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원 높은 성찰의 작업 없이 2018년의 활로는 없다
어려운 세월, 마음도 어수선하다. 2017년이 저물고 있지만, 새해 전망도 밝지 못하다. 이렇게 뒤숭숭할 때 마음을 다잡기 위해 연속 칼럼 '연말연시, 시로 읽는 대한민국 자화상'을 마련했다. 상하 두 편으로 된 글인데, 시 장르 특유의 함축미 해석을 통해 우리의 상황을 성찰해보자는 뜻이다. 거론할 시 작품은 30년 전 베스트셀러 <마주 보기>에 수록된 독일 시인 에리히 케스트너의 '바우리히 중사'와, 저널리스트 출신의 80세 시인 강위석의 '맥베스'와 '나는 우파'(문예지 <문학 공간> 수록) 두 편이다. 오늘 첫 회다. [편집자 주]

'연말연시, 시로 읽는 대한민국 자화상'-<상>

   
▲ 조우석 언론인
시집 <마주 보기>는 1988년 국내에서 잠시 베스트셀러로 떴던 시집이다. 그 책 저자 에리히 케스트너(1899~1974)가 독일문학사에 남는 굉장한 시인도 아니지만, 뒤늦게 한국 서점가에서 떴던 걸 보면 대중성은 무시못한다. 당시 나왔던 시집 뒤에 이런 카피가 보인다. 

"현대인의 메마른 삶에 맑은 바람을 수혈하는 Dr. 케스트너의 구급처방 시".

이런 식이다. '호주머니가 텅텅 비었을 때', '정치에 식상했을 때', '사랑을 잃었을 때' 등등의 경우에 맞춤형의 짧고 쉬운 시를 제공하는 시집이다. 케스트너 본인도 문학이 동시대인의 아픔을 보듬어주길 원했고 쉽고 친숙한 일상어로 시를 썼다. 까다로운 상징이나 비유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때문에 번역해도 술술 읽히는 게 특징인데, 케스트너의 시집을 안 것은 지난 가을 한 모임에서였다. 7~8명이 모인 자리에서 연장자 한 분이 가방에서 시집 한 권을 꺼내더니 그 중 한 편을 낭송해줬다. 좌중이 완전 조용해졌다. 그게 오늘 소개할 '바우리히 중사'인데, 나의 경우 듣는 순간 마음이 크게 동했다. 그래서 헌책방에서 그 시집을 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다른 출판사에서 새 번역으로 얼마 전에 나온 걸 구입하는데 성공했다. 안타깝게도 새 시집에는 '바우리히 중사'가 수록되지 않았지만, 요행히도 그날 그 분이 들고 나왔던 시집을 폰카로 찍어뒀기 때문에 오늘 소개할 수 있다. 내용은 쉽다. 예전 독일의 얘기이지만, 군대 훈련병 시절 논산훈련소의 살모사 같이 무서웠던 조교 한 명을 떠올리면 딱 좋은 스토리다.

   
▲ 독일 시인 에리히 케스트너와 시집 '마주 보기'.

바우리히 중사

그가 우리 중대로 배속되어 온 것은
그 일로부터 여섯 달 전입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받들어 총."
"엎드려 쏴."
"거총."
"발사."

…………

누군가 몸의 균형을 잃고
넘어지기라도 하면
중사는 이를 갈며
매 마른 땅에다 침을 뱉습니다.
"이런 병신 같은 원숭이새끼!"
"대가리 박아!"
그는 황무지로 우리를 끌고 가서
무릎과 팔꿈치에 피가 배어나올 때까지
우리를 엉금엉금 기어 다니게 했습니다.
 
우리는 우선 인간에 대한 증오라는 것을
그에게서 배웠습니다.
 
어느 날인가 나는 그에게
잘못 걸려들었습니다.
"멍청한 놈 같으니라구."
"거기, 벌벌 떨고 있는 원숭이새끼!"
그는 나에게 쪼그려 뛰기 일천 회를 시키며
뒤에 앉아 한가롭게 물었습니다.
"네 손에 지금 장탄된 총이 있다면 즉시 나를 쏘겠지?"
"그렇습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고
그는 하늘을 향해 뻐꾸기처럼 웃었습니다.
 
