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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주진 영국 UCL 정치학 석사과정 |
부쩍 짧아진 해, 적잖이 차가워진 바람과 함께 어느덧 찾아온 11월의 첫날. 런던 유스턴 역에서 내려 신호등을 기다리던 필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맞은편 한 남성의 가슴팍에 달린 붉은 꽃의 장식물, 그리고 조금 걷다가 마주친 한 젊은 여학생이 착용한 비슷한 모양의 배지였다.
그 꽃의 의미와 장식물을 다는 이유를 몰랐던 필자는 단순히 런던에서 새롭게 부는 유행 정도일거라 생각했다. 예컨대 특정 운동을 지지하거나 또는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다는 상징물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 이틀,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면서 조금 이상한 점을 느꼈다. 어딜 가나 그 장식물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 말 그대로 '너무나도' 많았던 것이다. 금융가 근처의 근사한 정장을 차려 입은 직장인들, 동네에서 아기를 유모차에 태운 채 걸어가는 젊은 엄마, 병원 문을 나서는 한 노인, 그리고 옥스포드 서커스 근처에서 요란한 색깔로 머리를 염색하고 기타를 둘러멘 채 분주히 걷는 젊은이들 등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그 꽃을 볼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흥미가 생긴 필자는 그 장식물을 다는 이유를 찾아봤다. 그리고 인터넷에 비슷한 꽃 모양의 사진과 함께 나온 설명을 읽고 금세 필자는 숙연해졌다. 그리고 영국의 지난 전쟁의 역사, 특히 제이차세계대전 당시 보여준 영국 시민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됐다.
영어로는 리멤버런스 포피(Remembrance Poppy),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기억의 포피' 정도가 될 것이다. 1921년부터 달기 시작한 이 붉은색 꽃 모양의 장식물은, 바로 국가를 위해 전쟁에서 목숨을 바친 이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제일차세계대전이 끝난 11월 11일과 가장 가까운 일요일을 영국은 현충일(Remembrance Sunday)로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현충일이 있는 11월 한달 동안 영국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저 추모의 붉은 꽃을 가슴에 달고 다니는 것이다.
사실 어느 나라에나 있는 문화일 수도 있고, 또 우리나라도 매년 현충일과 6.25전쟁 발발일이 있는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지정해 추념하고 있다. 하지만 런던의 시내에서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수많은 시민들 가슴 위의 리멤버런스 포피는 생각을 조금 달리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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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연평도 포격 사건이 7주기를 맞이한다. 동료들과 민간인, 나아가 나를 지키고 가족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포격 속을 달렸던 용사들의 공화정신을 기억한다. 우리 사회가 과연 연평도 포격 사건을 제대로, 올바르게 기억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사진=연합뉴스 |
어쩌면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 있는 전몰장병에 대한 추모와 기억의 문화가 젊은 층에서부터 노년층까지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단 놀랍고, 또 그것이 이념이나 가치관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본인의 '깨어있음'을 내세우기 위한 과장된 표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군가로부터 좀 유별나다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요란스럽게 느껴지지도 않는 저 장식물이 하나의 대중적 문화로 자리잡았다는 데에서 우리 사회와의 이질성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시점이 11월이라는 데에서 한번 더 그들의 리멤버런스 포피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우리에게도 절대 잊어선 안 될, 11월의 아픈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2010년 11월 23일에 있었던 연평도 포격이다. 평화롭고 고요한 어느 섬 마을에 떨어진 170여발의 포탄은 우리의 귀한 젊은 장병 2명과 무고한 민간인 2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정전협정 이후 북한이 최초로 민간인을 사망케 한 연평도 포격은 당시 김정일 체제의 잔혹하고 야만적인 민낯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천안함 폭침이 북한의 소행이 아닐 것이라는 황당한 음모론으로 뒤덮여 있던 2010년의 끝자락에 일어난, 우리가 처한 분단의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뼈아픈 역사이기도 하다.
올해로 연평도 포격 7주기를 맞는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과연 연평도 포격 사건을 제대로, 올바르게 기억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연평도 포격 사건을 계기로 국방부 장관을 맡아 연평도에서의 대규모 포격 훈련을 지시해 북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김관진 장관이 구속된 것이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말로는 제재 국면이라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북한과의 대화와 협력에 매달리는 이 정부 분위기 속에서 연평도 포격 사건에 대한 깊은 추모와 올바른 기억이 우리 사회에서 널리 퍼지기를 기대하기는 다소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일까, 런던의 시민들의 리멤버런스 포피가 필자에게는 더 아프고 먹먹하게 느껴진다. 저마다 가슴의 꽃을 달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기억하려는 모습에서 분명 '전쟁을 기억하려는 영국'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우리 사회에서는 그러한 추모와 기억의 문화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져가는 것 같다. 그리고 정확히 그만큼 '전쟁을 잊어가는 한국'을 볼 수 있다. /윤주진 영국 UCL 정치학 석사과정
(이미 '리멤버런스 포피'는 언론 등을 통해 우리나라에도 자주 소개된 바 있고, 영연방 국가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것이기도 하다. 꽃의 의미와 유래는 이미 좋은 글들을 통해 다수 소개돼있으니, 이 글에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윤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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