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 또는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의 대화'라고 정의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요한 징검다리다. 그럼에도 우린 때때로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로 스스로를 부정하는 우를 범하곤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도발은 계속되고 있다. 이에 맞서는 유일한 길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앎과 이해일 것이다. '독도는 우리땅'이란 가수 정광태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사부(異斯夫)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이사부 장군은 경상북도 동부의 작은 부족국가 신라를 한반도의 주역으로 끌어올린 분이다. 또 다양한 종족을 하나로 통합해 한민족의 뿌리를 형성하게 했으며, 신라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은 위인이기도 하다. 독도에 대한 이해와 자긍심 고취를 위해 미디어펜은 이사부의 흔적을 찾아 나선 김인영(언론인)씨의 '이사부를 찾아서'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異斯夫⑧] 흉노의 후예
신라 김씨와 가야 김씨는 한 뿌리...금관가야 병합 후 김씨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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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영 언론인 |
이사부에 의해 금관가야는 역사에서 사라지지만, 마지막 임금 구해왕(구형왕)의 자손들은 왕족의 대우를 받으며, 신라에 고위관리직을 맡아 신라의 영토확장과 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했다.
정복국가 신라가 금관국의 패망 왕조에 대해 특별 대우를 했다. 532년 금관국의 구해왕이 왕비와 맏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 아들 무력(武力)과 함께 항복했다. 법흥왕은 구해왕에게 최고관직인 상대등 자리를 주고, 금관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했다.
주변 국가를 무참하게 정복하며 국세를 키워온 신라가 패전국의 왕과 그 일족을 살려주고, 후하게 대접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구해왕의 아들 김무력과 무력의 손자 김유신은 신라의 1등 공신이 되고, 진골 대접을 받는다. 경주 김씨와 김해 김씨의 선조들은 서로 다른 나라를 만들어 죽고 죽이는 전쟁을 벌였지만, 일단 가야김씨 쪽에서 항복을 선언하자, 신라 김씨 쪽에서 화해를 선택한 것이다. 한뿌리 에서 나왔다는 핏줄 의식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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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에 있는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 사적 제158호. 대왕암이라고도 불린다. |
1) 김일제의 후손
신라와 가야의 김씨들은 모두 몽골 고원에서 기원해 한반도 남쪽 끝으로 이동한 흉노족의 후예라고 한다. 두 김씨의 기원에 대한 몇가지 가설을 정리해 보자.
가설1: 신라와 가야 김씨는 김일제의 후손
신라 김씨 왕족과 금관국 김씨 왕족은 모두 한(漢)나라 무제(武帝)때 벼슬을 한 흉노족 휴도왕(休屠王)의 태자 김일제(金日磾)의 후손이다.
한무제는 흉노족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곽거병 장군 지휘 아래 대군을 북방에 보내 흉노를 공격하고, 흉노 왕족인 김일제 일파를 잡는다. 한나라에 끌려온 김일제는 한무제의 말을 관리하며 신임을 얻다가 한 무제의 암살사건을 막은 공으로 산동성 지역의 제후인 투후(秺侯)로 책봉됐다. 아울러 한무제는 흉노가 금인(金人)을 만들어 천신에게 제사지내는 풍습을 보고, 김일제에게 ‘김(金)이라는 성씨를 내렸다.
산동성 제후가 된 김일제는 흉노 3만명을 산동성으로 이주시켰고, 그의 후예들이나중에 한나라 조정의 실권을 잡는다. 김일제의 증손인 김당은 서기 8년 이모부인 왕망(王莽)을 도와 한나라(전한)를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한(漢) 왕조의 유(劉)씨 세력들이 전국에서 힘을 결집해 신(新)나라를 멸망시키고, 다시 유씨 왕조(후한)를 세우자, 김일제 후손들이 대거 한반도로 내려와 신라와 가야의 왕족이 됐다. 따라서 신라의 김알지, 미추왕, 내물왕, 금관국의 김수로왕이 모두 흉노 휴저왕의 태자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것.
