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169)-펠로폰네소스 풍경에서 읽는 희망의 메세지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 『모레아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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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1883년 터키의 지배 아래에 있던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다. 그가 '20세기 문학의 구도자'로 불리며 평생 자유를 갈망하는 작품들을 써냈던 것도 조국의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연스런 노력의 일환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작품 활동 과정에서 많은 곳들을 여행했다.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지중해, 이집트, 러시아의 구석구석을 여행했고, 말년에는 중국과 일본도 들렀다.
<모레아 기행>은 자신의 조국이던 그리스의 본토,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여행기이다. 중세 시대와 근대 초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모레아(Morea)로 불렀다. 모레아는 비잔틴제국의 주 이름이기도 했다. 과거 이 지역은 크레타 문명의 뒤를 이어 미케네 문명을 꽃피운 곳으로 그리스 본토에서 가장 먼저 그리스 문명을 일군 지역이다.
영웅 페르세우스의 고향이기도 하고 헤라클레스가 12고역을 완수하기 위해 활약하던 무대이기도 한 곳이다. 이후에는 스파르타가 세력을 떨치던 지역으로 13세기 초엔 프랑크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그 후 비잔틴 제국의 지배 아래 문화적·경제적 번영을 이루던 곳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 문명의 발상지인 이 곳을 25년간 6차례나 여행했고, 1937년 모레아 여행기를 발표했다. 이 여행에서 그가 얻은 다양한 생각과 자료들은 이후 그의 많은 작품에 투영되는 등 그의 문학 인생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46년 발표된 그의 출세작 <그리스인 조르바> 역시, 이 책에 드러난 여러 모티브를 연상시키는 대목이 적지 않다.
<모레아 기행>은 또 한 편의 카잔차키스의 소설이자, 자서전이자, 역사평론서로 볼 수 있다. 단순히 모레아의 풍물을 전하는 여행기가 아니다. 그는 가는 곳곳에 산재한 고대 그리스의 유적뿐만 아니라, 이 곳을 지배해 온 중세 이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영향에 대한 그의 감상과 성찰, 소회와 함께 자신의 철학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카잔차키스는 고대 그리스 신전들의 건축과 조각상에 표현된 아름다운 균형미, 자유인의 절제력을 보면서 그 영웅적 영감을 어떻게 현대에 되살릴 수 있을까 고뇌한다. 조국에 대한 절절한 사랑과 열정을 가진 그리스인만이 느끼는 그 씁쓸한 기분을 우리가 쉽게 이해하긴 어려울 듯싶다.
그가 스파르타 시대의 덕목인 용기와 검약, 절제, 의연함을 반추하며, 바로 당대의 그리스인에게 최고의 의무로써 용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카잔차키스는 모레아 기행을 통해 당대 그리스의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현대 그리스 문명을 창조할 수 있는 영감과 원동력을 얻어내려 한 것 같다.
그는 고대 그리스 문명이 일군 성취가 그리스인만의 것이 아니라, 서구 문명의 성취로 전이되고 확대되었다는 점에 자부심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리적․정신적 위치"에 있는 그리스가 동방과 서방의 갈등하는 두 힘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과 승화를 만들어 낼 시대적 사명에 처해 있음을 절감하고 있었다. 한 때 민족주의에 깊이 빠졌던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많다.
그가 한 때 융성했던 스파르타의 미스트라 지역을 거닐며, 그리스의 부활을 꿈꾸던 15세기 비잔틴 제국의 철학자였던 기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의 삶을 재조명하는 이유도 당대 그리스의 잠든 정신을 계몽하기 위해서였던 듯싶다. 게미스토스는 여생의 대부분을 펠로폰네소스의 모레오의 미스트라에서 보냈다.
