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박정희 이름 뺀 <대한민국 설계자>가 문제
조중동이 띄우자 대한민국역사박물관도 난리법석
   
▲ 조우석 언론인
지난해 나왔던 단행본 중 가장 마음에 걸렸던 현대사 책이 <대한민국의 설계자들>(김건우 지음, 느티나무책방 펴냄)이었다. 부제가 '학병 세대와 한국 우익의 설계자들'이라서 눈에 확 띠였다. 오래 전부터 좌편향으로 악명 높은 출판계가 모처럼 멀쩡한 책 하나를 펴냈나 싶어 반가운 마음으로 구입했는데, 내용을 확인하고 경악했던 게 이 단행본이다.

'한국 우익의 기원'이라고 해놓고 나서 놀랍게도 건국과 부국의 주인공 이승만과 박정희는 단 한 줄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곤 잡지 <사상계> 그룹의 주인공인 장준하와 김준엽 계열의 인물 수십 명으로 채웠다. 김교신, 류달영, 함석헌, 김수환, 강원룡, 지학순 등이 그들이다.

학문의 이름 아래 건국·부국의 역사를 작살내는 무서운 음모의 일환이다. 문제는 그의 글이 A급이다. 각 인물들의 짧은 평전을 겸하고 있고 내용이 밀도가 제법 있다. 단 그들을 대한민국의 설계자라고 강변하는 모습에서 할 말을 잃을 지경이다. 저자는 서울대에서 학위 받고 현재 대전대 교수로 있다는데 지성사-문화사 연구에 재능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책 띄운 조선-문화 기자들의 바보짓

하지만 방향이 잘못된 사람이다. 몹쓸 대학 분위기가 멀쩡한 사람 하나를 망가뜨린 셈이다. 이 나라 인문사회과학이 좌편향으로 망가졌다는 걸 나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지만, 그건 1980년대 운동권이 대학 아카데미즘을 파고들어 이른바 학술운동이란 것을 형성하면서 생긴 부작용이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했던 진지론의 전략대로 문화-언론-교육이 좌익에게 점령당한 것은 물론 급기야 학문 자체가 망가진 꼴이다. 살펴보니 저자(68년생)와 나는 띠동갑인데, 분노와 애정이 엇갈렸다. 틈을 내 비판적 서평을 쓸까 생각하던 차에 깜짝 놀랄 일이 거푸 생겼다.

우선 조선일보에서 김건우를 2017년 올해의 저자 10명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이 나라의 기자들이 책을 안 읽어보고 멋대로 장난을 치고 있거나, 읽어도 판단을 못하는 중대 사태란 뜻이다. 더 놀랍게도 문화일보는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을 '올해의 책 10선(選)'에 뽑기도 했다. 한겨레-경향신문이 그런 게 아니라 이른바 조중동신문이 그 꼴이다.

대한민국을 교묘한 방식으로 부정하는 책과 저자를 띄워주는 게 이 나라 주류 언론이 하는 짓이다. 사회 여과 기능은 물론 이념-사상에 대한 판단능력이 무너졌다는 증거인데, 더 놀랄 일은 다음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펴내는 저널 <현대사 광장> 10호에 이 책 서평이 또 실렸다.

   
▲ 김건우 대전대 교수가 쓴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사진 오른쪽)에는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가 한 줄도 등장하지 않는다. 1980년대 운동권이 대학 아카데미즘을 파고들어 이른바 학술운동이란 것을 형성하면서 생긴 부작용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펴내는 저널 <현대사 광장> 10호(사진 왼쪽)에는 이 책 서평을 실렸다. 현대사를 왜곡하는 책과 글이 공식 저널에 실린다는 건 충격적인 일이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현대사 전문 연구-전시공간이 그 박물관인데, 내용을 보고 경악했다. 서평은 두 꼭지인데, 우선 저자 김건우가 '내 책을 말한다'는 코너에서 장황한 자기 책 소개를 한 뒤, 제3자가 쓴 별도의 서평까지 실었다. 다음은 김건우가 '내 책을 말한다' 코너에서 언급한 대목이다.

