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 또는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의 대화'라고 정의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요한 징검다리다. 그럼에도 우린 때때로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로 스스로를 부정하는 우를 범하곤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 도발은 계속되고 있다. 이에 맞서는 유일한 길은 역사에 대한 올바른 앎과 이해일 것이다. '독도는 우리땅'이란 가수 정광태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사부(異斯夫)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이사부 장군은 경상북도 동부의 작은 부족국가 신라를 한반도의 주역으로 끌어올린 분이다. 또 다양한 종족을 하나로 통합해 한민족의 뿌리를 형성하게 했으며, 신라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은 위인이기도 하다. 독도에 대한 이해와 자긍심 고취를 위해 미디어펜은 이사부의 흔적을 찾아 나선 김인영(언론인)씨의 '이사부를 찾아서'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역사 탐방-이사부를 찾아서] 실직 군주①…오화리산성
삼척 오십천 하구 산성서 울릉도 우산국 정벌 전초기지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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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영 언론인 |
강원도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삼척(三陟)이 나온다. 삼척시는 서쪽으론 태백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동쪽으론 짙푸른 동해바다가 펼쳐진 아름다운 도시다.
삼척엔 태백에서 발원해 오십 굽이를 돌아 동해로 흘러드는 오십천(五十川)이라는 내가 흐른다. 강원도 동해안에서는 가장 긴 하천이다. 그 오십천의 하구에 오분동(梧粉洞)이라는 마을이 있다.
오분동에는 오십천과 동해가 만나는 곳에 야트막한 산이 하나 솟아 있다. 이름하여 고성산(古城山)이다. 해발 99m의 야트막한 이 산에는 신라시대에 쌓은 성터가 아직 남아 있는데, 고려시대엔 요전산성(寥田山城), 조선시대엔 오화리산성(吳火里山城)으로 불렸다. 이곳 지명이 오분동(梧粉洞)인 것은 한자 '吳'에서 음(音)을, '火(불)'에서 훈(訓)을 따온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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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화리산성 축약도 /자료=이효웅 제공 |
이곳이 신라 장군 이사부(異斯夫)가 울릉도를 우리 땅으로 만들기 위해 병력을 주둔시킨 성이다. 그 아래 오십천 하구에서 선단을 꾸려 동해 섬나라 우산국(于山國)을 정복하고, 그 부속도서인 독도(獨島)를 더 이상 '외로운 섬'으로 두지 않으려 '한국령(韓國領)'으로 만든 곳이다.
고성산 정상에 가면 삼척시장이 2008년에 세워 놓은 표지석이 수풀 속에 숨어 있다. 표지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삼척시는 오화리산성 아래에 '이사부 우산국 복속 출항비'를 세워 기념하고 있다).
"삼국시대 산성으로 신라 지증왕 13년(512년) 이사부(異斯夫)가 목우사자(木偶獅子)를 이용,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하던 곳이며, 고려 고종 때 몽고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곳 사람들이 지키던 곳으로 이때 이승휴(李承休)도 여기에 참여했다. 우왕 10년(1384) 토성을 쌓고, 삼척포진을 설치하여 왜구의 침입을 막았는데, 그 둘레가 1,876척, 성내에 샘이 하나 있었다. 조선 세조 때 감찰사 허종이 568척을 증축했고, 중종 15년(1520) 삼척포 진영은 이곳에서 정라진 육향산 밑으로 옮겼다. 유서 깊은 조국의 유적지 산봉에 표석을 세워 후세에 전한다."
필자의 이사부 추적은 이 자그마한 산성에서 출발한다. 오화리산성에서 이사부 장군이 수군을 양성했고, 그 군사력을 토대로 우산국과 그 해역의 독도를 우리 땅으로 만들고, 동해 제해권을 장악했다. 지증왕 이후 왜구의 출몰이 그친 것은 이사부 장군이 동해 패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신라는 남쪽의 가야를 치고, 소백산맥을 넘어 고구려, 백제를 공략하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세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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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화리산성의 기념비 /사진=김인영 |
이사부 이름이 역사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다.
"지증왕 6년(505년) 봄 2월, 임금이 몸소 나라 안의 주(州)․군(郡)․현(縣)을 정했다.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軍主)로 삼았다. 군주의 명칭이 이로부터 시작됐다."
— 「신라본기」(지증마립간 6년, 505년)
신라가 강원도 영동지역에 실직주를 설치하고 행정구역에 편입시키면서, 이사부를 파견했다. 그렇다면 '실직'이란 고을은 어떤 곳인가. 조선 중기의 문인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이렇게 썼다.
"진쥬관(眞珠館) 듁셔루(竹西樓) 오십쳔(五十川) 나린 믈이 태백산(太白山) 그림재를 동해로 다마 가니, 찰하리 한강(漢江)의 목멱(木覓)의 다히고져." (죽서루 저 아래 오십천 흘러내리는 물이 태백산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 가니, 차라리 저 아름다운 광경을 임금이 계신 한강의 남산에 닿게 하고 싶구나.)
조선시대 강원도 삼척은 진주(眞珠)라 불렸다. 지금도 삼척시 남양동에 조선시대 지명을 딴 진주초등학교가 있다. 강원도 관찰사로 근무하던 정철이 진주관에 들러 죽서루와 그 아래 흐르는 오십천의 절경을 임금에게 보여 주고픈 마음을 적은 대목은 한 편의 풍경화를 연상케 한다. 태백산에서 발원해 오십 굽이를 돌아 흐르는 오십천이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인 죽서루에 이르면, 천하의 절경을 이룬다. 정말로 진주처럼 아름다운 고을이다.
신라시대엔 실직悉直이라 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실직을 '사직'(史直)이라고도 했다. 지금도 오분동 옆에 사직동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실직→사직→삼척'의 음운 변화를 통해 실직의 옛 이름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오십천이 삼척 시내를 지나면 동해 바다에 도달한다. 오십천과 동해가 만나는 곳에 오화리산성이 있고, 그 산성이 이사부가 동해의 섬나라 우산국의 정벌을 준비한 전초기지로 추정된다.
삼척에선 이사부의 흔적을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시내 주요 도로엔 장군복을 입은 이사부 초상화가 곳곳에 걸려 있으며, 오십천 하구 삼척항을 지나 정라진 쪽 해안을 따라가면 이사부 광장이 나온다.
삼척시는 일찍부터 이사부 마케팅을 벌였다. '삼국사기'에 이사부 장군이 처음 부임하는 곳이 실직이고, 7년 후(512년)에 우산국을 정벌했으며, 독도를 영구히 우리 땅으로 만든 거점이 삼척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들어 이사부의 고장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삼척시는 2008년부터 매년 여름, 정라진 이사부 광장에서 이사부 축제를 열고, 사자 조형 깎기, 사자 탈춤, 전통무예 등의 행사를 갖고 있다. 또 삼척을 관통하는 7번 국도와 동해시와의 접경 구역엔 이사부를 상징하는 사자 석상을 세워 이사부의 도시에 진입했음을 알려 주고 있다. /김인영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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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화리산성 위치. /사진=김인영 |
[김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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