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사법부 눈치 보는 경제계…해외투기 자본앞에 무장해제
[미디어펜=문상진 기자]대한민국 대표기업이 해외 투기자본에 먹혀도 상관없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 관련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에게 법원이 실형을 선고했다. 지난 8일 이 같은 법원의 판결에 각계에서는 국가경제 고려 없이 지나치게 기계적 판단을 했다는 우려와 함께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삼성물산의 3대 주주였던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비율에 불만을 품고 반대했다. 재계와 언론, 전문가들은 엘리엇의 속셈이 삼성의 단물만 빼먹고 철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장기 투자가 아니라 단기수익을 노린 먹튀자본으로 심각한 국부유출 우려도 지적됐다.

여론도 외국계 투지 자본이 대한민국 대표기업이자 국민기업을 뒤흔들게 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였다.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지분 11.21%를 보유한 대주주였다.

국민연금이 국익 보호 차원에서 '백기사(현 경영진의 경영권 방어에 우호적인 주주)'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결국 국민연금이 찬성표를 던지면서 합병은 성사됐다. 당시 합병과 관련해 의견을 밝힌 22개 증권사 리서치센터 가운데 95%인 21곳)이 합병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일단락됐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불거졌다. 박영수 특검팀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이른바 '뇌물 혐의'을 수사하면서 합병과정 중 외압 의혹이 있었느냐로 불똥이 튀었다. 박영수 특검팀은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을 '삼성 뇌물 사건'의 징검다리로 주목했다.

   
▲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 관련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에게 법원이 실형을 선고했다. 사법부가 국민연금 기금운용에 대한 의사결정에 지나친 법적용을 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나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문제삼은 것은 당시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던 국민연금공단은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의결권 전문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찬성표를 던진 부분이다. 문 전 이사장은 이 과정에서 합병 안건을 '국민연금 주식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가 아닌 내부 투자위원회에서 다루고 찬성하도록 압박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은 엘리엇이 문제 삼은 것처럼 합병비율에 이견이 있기는 했지만 엄연히 자본시장법이 정한 방식에 따라 결정된 것이다. 여론도 국민연금의 백기사역을 지지했다. 8일 법원이 '삼성 합병 찬성 외압' 판결(조의연 부장판사)을 내리자 각계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재판부는 이들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성사를 위해 국민연금의 개별 의결권 행사 사안에 개입해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며 각각 직권남용과 배임 혐의를 적용해 유죄 판결을 내렸다.  국민연금 안팎에서는 기금운용에 대한 의사결정에 사법부가 지나치게 법적용을 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다.   
일각에서는 앞으로 국민연금은 어떤 결정도 안 내리고 못 내리는 조직이 될 것이라는 개탄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문 전 장관은 '국가 전체적인 이익을 위한 결단'이라는 취지로 주장했지만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공무원들의 복지부동, 보신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지 않을까 우려도 나오고 있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주요 정책 결정은 현실적·법적 판단 외에 정무적 판단도 필요하다. 국가 대표기업이자 국민기업이 해외 투기자본에 뒤흔들리는 것을 반대하는 여론도 무시할 수 없다. 재판은 공정하되 한 가지 잣대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

물어보자. 문형표 전 장관은 과연 수수방관했어야 옳은가? 해외 투기자본에 삼성경영권이 위협받는 것을 방치했어야 했는가? 아니면 엘리엇의 손을 들어줘야 했는가? 국가 대표기업 삼성 경영권이 흔들리고, 탈취당하는 것을 수수방관했다면 직무유기 아닌가?

이번 판결에 대한 후폭풍이 걱정이다. 재계 관계자는 "앞으로 비슷한 합병 건이나 중대한 의사결정 때마다 국민연금이 참여하는 경우가 많을 텐데, 합리적인 결정마저 주저하는 식으로 너무 위축되는 건 아닌지 염려스럽기도 하다"고 말했다. 엘리엇과 같은 헤지펀드들이 국민연금이나 삼성을 상대로 추가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에 찬물을 끼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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