"극우 보수 세력은 언제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좌파를 만들어낸다.…그런 점에서 나는 오늘날 현실정치에서 좌니 우니 하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을 대게 불순한 의도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책의 부제에서 '우익'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도 역설적으로 그런 뜻을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이다.”(150쪽)

극우라는 표현을 남발하는 습관부터 걸린다. 그건 학문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닌데, 이 나라에 극우가 존재하긴 하던가? 더욱이 존재하지 않는 좌파를 만들어내 이념논쟁의 말썽을 부리는 건 우파이고, 그게 "불순한 의도"에서 나온다니 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일까? 김건우의 책을 다시 들여다보니 책 뒤에 이런 대목이 수두룩하다.

일테면 해방 후 정치사에서 "중도 노선 정당조차 살아남은 적이 없다"고 그는 표현했고, 때문에 정당사란 "우익과 보수를 가장한 극우 정치세력과, 그냥 우익들 간의 이합집산과 대립의 정치사"(274쪽)란 단정이 등장한다.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우익은 유죄이며, 중도나 좌익만이 선하다는 사고방식이다. 나는 안다. 그게 대부분 인문사회학자들이 갖고 있는 태도다.

반공은 안 되고, 촛불혁명은 찬양하라?

박치현(충남대 강사. 사회학)이 쓴 서평 '한국 현대사를 다시 쓸 수 있을까?:'다른' 우익 찾기'도 마찬가지다. 그의 논지에 따르면 우익 내에는 반공주의와 자유주의가 공존한다. 그런 편의적인 구분법을 구사할 순 있겠지만,직후 촛불혁명 찬양으로 치닫는 마무리가 캥긴다.

"결국 이 책(<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이 내리는 결론은 반공주의나 극우 국가주주의가 아닌 자유주의를 건져내라는 메시지로 해석된다.…제대로 된 자유주의를 실행하는 세력이 정통 우파이며, 어쩌면 작년의 촛불혁명은 제대로 된 자유주의를 하라는 국민들이 의지가 아니었을까?…만일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반공주의적 국가주의는 주된 게임의 룰이 될 수 없으며,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는 정치문화가 형성될 것이다."(161쪽)

이게 무슨 얘기인가? 반공은 이제 간판을 내리라는 뜻이 아닐까? 헌법 4조에 명문화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말이 있고, 그게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를 말하는 사상과 이념의 기초를 말해주는데, 그걸 치워버리자는 다분히 위헌적 담론을 이 나라 학자들은 지금 마구 떠들어대고 있다.

사실 저자 김건우는 "우익과 보수를 가장한 극우 정치세력"에 대한 비판에 몰두하고 있고, 서평자 박치현은 "반공주의적 국가주의"를 코너로 내몰고 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세상이 어지럽고, 촛불 좌익혁명으로 어수선하더라도  아카데미즘의 엄정함은 지켜져야 옳은데, 이건 아니다.

정권이 바뀌고, 박물관장이 좌파로 바뀌었더라도 현대사를 왜곡하는 책과 글을 공식 저널에 실을 순 없다. 아니 그건 특정 연구자와 책임자의 차원을 떠난다. 정말 유감은 인문사회과학이 거대한 허위의식의 덩어리로 전락했고, 학자란 위인들이 관념의 사치를 즐기는 얼간이로 변질된 점이다.

한국사회는 언론-학문 등 지식정보의 생태계 오염이 실로 큰 문제인데, 드디어 최악까지 왔다.  영국의 역사학자 폴 존슨은 "폭정 중에서 최악은 사상-관념이 지배하는 정치"라고 했지만 한국사회는 그 전형이다. 그렇다면 둘 중의 하나다. 이민을 떠나거나, 대권을 잡아 이 나라를 바로 잡는 일에 나서거나…. 요즘 나는 그걸 진지하게 검토 중이다. /조우석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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