그는 비잔틴 제국의 통치 아래서 그리스의 르네상스를 가져온 위대한 선구자였고, 새로운 그리스 세계를 창조하려 부심했던 현인이었다. 나아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주장인 경자유전(耕者有田)을 통한 경제적 자급자족을 그리스 민족 중흥의 핵심사항으로 주장했다. 나아가 용병이 아닌 그리스 국민으로 구성된 국민군의 육성도 강조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미스트라의 페허에서 방황하는 게미스토스의 그림자를 본다. 그는 20세기 초반의 고통받는 그리스 현실에서 게미스토스와 같은 애국적 열정과 지혜와 용기를 가진 위대한 지도자를 고대했다. 터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직후의 그리스의 상황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스인은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조국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병적일 정도로 개인주의적이다. 그는 비잔틴 사람처럼 상급자에게 아부하고, 터키인처럼 하급자를 괴롭히지만, 자신의 개인적 명예를 위해서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영리하고 천박할 뿐 형이상학적 고민이 없다. 하지만 그가 노래를 부를 때면 동방적인 내장에서 솟구치는 보편적 슬픔이 그리스적 논리의 겉껍질을 깨부순다. 갑자기 어둡고 신비스러운 동방의 정신이 그의 내부에서 솟구치는 것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의 지나친 개인주의와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녔던 형이상학적 고민을 하지 않는 당대 그리스인들의 모습에 절망하면서도, 본능적 자존감과 자유를 갈구하는 정신이 그리스의 문명을 재창조해 낼 수 있는 폭발력을 가진 잠재역량이 될 수 있음을 재인식하는 것이다.
그는 모레아 풍경에서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읽어낸다. 현재의 가난하고 초라한 그리스 농촌의 삶을 직시하고, 찬란했던 고대 그리스인의 초상을 떠올리며 우울해 하면서, 자유로운 그리스 국가의 부흥을 꿈꾸고 있다. 카잔치키스는 모레아 구석구석에 켜켜이 쌓인 역사의 충적토에서 그리스의 잠재적 원동력의 씨앗을 찾으려 한 것 같다. 그는 그리스의 영광을 ‘기적’처럼 되살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스 민족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기적을 연출하는 위험한 특권을 소유한 민족이다. 오랫동안 견디어 온 강력한 민족들이 그러하듯이, 그리스 민족은 비록 벼랑의 밑바닥으로 추락했어도, 약한 민족은 파멸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지점에서 아주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여 기적을 만들어 낸다. 그 민족은 자신의 자질을 총동원하여 단번에, 쉬지 않고 벼랑의 꼭대기로 솟구쳐 올라와 구제되는 것이다. 이처럼 정상으로 갑자기 용솟음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인데, 보통 '기적'이라고 한다."
<모레아 기행>은 과거 영광의 역사를 가졌지만 이민족의 오랜 지배에 찌들어버린 그리스의 참담한 현실에 고뇌하며 새로운 문명의 창조와 부활을 꿈꾸는 한 열정적 지식인의 사상적 편력과 계몽적 의지를 보여준다. 특히 모레아의 풍경 속에 내재한 ‘형이상학적 풍경’을 잘 보여줌으로써 그리스인들이 당면한 현실의 난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숙고하게 만들어주는 철학적 기행기이다.
카잔차키스는 당대 그리스인들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리스인들이 천성적으로 호기심이 높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거란 믿음에서다. 그리스인들은 전통적으로 무엇이든 놓치지 않겠다는, 또 배우겠다는 호기심이 많고, 이익을 올려 돈을 벌겠다는 욕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인들이 자신의 장점과 호기심, 재능 등을 완벽하게 가동한다면 그들의 대화마저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되고 또 형이상학적 탐구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의 저력의 원천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카잔차키스는 여행 중 만난 한 청년 시인에게 현대 그리스 문명을 창조해 내기 위해 그리스인 청년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조언했다. 그는 자신을 철저하게 사랑하고 형태 없는 것에서 형태를 만들어 냈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창조적 정신을 되살릴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조언은 우리 문제로 치환한다면 오늘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우리 청춘들에게 들려줘도 유용할만한 이야기다.
"그리스가 당신에게 준 모든 힘을 당신 내부에서 경험하세요. 밤낮으로 그 힘을 갈고 닦고, 그 힘을 이용하여 아름다운 성과물을 만들어 내고, 보다 완벽한 형태로 그 힘을 다듬으세요. 이렇게 할 때 당신이 선택한 분야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또 그 분야를 통해 현대 그리스 문명을 창조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스인들이 고대 아테네인들이 창조했던 황금시대를 다시 열 수 있을까? 카잔차키스의 말처럼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제 더 이상 그리스인들만의 '조상'은 아닌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미 서양인 모두의 조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서구 문명은 현대인의 뛰어난 성취임과 동시에 그리스인들의 성취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언젠가 그 성취의 중심에 그리스인들이 당당하게 자리 잡을 날이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박경귀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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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천도서: 『모레아 기행』, 니코스 카잔차키스만 지음, 이종인 옮김, 열린책들(2008). 230쪽. |
[박경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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