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준의 골프탐험(7)- 넘치는 여백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화사한 꽃들이 만발하고 녹음이 짙어지는 골프시즌이 돌아왔다. 겨울동안 '밭'을 열심히 갈아온 주말 골퍼들을 설레게 하는 골프 시즌을 맞아 국내 최고의 골프칼럼니스트인 방민준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의 맛깔스럽고 동양적 선(禪)철학이 담긴 칼럼을 독자들에게 배달한다. 칼럼에 개재된 수묵화나 수채화는 필자가 직접 그린 것들이어서 칼럼의 운치를 더해준다. 주1회 선보이는 <방민준의 골프탐험>을 통해 골프의 진수와 골퍼의 바람직한 마음가짐을 가다듬기 바란다.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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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 |
‘골프를 보면 볼수록 인생을 생각하고, 인생을 보면 볼수록 골프를 생각하게 한다.’ (골프 평론가 헨리 롱허스트)
‘골프는 생각할 시간이 너무 많고 또 생각해야 할 것도 너무 많다. 골프는 인생 자체보다 더 인생 같은 것이다.’ (미국의 경영컨설턴트 데이비드 누난)
‘골프코스는 머물지 않고 가능한 한 빨리 지나가야 할 덧없는 세상살이 그 모든 것의 요약이다.’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외교관 장 지라두)
‘내 기도가 전혀 먹히지 않는 곳이 바로 골프장이다.’ (복음전도사 빌리 그래함)
‘골프는 세상에서 플레이하기는 가장 어렵고 속이기에 가장 쉬운 게임이다.’ (프로골퍼 데이브 힐)
골프와 관련된 어록들을 보면 골프가 보통 스포츠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간파하게 된다. 그리고 골프의 세계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그 깊이와 넓이가 무한하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된다. 위에 든 예처럼 알려진 골프 정의들은 유명 인사들이 남긴 것이지만 골프에 관한 한 누구나 할 말이 많다.
아무리 골프서적을 많이 읽었다고 해도 골프 구력이 늘어가면서 골프에 대해 새로이 하고 싶은 말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이미 알려진 골프의 정의들만 모아도 몇 권의 책을 만들고도 남을 터이지만, 앞으로 새로이 골프를 배우는 사람들 역시 나름대로 골프를 정의하려 들 것이 틀림없다. 이는 골프의 불가사의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골프를 이해하기 위해선 골프가 왜 다른 스포츠와 다른가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 골프를 에워싸고 있는 두터운 껍질을 깨고 들어가 골프의 핵심에 접근하는 지름길이다.
골프가 다른 스포츠와 다른 핵심은 골프에 소요되는 시간과 공간에 여백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이다. 골프는 그림에 비유하면 동양화다. 서양화는 여백이 없이 색으로 채워지지만 동양화는 여백이 많다. 동양화의 묘미와 깊이는 바로 이 여백에 있다. 골프 역시 틈이 너무 많다. 한번 라운드 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대략 4시간으로 잡을 때 실제로 샷을 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개인의 스윙 빠르기나 성격에 따라 차이나겠지만 샷을 한번 날리는데 길어야 3초 정도 걸린다고 보면 80타를 치는 골퍼라면 240초, 즉 4시간 걸리는 라운드에서 스윙하는 시간은 기껏 4분에 불과한 셈이다. 나머지 3시간56분이 틈인 셈이다. 샷을 한 뒤 담소하며 이동하고 다음 샷을 준비하는 데 걸리는 이 시간이 바로 골프의 틈이다.