그를 알던 사람은 그를 잊지 않습니다.
그는 침을 뱉고, 고함을 지르고, 욕을 했습니다.
중사 바우리히를 우리는 짐승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야기 시'처럼 좔좔 읽히니 해설이고 뭐고가 필요없을 것이다. 굳이 이렇게 평범한 시 작품을 소개하는 이유가 뭘까 궁금하실 수도 있을텐데, 묘미는 뒤쪽의 반전에 있다. 즉 이 시는 중사 바우리히로 상징되는 '나쁜 인간'으로부터 우리가 받았던 상처와 아픔을 말하고, 그에 대한 증오감을 불러일으키려는, 그런 작품이 아니다. 그 속내를 극적으로 뒤에서 이렇게 보여준다. 

그를 생각하면 지금도 내 마음은 찌르는 듯 아파오고
내 심장은 놀란 듯 두두둑거립니다.
견디기 힘들 만큼 어려운 일,
힘겨운 일이 생기면
나는 언제나 바우리히 중사를 생각합니다.
 
참호 속으로 날아 들어온 수류탄을
몸으로 덮어 우리를 살리고
그는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여기까지가 시의 전문(全文)이다. 젊은 시절 그토록 고통을 줬던 바우리히 중사인데, 시의 화자(話者)는 왜 훗날 "견디기 힘들 만큼 어려운 일, /힘겨운 일이 생기면" 왜 그를 생각하는가? 군대 훈련 중에 수류탄 사고가 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이 바로 등장한다. 시 작품이기 때문에 구체적 진술이 굳이 필요 없으며 해석은 독자들에게 열려있다.

   
▲ 2017년은 대한민국에 있어서는 정녕 부끄러운 한 해였다.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탄핵과 함께 각종 사고로 얼룩졌다. /사진=연합뉴스

어쨌거나 그때 우리들이 짐승으로 여겼던 바우리히가 몸을 던져 산화했고, 젊은 훈련병들을 구출하는 감동적인 모습이 등장한 뒤 시는 바로 마무리된다. 군더더기 설명이 없기 때문에 시를 읽은 우리들은 멍한 느낌마저 갖는데, 바우히리가 본래부터 나쁜 놈이라고 봐도 되고, 그가 군사교육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악역을 맡았다고 봐도 된다.

문제는 2017년 한국 상황에서 케스트너의 시 '바우리히 중사'는 아주 절묘한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나의 경우 바우리히 중사는 올해 등장한 특정 정치인 한 명을 연상시켰다. 한국 사회에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숱한 과속질주와 역주행 끝에 국가정체성에 대한 혼란마저 불러일으킨 그 당사자 한 명 말이다.

그가 누구인가는 굳이 언급치 않아도 가늠하실텐데, 바우리히는 스스로 산화했지만, 그 정치인이 앞으로 그런 역할을 자임할 것 같진 않다. 그럼 우리 스스로가 역사의 대반전을 내년 한 해, 아니 앞으로 4년 동안 일궈내야 옳다. 반전이란 그 정치인이 만들어낸 지금의 혼란과 아픔을 우리가 다 소화해 그걸 내일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크게 정리해보자면, 그건 건국 이후 대한민국에 주어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위대한 가치를 재정립하는 문제라고 나는 본다. 내년으로 건국 70주년을 맞지만, 우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에 의해 선물로 받았을 뿐이다. 냉정하게 말해 우리가 힘쓰고 땀 흘려 국민적 합의로 이룩하고 가꿔온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쉽게 여기고 소홀해 다뤄왔기 때문에 김대중-노무현의 두 좌파 정부 시절 이 위대한 가치가 그토록 쉽게 훼손당해 못 본 척 방치를 해왔다. 그리고 이번 새 정부에 의해 그게 다시 송두리째 흔들려도 누구 하나 제대로 된 문제제기를 못하고 있다. 내년 한 해는 대한민국 역사의 분기점이 될 것이다. 

이렇게 훼손당한 대한민국 끝내 쓰러지고 마느냐, 아니면 대반전의 힘을 모아 권토중래를 하는 계기를 만드느냐? 물론 힘든 도전이 분명하다. 힘에 부칠 때마다, 인간에 대한 증오로 입에서 단내가 날 때마다 에리히 케스트너의 시 '바우히리 중사'의 반전을 떠올릴 것을 나는 제안한다. /조우석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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