이 가설의 증거로 두 비문이 제시되고 있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 문무왕의 비문에는 '□侯 祭天之胤傳七葉(□후 제천지윤 전칠엽'이라는 글귀가 있는데, 여기서 글자가 해독하기 어려운 □를 '秺'로 읽어 투후 김일제의 7대손이 신라 김씨왕조의 시조가 됐다는 해석이다.
또 최근 시안(西安)에서 발견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에서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磾)시니 흉노 조정에 몸 담고 계시다가 한에 투항해 무제(武帝) 아래에서 벼슬을 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무제가 그를 발탁해 투정후(秺亭侯:투후)에 봉하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이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김씨부인은 당나라 조정에서 벼슬을 한 신라의 김충의(金忠義)의 손녀이자, 김공량(金公亮)의 딸이다. 이 비문은 문무왕비의 내용을 확실하게 뒷받침했다.
가설2: 신라 김씨는 선비족 모용씨
1세기 말엽에 중국 내몽골에 있던 선비족(鮮卑族)이 북흉노를 쳐 패퇴시키고, 흉노인 10만 가구를 선비족으로 귀속시켰다. 선비족 가운데 모용(慕容)씨가 이끌던 모용선비가 국가의 모습을 갖추면서 5호16국 시대인 4세기초 중국 동북지역을 점령해 국호를 연(燕)이라 칭했고, 고구려 고국원왕 12년(342년)엔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5만5천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모용황 군대는 남과 북 두갈래로 고구려를 공격했고, 남로로 온 4만의 부대는 크게 승리해 고구려 수도 환도성에 불을 지르고 왕비와 왕대비를 볼모로 잡아가고 왕의 부친인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까지 꺼내갔다. 하지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북로로 온 모용선비의 1만5천의 군대는 고구려군에 모두 전사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중국 사서를 참고한 것으로, 1만5천의 군대가 ‘모두 죽었다’는 표현은 '한사람도 본진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는 것. 북로의 선비군은 상당한 병력을 잃었지만, 패잔병들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극형에 쳐해지기 싫어서 남하해 신라 땅에 이르렀다. 이들은 석씨 왕조를 무너뜨리고, 김씨 왕조를 열었으니, 그가 내물왕(재위 356~402년)이다.
이 가설의 근거는 <삼국사기>에 내물왕의 후손인 법흥왕의 성씨가 '모(募)'씨라는 놀라운 사실을 적고 있다는 점.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조엔, "법흥왕의 이름은 원종(原宗)이다. <책부원귀(冊府元龜)>라는 서책에는 성은 모(募)이고 이름은 진(秦)이라 했다"고 나와 있다. 당연히 김씨이어야 하는데, 야사도 아닌 정사에서 모씨라 했으니, 이상한 일이다. 중국 사서에도 법흥왕이 모씨이며, 이름이 진(秦) 또는 태(泰)라고 했다. 발음은 다르지만, 글자 획이 비슷해 생긴 현상인 것 같다.
또 1988년에 발견된 울진봉평신라비에도 법흥왕을 '모즉지(牟卽智)'라고 적었다. 당대의 비석에서도 왕의 이름이 모씨임을 밝혀, 내물왕 이후 김씨들이 선비족 중에서 흉노 계열인 모용씨의 후예라는 것.
이외에도 가락국 시조 김수로의 이름은 김시(金諟)라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도 김수로의 조상은 흉노족 왕자인 김일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설 3)
첫 번째 가설은 상당한 신빙성을 얻고 있다. 문무왕비와 김씨부인의 비에서 흉노인 신라김씨가 김일제의 후손임을 입증하고 있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김일제의 후손이 김(金)씨 성을 유지하며 현지에서 살고 있다는 답사기행문도 있다. 하지만 중국 동북부에 있던 흉노 김씨가 어떻게 한반도로 들어왔는지, 그 경로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두 번째 가설은 아주 흥미롭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글귀와 울진봉평비의 석문(石文)만으로 신라 김씨 왕조가 선비족 모용씨라는 논리를 지탱하기엔 부족해 보인다.
