티쿠스는 30세였다. 좌장격으로 토론을 주도한 피소도 불과 35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그리스 철학을 개관하고 절충적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의 진지함과 토론의 깊이, 그리고 치열함은 감탄스럽다.
우리 사회의 철학자들은 현대인의 삶의 좌표를 보여줄 만한 통찰이 넘치는 행복론을 치열하게 토론하고 제시해 준 적이 있는가? 우리 청년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삶이 즐겁고 행복한 삶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얼마나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이 선이며, 악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가하는 인생의 궁극적 목적에 대해 회의하고 고민하지 않는 현대인들의 얄팍한 삶이 씁쓸하게 대비된다. 우리의 일상의 모습은 삶의 'How'에만 매몰된 것은 아닌가? 이 책을 통해 삶의 ‘Why'를 상실한 우리에게 삶의 목적(telos)과 지향을 성찰하게 해주는 고전읽기의 진정한 매력을 다시 느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연계해서 읽으면 좋은 책이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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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도서 : 『<최고선악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지음, 김창성 옮김, 서광사(2011, 5쇄), 30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