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신화, 인간의 삶 모방 한차원 높은 영적행위 보여줘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 (13) - 고대 그리스인의 사유와 삶의 지주 분석한 토머스 볼핀치(1796~1867)의 <그리스 로마 신화>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신과 영웅의 희로애락, 그리스 신화, 각박한 현대인의 삶을 영감과 감동으로 채워 줄 마르지 않는 샘

청소년기에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아마 단군신화 못지않게 헤라클레스나, 아킬레우스, 아프로디테, 헬레네가 등장하는 신화의 흥미로운 한 두 대목쯤은 누구나 알고 있을 듯싶다. 신화를 직접 읽지 않았더라도 미술작품과 조각품, 영화나 뮤지컬, 문학작품 등을 통해 그리스 로마 신화의 단편들을 접하는 기회는 많다.

2000년에서 3000여 년 전의 오랜 옛이야기인 그리스 로마 신화가 서양 문화와 문명에 끼친 영향은 넓고 깊다. 오랜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모든 시대의 사람들의 인식 속에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인류 문명의 꽃을 찬란하게 피워냈던 그리스인들의 행동과 사유, 삶을 지배했던 그리스 신화는 그리스와 로마의 위대한 작가들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다루어졌다. 그리스 신화는 헤로도토스의 <역사> 속에, 그리고 위대한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의 곳곳에서 이야기의 배경이 된다.

어디 그뿐인가. 호메로스와 쌍벽을 이루던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 는 신화의 주인공들인 신들의 가족 계보를 소상히 밝히고 있다. 그리스 신화는 로마 시대의 작가 아폴로도로스의 <그리스 신화>와 오비디우스의 <변신>, 그리고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속에 중첩되어 수록되었다.

   
▲ 아킬레우스의 죽음<아킬레우스의 죽음>, Pierre Paul Rubens(1577–1640), 1630-1632 作

그리스 신화는 그리스를 넘어 로마로 이식되어 로마 신화로 치환되고 확장되었다. 또 로마를 넘어 장구한 세월동안 중세 유럽인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유럽의 12~13세기는 ‘오비디우스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그리스 신화의 열풍이 대단했다. ‘유럽(Europe)’의 명칭 자체가 제우스의 사랑을 받은 페니키아의 왕녀 ‘에우로페(Europe)’의 이름에서 나온 것도 작은 인연이 아니다. 유럽의 모든 문학작품은 그리스 신화 그 자체에서 기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 신화의 가치를 근대인들에게 다시 각인시킨 사람은 미국 보스톤 출신의 토머스 볼핀치(1796~1867)였다. 그는 1855년에 <전설의 시대,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The Age of Fable, or Stories of Gods and Heroes)>를 출판하여 같은 해 출판된 휘트먼(1819~ 1892) 시집 <풀잎>과 함께 베스트셀러로 각광을 받았다. 우리나라에 <그리스 로마 신화>로 번역되어 그리스 로마 신화의 대표 서적으로 스테디셀러가 되고 있는 바로 이 책이다.

토머스 볼핀치는 산업혁명이후 과학과 기술의 시대를 맞아 물질문명에 치우친 근대의 세계인에게 그리스 신화를 통해 신과 교감하던 고대인들의 정신세계와 인간성을 보여주고자 했다. 신화는 “선사시대부터 내려온 시적 환상의 산물”이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보면, “신화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기도 하다. 토머스 볼핀치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통해 오랜 세월 인간이 공유해온 그런 환상과 인간의 심성에 내재한 꿈을 되살리려고 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과 인간이 빚어내는 모든 현상에 두려움과 호기심, 동경과 소망을 투영했다. 자연의 위대한 힘에 무력했던 인간의 삶 속에서 보다 초자연적이고, 성스럽고,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신과 영웅을 보길 원했다. 신화는 바로 신과 영웅들의 놀라운 행적의 기록이자, 인간사회의 삶의 또 다른 방식의 표현이었다. 신화는 인간의 상상력과 영감을 불러 일으키고,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인간의 운명적 삶에서 꿈과 희망이 되기도 했다.

그리스 신화에는 태초의 우주만물 형성과정과 인간의 탄생 비사가 담겼다. 또 천상과 인간사회를 주재하는 제우스와 수많은 신들의 사랑과 질투, 분쟁과 투쟁의 이야기로 점철된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 바다의 신 포세이돈, 지하 명부의 제왕 하데스, 아폴론, 아테나, 아프로디테, 프로메테우스 등등 수많은 신과 요정이 등장한다. 로마 신화는 그리스 신화를 그대로 수용했다. 제우스는 실은 주피터였고, 아프로디테는 실은 비너스였다는 식이다.

