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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주진 영국 UCL 정치학 석사과정 |
병원이 특히 북적거리는 때가 있다. 독감 또는 환절기로 인해 감기 환자가 많아지거나, 감염성이 높은 질병이 유행하는 경우 자연스럽게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 몇 시간을 기다려야 겨우 진료를 받을 수 있다거나, 혹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평소 잘 가지 않던 다른 지역의 병원을 찾아야 하는 경우도 한국에서 어렵지 않게 경험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의 영국의 사정은 이보다 조금 더 심각해 보인다. 작년 크리스마스 이후 각 매체마다 쏟아내는 톱 뉴스들 중 상당수가 이른바 '영국 무상의료의 겨울 위기(NHS winter crisis)'를 다루고 있다. 도대체 영국의 병원들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상황은 대략 이렇다. 겨울철이 찾아오자 병원을 찾는 영국 국민들이 갑작스럽게 늘어났고, 이 같이 급증한 수요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결국 정부 당국이 '특단의 조치'를 꺼내들었다. 5만 5000여건에 달하는 수술이 연기되거나 취소될 가능성마저 제기되고, 급하지 않은 환자의 경우 진료를 거부 당하거나 하루 종일 순서를 기다려야 했던 사례가 언론을 통해 다수 소개되면서 영국 무상의료(NHS)를 둘러싼 전 사회적 논쟁에 불이 당겨진 것이다.
결국 영국의 메이 총리와 헌트 보건부 장관은 대국민 사과를 해야만 했고, 야당은 물론 여당 내부에서도 질타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메이 총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NHS는 겨울철 위기에 잘 대비되어 있다"고 말했지만 여론은 싸늘하기만 하다. 무상의료에게만 겨울 위기가 찾아온 것이 아니라, 보수당 정권에도 겨울철 위기가 찾아온 듯하다.
그런데 이처럼 겨울철마다 반복되는 무상의료의 위기가 당장의 해법을 찾기란 매우 어려워 보인다. 일단 그 원인에 대해서부터 시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는 NHS에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해 공급을 확대하고 강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우파는 무상의료 체계 자체가 가진 근본적 한계를 지적하면서 보다 효율적이고 경쟁적인 의료 체계를 도입하고 책임있는 의료 소비를 이끌어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 가운데 몇가지 명확한 사실들이 있다. 일단 무상의료 체계가 처음 시작된 1948년부터 지금까지 늘 재정 적자와 공급 부족이 문제가 되어 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앞으로 닥쳐올 고령화와 의료수요 급증은 이러한 위기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며, 막대한 예산을 추가로 쏟아 붓더라도 이러한 위기가 또 닥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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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케어 재정문제가 지난달 24일에 이어 31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집중적으로 제기됐다. 사진은 문재인 대통령이 8월9일 서울성모병원을 찾아 임기 내 30조6000억 원을 투입해 모든 질병에 건강보험 혜택을 부여하는 정책을 발표하는 모습./사진=청와대 제공 |
시장에서의 경쟁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지 않고 대부분의 예산을 국민 세금에 의존하는 무상의료 체계가 이른바 '관료제의 비효율성'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는 점, 그리고 '공짜'라는 점 때문에 국민들이 과도하게 무상의료 서비스를 많이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도 크게 이견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상의료에 대한 개혁은 정치인으로서는 매우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사안이다. 이미 무상의료 체계에 완전히 익숙해져 버린 국민들 입장에서 누군가가 만약 무상의료 혜택을 축소하거나 국민이 내야 할 비용을 높이자고 주장한다면, 이는 곧바로 '정치적 사망'으로 이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영국병을 치료하고 책임성 있는 재정 운용을 그 누구보다도 중시했던 마거릿 대처 총리마저도 집권 시절 NHS의 예산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복지는 한번 도입이 되고 나면 다시는 축소하거나 폐지하기 어려운 '비가역성'을 갖고 있다. 무상의료가 과연 정당한 것이냐의 질문과는 별개로, 이처럼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복지 정책을 개혁하고 수술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번 무상의료의 '겨울 위기'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만약 영국 정부가 무상의료 제도의 비효율성과 방만성을 조기에 개혁했고, 국민들이 부담해야 할 비용을 점차적으로 높임으로써 보다 책임있는 의료 서비스 사용을 유도하는 데 성공했더라면 이처럼 겨울철마다 무상의료가 위기를 걱정해야 했을까. 어쩌면 정답은 너무나도 빤히 나와있는데, 정치적 부담 때문에 섣불리 시도하지 못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비가역성을 가진 복지 정책에 대해 정치권이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될 이유다.
2018년 새해 예산 중 복지에 투입될 예산의 비중이 34%에 달한다고 한다. 처음으로 3분의 1을 넘어선 것이다. 게다가 복지예산 규모 자체의 증가율은 12.9%로 역대 최대 증가율을 기록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복지의 규모는 엄청난 속도로 커지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걷잡을 수 없이 몸집이 커지는 가운데, 과연 복지의 비가역성에 대한 고민이 얼마나 있었는지 의문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도입된 복지 정책 중 만약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판단될 경우 이미 혜택을 입고 있는 국민들이 있는 가운데 과연 해당 정책을 폐지할 수 있을까.
이미 우리나라도 위기의 징후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과도한 복지 정책 남발로 재정이 악화되고, 이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국민적 저항에 부딪쳐 결국 개혁이 좌절되는 그리스와 같은 사례가 우리나라에서도 현실화 될 수 있다는 점을 정부와 정치권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윤주진 영국 UCL 정치학 석사과정
[윤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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