논리 전개의 일부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제 후손설이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다. 다른 가설들도 신라와 가야를 지배한 김씨 왕조가 모두 흉노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어느 설이든 신라와 가야 김씨의 근원은 흉노족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2) 흉노의 유습
외국인들에게서 "한국사람들은 김씨만 있는가"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우리나라에서 김씨가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성씨이기 때문이다. 2000년 주택인구조사에서 전체 인구의 21.6%를 차지했고, 인구 1천만을 넘어 서울 인구를 상회한다. 거의 대부분 김씨 본관이 경주 김씨와 김해 김씨에서 갈라졌다. 따라서 김씨의 뿌리를 찾는 연구들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자아냈고, 김씨가 흉노족의 후예라는 주장이 단군의 자손으로 알고 있던 우리 사회에 충격을 줄만했다.
신라와 가야의 김씨 왕족이 흉노족 후예라는 점은 유적과 유물에서도 나타난다.
경주와 김해 등지에서 적석목곽분이 다수 발견되는데, 흉노의 무덤과 같은 방식이다. 바닥에 돌을 깔고, 그 위에 목관을 안치하고, 주위에 통나무로 상자 모양의 목곽을 만든다. 그 위에 돌을 쌓아 올리고, 흙을 부어 거대한 봉분을 조성하는 방식이다.
경주 황남동 대릉원에 가면 거대한 봉분을 볼수 있는데, 미추왕을 비롯, 천마총, 황남대총등 동산만한 고분 20여개가 모두 3세기 중반이후 김씨 왕릉이다.
경주와 김해의 고분에서 발굴되는 유물도 흉노의 것과 비슷하다. 금관과 장신구, 금 허리띠, 띠 고리, 뿔잔, 보검등은 스키타이족 또는 흉노족이 쓰던 것과 유사하다. 말을 순장했고, 안장과 등자등 마구류가 다수 발굴되는 것도 비슷하다.
습면에서도 비슷한 점이 발견된다. 유학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면서 김씨 왕조의 풍습에서 흉노의 유습이 남아있음을 시사했다.
신라의 경우에는 같은 성씨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형제의 자식과 고종ㆍ이종 자매까지도 모두 맞이해 아내로 삼았다. 비록 외국은 각기 그 풍속이 다르다고 하나 중국의 예법으로 따진다면 이것은 커다란 잘못이라고 하겠다. 흉노(匈奴)에서 그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 간음하는 짓은 이보다 더욱 심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이사금은 성은 김씨로, 어머니가 김씨 휴례부인(休禮夫人)이며, 왕비도 김씨로 미추왕(味鄒王)의 딸이다. 경주 김씨 출신에다 유학자인 김부식은 내물이사금의 가족관계를 설명하며, 흉노보다 심하지 않지만, 자신의 조상인 김씨 왕족들이 같은 성씨를 아내로 맞이하고, 친족내 결혼이 성행함을 못마땅해 하며 한마디 한 것이다.
임금이 죽을 때 노비를 함께 메장하는 순장의 풍습도 흉노의 유습이다. 신라는 지증왕때 순장을 폐지했지만, 가야는 마지막왕때까지 순장 풍습을 남겼다.
김해 대성동 29호 무덤에선 유목민들이 사용하던 동복(銅鍑)이 나왔는데, 북방 초원지대에서 사용된 금속제 그릇과 유사하다. 동복의 기원은 스키타이계 유목민 문화에서 찾아지는데, 고대 중국에서도 유목민이 거주하는 북부에서는 출토됐다. 말의 뒤편에 솥을 매고 다니는 인형의 모습에서 신라인의 모습에서 몽골 사막의 유목민 인자를 발견할수 있다.
3) 성한왕(成漢王)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신라의 김씨 왕조의 시조가 김알지라고 서술하며 설화를 소개했다.