골퍼가 직면해야 하는 공간 역시 여백투성이다. 골퍼가 한 라운드를 도는 공간은 다른 스포츠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리고 모두에게 펼쳐진 공간이지만 실제 이용하는 공간은 개인마다 천차만별이다. 여기에 골프의 불가해성이 있다. 골프는 바로 이 모든 틈과의 싸움이다. 함께 플레이하는 동반자와의 거리도 길어졌다 짧아졌다 하며 수많은 공간을 만든다. 플레이를 펼쳐야 할 공간 역시 길고도 넓다. 샷과 샷 사이에도 틈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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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프가 다른 스포츠와 다른 핵심은 골프에 소요되는 시간과 공간에 여백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이다. 골프는 그림에 비유하면 동양화다. 서양화는 여백이 없이 색으로 채워지지만 동양화는 여백이 많다. 동양화의 묘미와 깊이는 바로 이 여백에 있다./삽화 방민준 작 |
이런 시간적 공간적 틈에 온갖 상념이 피어오른다. 지난 홀에 대한 아쉬움과 실망감, 멋진 샷을 날린 뒤 똑 같은 샷을 날리고 싶은 욕심, 라운드중인 동반자 개개인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 경쟁자의 플레이에 따른 마음의 흔들림,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나쁜 징크스 등 여름 하늘에 뭉게구름 피어오르듯 온갖 잡념이 바로 이 틈에서 피어난다. 아무리 골프기술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이 빈틈을 다스릴 줄 모르면 골프를 제대로 즐길 수 없다.
이런 광활한 시간과 공간의 틈을 유랑하는 것이 골퍼다. 동반자 중에는 선의의 동반자도 있고 적대적 동반자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모든 결정은 스스로 내려야 하고 그 결과는 자신의 몫이다. 골프에 내재된 시간적 공간적 틈을 이해하고 다스릴 줄 모른다면 아무리 기량이 탁월한 골퍼라 해도 골프를 제대로 즐길 수 없다. 거의 무한정으로 널린 시간과 공간 속을 유유자적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바로 골퍼가 갖추어야 할 최상의 덕목이다.
이런 골퍼의 능력은 마음 비움에서 나온다. 골프고수들이 끝없이 강조하는 ‘마음을 비워라’는 충고는 ‘골프를 제대로 즐기는 여유를 가져라’는 뜻의 다른 표현이다. 수도권의 어느 골프장에 가보면 ‘허심적타(虛心適打)’라는 글이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골프에서 마음 비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마음을 비운다는 일이 지난하다. 선사(禪師)들도 도달하기 힘든 허심의 경지를 스코어나 돈을 좇는 보통 골퍼가 다다른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긴 하다. 그러나 평소에 몇 가지 원칙을 세워 몸에 익히면 자신도 모르게 허심의 경지를 경험할 수 있고 전혀 새로운 골프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다.
우선 골프란 결코 적대적 게임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재미를 위해 내기도 하고 승부를 가리려 들지만 골프란 본질적으로 스스로가 자신의 수준에 맞는 플레이를 하면서 심판도 하는 자립독행(自立獨行)의 게임이다. 스코어에 관계없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게임을 펼칠 수 있다면 최상의 골퍼다.
물론 자족의 게임을 펼치려면 부단한 마음의 수양이 필수이지만 호흡만 내 페이스대로 할 수 있어도 기대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호흡은 생명의 근원이다. 거친 호흡은 마음의 바다에 격량을 일으키고 행동을 거칠게 몰아간다. 안정된 호흡은 마음을 호수처럼 잔잔하게 해 관조의 상태로 만들어주고 이런 상태에서 나온 행동은 진지하고 자연스럽다.
골프에서도 호흡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뒤늦게 헐레벌떡 골프장에 도착한 사람의 티샷이 십중팔구 실패하는 것은 바로 거친 호흡과 이에 따른 조급함 때문이다. 18홀을 도는 동안 골퍼들은 자신의 호흡을 놓칠 위기를 수없이 맞는다. 그때마다 호흡을 놓치면 몸과 마음이 격량에 휩싸여 곤두박질을 거듭하고 마음 속에선 활화산이 분출한다.
물을 채운 컵을 들고 물을 쏟지 않으면서 라운드 한다는 자세로 몸과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을 때 스코어는 슬그머니 물러나고 대신 동반자의 마음이 보이고 이름 모를 들꽃이 눈에 들어오는가 하면 물소리 새소리 풀벌레소리가 귀에 내려앉는다. 골프채를 잡은 이상 이런 경지에는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