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동건 기자] 세련되고 기골찬 표정으로 스크린을 장악하지만 열 명만 모여도 말 한마디 어려운 평범한 청년이다. 드라마 보는 게 취미의 전부인 집돌이지만 어떤 20대보다 격렬히 뛰는 스프린터다. 배우 이종석의 이야기다. 질문 하나에도 뜸을 둔 채 깊이 생각하는 이종석에게선 청춘 배우의 패기 대신 미디어를 통해 볼 수 없었던 진중함이 느껴졌다.
대한민국 영화 사상 최초 '기획 귀순'을 소재로 한 영화 '브이아이피'(감독 박훈정)에서 북에서 온 VIP 김광일을 연기한 배우 이종석을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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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브이아이피'의 배우 이종석이 미디어펜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YG엔터테인먼트 |
이종석이라고 하면 으레 정갈한 외모, 귀청에 달콤하게 감기는 목소리, 스타일리시한 매력 등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이날 인터뷰에서 그런 모습을 찾아보긴 어려웠다. 선배 대장장이들을 우러러보며 치열하게 고민하는 견습공의 자세가 있었고, 미래에 불안해하는 20대의 모습도 종종 보였다.
"이 영화를 선택하고 연기하면서 바라는 건 딱 하나였던 것 같아요. '이종석이라는 아이가 연기 욕심이 있고, 연기를 하는 애구나'라고 봐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
이종석은 영민한 배우다. 평소에도 '남성 영화'에 관심이 많았지만, 자신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단다. 그러던 차에 '브이아이피'의 대본을 받아봤고, 한 치의 고민 없이 출연을 결정했다.
"남자 영화를 해보고 싶고, 해볼 기회가 있어도 제가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내가 어울릴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거기서 인상을 쓰고 담배를 들고 서 있을 때 과연 '관객, 시청자들이 절 어떻게 바라볼까?'라는 생각 때문에요. 쉽게 엄두를 못 냈죠. 하지만 '브이아이피'의 경우는 제가 가진 것들을 무기로 사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많은 살인마나 사이코패스 역할이 있었지만 조금 다르게 느껴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김광일은 북에서 온 VIP로, 여성의 가느다란 목선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 사이코패스 살인마다. 그간 이종석이 맡았던 캐릭터 중 가장 극적이고 강렬한 설정. 그러다 보니 그간의 필모그래피의 관성이 이어져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선한 역할을 많이 하다 보니까요. 악역을 맡으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분노를 일으켜야 하는데, 제가 본능적으로 대사 톤을 순화시키려고 하더라고요. 정의로운 주인공을 해오다 보니 익숙한 쪽으로 가게 되고… 그럴 때마다 박훈정 감독님이 잡아주셔서 흘러와서 잘 마칠 수 있었죠."
가장 잔혹한 장면으로 언급되는 프롤로그가 이종석의 첫 촬영이었다. 이종석은 "피를 많이 마주하다 보니 속이 메스껍고 하루종일 멍했다"면서도 "그만큼 강렬하게 나온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작품에 애착을 드러냈다. 적잖은 파장이 예상되는 수위의 작품에도 출연을 결심한 이유는 뭘까.
"'브이아이피'가 저에게는 돌파구 같은 작품이었어요. 예전에 작품을 할 때 슬럼프가 심하게 왔던 지점이 있거든요. 제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성향, 성격, 자아가 캐릭터와 대립하는 순간들이 많은 거에요. 이 캐릭터를 묘사하긴 하지만, 속으로는 괴로울 때가 있더라고요. 그렇다고 내가 대단한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배우도 아닌데 왜 이렇게 힘이 들까… 자꾸 거짓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죠. '브이아이피' 같은 경우는 완전히 나와 다른, 공감할 수도 없고 공감해서도 안 되는 캐릭터잖아요. 극과 극의 캐릭터를 하면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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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브이아이피'의 배우 이종석이 미디어펜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YG엔터테인먼트 |
천만 관객 가까이 끌어모은 영화 '관상'(2013)에서는 먼발치에서 선배들을 바라보며 배웠다. 하지만 이후 연기적 성장이 멈추기 시작하면서 걱정이 커졌고, 선배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어려웠던 소심꾼은 완전히 바뀌었다.
"성격이 워낙 내성적이라 예전에는 '선배님, 도와주십시오' 한마디를 못했어요. 이번에는 선배님들이 먼저 다가와 주셨고, 저도 그에 맞게 도움을 부탁드렸어요. 특히 김명민 선배는 후배의 질문을 그냥 넘기실 만도, 뭉뚱그려서 추상적으로 답해주실 만도 한데 원 포인트 레슨을 해주시더라고요. '이 신에서 이런 지문은 이런 표정을 써라', '이 포인트에서 웃고, 눈가 근육을 쓰면 그게 확대돼서 보일 거다'라는 식으로요. 실질적으로 연기할 때 쓸 수 있는 것들을 배웠죠.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요."
촬영 중 가장 힘들었던 점은 광일의 감정을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프롤로그에서 광일의 살인 장면이 나오지 않나. 어떤 감정인지 공감하지 못하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라며 "대본 지문에는 미소가 있는데, 이 미소의 의미는 도대체 뭘까 싶었다"고 밝혔다. 특히 박훈정 감독의 지시문에는 미소 하나에도 여유로움, 비릿함 등 종류가 많았다고.