1) 탈해 9년(65년) 3월, 임금이 밤에 금성 서쪽 시림(始林)의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날이 샐 무렵에 호공을 보내 살펴보도록 하니, 나뭇가지에 금빛이 나는 작은 궤짝이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이를 아뢰자, 임금은 사람을 보내 그 궤짝을 가져오게 했다. 열어보자 그 속에는 어린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뛰어났다. <삼국사기>
2) 탈해왕(脫解王) 때 일이다. 영평(永平) 3년 경신(60년) 8월 4일 밤에, 호공이 월성(月城) 서쪽 마을로 가다가, 시림(始林) 속에서 매우 커다란 빛을 보았다. 자주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뻗쳤는데, 구름 속에는 황금 상자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고 그 빛은 바로 그 상자 속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흰 닭이 나무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이를 왕에게 아뢰자 왕이 그 숲으로 가서 상자를 열어보았는데, 상자 안에는 남자 아이가 누워 있다가 곧바로 일어났다. 그 아이를 알지라고 이름 붙였다. <삼국유사>
하지만 금석문에서는 김알지에 대한 언급이 없고, 김씨 왕조의 시조로 성한왕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성한왕을 언급하는 금석문은 <문무왕릉비>를 비롯해 5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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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무왕비 |
1) 15대 조상은 성한왕(成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와 □□를 개창하여... <문무대왕비> (662년 건립)
2)태조 한왕(韓王)은 천년의 □를 열고... <김인문비> (695년 건립)
3) 태조 성한(星漢)... <흥덕대왕비> (872년 직후 건립)
4) 대사의 법명은 이엄이고, 속성은 김씨이니, 그 선조는 계림인이다. 그 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니 실로 성한(成漢)의 먼 자손(實星漢之苗)이다. <해주 광조사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 (937년 건립)
5) □운은 속성이 김씨이니 계림인이다. 그 선조는 성한(聖韓)으로부터 내려와 나물(那勿)에서 크게 일어났다. <<풍기 비로암진공대사보법탑비> (939년 건립)
5개 금석문 중 앞의 3개는 신라시대에 만들어졌고, 뒤의 2개는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고려 왕건에게 바친(935년) 직후에 건립됐다. 모두 신라때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신라때 만들어진 비문에는 김씨 왕조의 시조를 성한왕이라고 하는데 비해 고려때 쓰여진 두 사서엔 김알지라고 하며 신화화했다. 그러면 신라때 성한왕이 고려때 김알지로 둔갑한 것일까.
알지에서 13대 미추이사금까지 계보에 대해
<삼국사기>에선 알지 - 세한(勢漢) - 아도(阿道) - 수류(首留) - 욱보(郁甫) - 구도(仇道) - 미추(味鄒)라고 했고,
<삼국유사>에선 알지 – 열한(熱漢) - 아도(阿都) - 수류(首留) - 욱부(郁部) - 구도(俱道)[혹은 仇刀] - 미추(未鄒)라고 했다. 두 사서의 계보도 거의 일치한다.
그러면 김알지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고, 신화를 통해 탄생했고, 비슷한 음이 있는 세한(삼국사기) 또는 열한(삼국유사)이 성한왕일 가능성도 있다. 문무왕릉비에 15대조가 성한이라고 했는데, 김씨 왕조 계보상 일치한다고 한다.
학계에선 김알지가 성한왕이라고 보는 설과 알지는 신화적 인물이고 실재한 세한이 성한왕으로 보는 설로 나뉘어 있다. 그러나 당대에 쓰여진 금석문과 후대에 쓰여진 사서에 차이점이 발견될 때엔, 당대의 자료를 우선시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성한왕이 김씨 왕조의 시조이며, 알지는 신라시대 김씨 집단에 떠돌던 설화가 고려시대에 부활하면서 사서에 기록됐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민족 모두가 단군의 아들이라는 일제때 민족주의자들이 만들어낸 것임을 감안할 때, 알지 신화도 1천년 후 가공의 인물을 끼워넣었을 가능성이 있다.
지금까지 검토한 결과를 토대로 흉노족의 후손을 정리해보자.
[흉노 왕자 김일제의 후손이 한반도로 내려오면서 성한왕이 소백산맥을 중심으로 북쪽 충청도 일대와 남쪽 경상북도 일대에 본거지를 형성했다. 성한왕의 후손들이 백제에 밀려 경주로 내려갔지만, 당장에 왕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박씨와 석씨 사이에 캐스팅보트 역할을 했다. 힘을 길러 미추 때, 임금을 한번 세운후 내물이사금 이후 김씨 왕조를 열었다.] /김인영 언론인
[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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