"감독님이 디렉션을 주실 때도 '아메리칸 싸이코의 크리스찬 베일 같은 느낌 있잖아'라고 하세요. 뭔지 모르지만 일단 아는 척을 했죠. '네, 알아요' 하고.(웃음) 그리고 '여기서는 이빨 보이고 웃지 마', '한쪽 입꼬리만 웃지 마' 이런 식으로 디렉션을 주셨어요. 아무래도 감독님께서 직접 각본을 쓰셨으니 그렇게 구체적인 디렉션이 나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아무 설명도 안 해주시고 '그런 느낌 있지? 알잖아' 이럴 때가 있어요. 그럴 땐 난감한데 '알아요'라고 했죠."
이날 기자를 가장 놀라게 했던 건 이종석의 냉철한 자기분석, 어쩌면 자기 회의까지 이어지는 치열한 고민의 표정이었다. 그는 다작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며 "최대한 많이 소진하고, 소비해서 소멸할 것"이라고 말했다.
"작가님들은 마감날을 정해놓으면 머리가 빨리빨리 돌고 글이 나온대요. 그런 거랑 같은 맥락이에요. 지금 내가 갖고 있고 사랑받고 있는 것들로 연기를 계속 하다 보면 결국 소진될 거고, 시청자·관객분들이 궁금해하지 않을 거잖아요. 들어오는 대본이나 시나리오는 줄어들 거고. 그러면 저 스스로 새로운 걸 찾아내겠죠. 새로운 걸 찾아내지 못하면 소멸할 테니까. 그런 것들을 목표로 삼고 있어요."
'소멸하는 날'이 그리 먼 것 같지 않다는 이종석. 그럼에도 다작을 하는 이유는 연기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그는 "연기한 뒤 결과물을 보면 행복감을 느낀다"면서 "근데 연기를 하면 잘하고자 하는 열망과 열등감 때문에 괴로워지더라. 근데 결과물을 볼 땐 또 행복하다. 그게 반복이 된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20대를 생각해보면 정말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연기를 열심히 했어요, 여전히 잘하고 싶고… 연기 때문에 점점 괴로워지는데, 이종석한테 연기를 빼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요즘 고민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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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브이아이피'의 배우 이종석이 미디어펜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YG엔터테인먼트 |
이 시대 최고 청춘스타의 꼬리표에 맞는 그럴싸한 대작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선배 배우들이 많이 출연하는 작품의 작은 롤을 맡고 싶다고 밝혔다. 많은 사람들이 몰랐을 뿐 이종석에겐 늘 스포트라이트보다 연기에 대한 배움이 절실했다.
"선배들과 하는 작업이 확실히 재밌어요. 그리고 선배들에게 인생 연기를 듣는 것도 좋아요. 1년, 2년 연차가 쌓이면서 슬럼프도 있었을 거고,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하잖아요. 그런 것들을 극복했던 얘기를 듣는 게 너무 좋아요. 제 문제를 먼저 겪은 사람들이니까."
또래 배우 김우빈(29), 박서준(30)의 연기를 사랑하고 조진웅을 꼭 만나고 싶은 이종석이다. 쉬는 날에도 집에 콕 박혀 드라마만 보고, 동료 배우들의 연기를 비교분석하기에 바쁘다.
"같은 지문이나 대사를 줘도 각자 스타일에 대해서 해석하는 게 다 다르잖아요. 제가 드라마를 정말 많이 보는데, 남자주인공의 대사를 혼자서 따라 할 때가 많아요. '이 대사는 나라면 이렇게 표현했을 것 같다' 하고 보면 재밌어요. 그래서 또래 배우들 작품을 특히 찾아보게 돼요. 가장 최근에 본 작품이요? tvN '비밀의 숲'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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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브이아이피'의 배우 이종석이 미디어펜과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YG엔터테인먼트 |
즐겨보는 예능 프로그램은 MBC '나 혼자 산다'. 드라마를 보는 취미마저 일로 연결시키는 그에겐 유일한 즐길 거리가 아닐까 싶다. 이에 즉석에서 출연을 제안하자 지극히 집돌이스러운 대답을 내놓았다. "출연 제안 오면요? 고민은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전 할 수 있는데 보는 사람이 재미없을 것 같아서… 정말 가만히 있을 텐데.(웃음)"
이종석은 영화 '브이아이피' 개봉에 이어 수지와 호흡하는 SBS 수목드라마 '당신이 잠든 사이에'로 오는 9월 시청자들을 찾는다. 촬영이 삶의 전부였던 이종석은 요즘 동창들과 만나 어울리고, 일상을 찾는 연습을 하고 있단다. 특히 9월 14일 자신의 생일에 열리는 팬미팅을 한껏 고대하고 있다고. 자신을 아는 열 명만 모여도 그렇게 떠는 이종석이 팬들 앞에서는 완벽히 무장해제된다.
"아무런 대가 없이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이잖아요. 인터뷰도 1대1로 하면 굉장히 잘하는데, 많은 대상을 두고 말하는 자리에선 되게 힘들어하거든요. 아까도 열 분과 인터뷰를 하는데 너무 떨리더라고요. 제가 그래요. 그런데 이상하게 팬들은 '무조건적으로 내 편이야'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애틋하고, 거부감이 없어요. 그래서 해줄 수 있는 건 최대한 다 해주고 싶어요. 내 편들과 같이 있다는 느낌이 너무 좋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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