   
▲ 제우스, 아테네 고고학박물관 소장, ⓒ박경귀

   
▲ 아테네 학술원 앞에 서있는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 여신상, ⓒ박경귀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인간의 현실 속에서의 관찰과 상상력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 의식과 잠재의식의 혼합이기도 하다. 신화 속에서 신은 윤리적 규범과 무관하게 의인화되었다. 그러기에 인간의 욕망과 갈등, 무절제, 도덕규범을 뛰어넘는 일탈을 그대로 투영할 수 있었다. 그리스 신화는 고대 그리스인의 해방구이자 안식처가 아니었을까?

그리스 신화를 과학적 관점으로 보면 허점투성이인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약한 인간이 의지할 초월적 존재에 대한 희구가 만들어낸 있음직한 스토리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수많은 예술가와 학자와 민중들의 영감을 자극하여 걸출한 예술작품이나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고, 삶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화 그 자체는 많은 부분 과장된 상상으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과 사건이 실존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현실의 묘사를 신과 영웅의 신비로운 행적으로 상징해 내거나, 역사적 인물의 위상과 권위를 높이기 위해 신화로 윤색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신화 속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의 묘사로 받아들이고, 이를 입증하려 했던 사람이 바로 하인리히 슐리만이었다. 그는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의 이야기에서 아가멤논의 미케네 왕궁과, 이타카의 오뒷세우스 왕궁,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운명적 대결을 벌인 트로이 왕궁의 일부를 발굴해내기도 했다.

토머스 볼핀치는 그리스 신화의 원전을 엮었지만, 서사시적 표현으로 기술된 아폴로로도스의 <그리스 신화>,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근대소설적 기법으로 재구성해서 흥미롭게 기술하여 독자들과 고대 그리스의 화법 간의 거리를 좁혀준다.

이 책은 신화를 형상화한 명화와 동상, 조각상, 유적지 및 유물 사진 등을 풍부하게 실어 독자들이 신화의 내용을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도록 돕는다. 나아가 그리스 로마 신화 이외에 페르시아의 종교 조로아스터 이야기, <베다>를 기초로 한 고대 인도의 종교와 인도 신화는 물론 <에다>라는 북유럽 신화를 통해 게르만 민족의 창세신화와 영웅들의 활약상까지 보여준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호메로스와 쌍벽을 이루던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 아폴로도로스의 <그리스 신화>는 물론 로마의 아폴로니오스 로디오스가 쓴 <아르고호 이야기>와 오비디우스의 <변신>,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등 개별 작품들을 함께 읽는 게 바람직하다.

신화는 허구와 실재가 혼재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신화 속의 신과 영웅들의 삶은 고대 그리스 귀족들의 삶의 한 측면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삶은 늘 놀라운 이야기와 불가사의한 신화와 언제나 함께 했다. 신화 속에 신과 인간의 희로애락이 어우러졌다. 인간이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와 운명에 영웅들은 도전했고, 초월적인 능력으로 모험을 완성해냈다.

   
▲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유혹하는 목양(牧羊) 신 판, 판을 밀쳐내는 에로스 ⓒ박경귀

그리스 신화는 인간의 삶을 모방해 한 차원 높은 영적 행위를 보여주었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런 신화에 찬탄하며 신과 영웅의 힘을 빌려 현실을 극복하려 애쓰지 않았을까? 신과 인간이 소통하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그리스 고유의 독특한 사유 방식과 행동양식을 만들어냈다. 또 그리스 신화는 오랜 역사를 통해 유럽 문명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결국 신화는 “인류의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나타나는 은밀한 통로”역할을 한 셈이다. 이런 교감의 축적은 시대를 초월한 문화가 되고 나아가 역사가 되었다. 2천여 년이 넘는 옛 이야기가 지금의 우리를 감동시키고 무한한 영감을 준다. 과학의 시대, 합리의 시대에도 신화가 여전히 필요한 이유이다. 현실이 각박하고 영혼의 갈증이 느껴질 때 그 때 신화를 읽자.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추천도서 : 『그리스 로마 신화』, 토머스 볼핀치, 박경미 옮김, 책과함께(2011, 2쇄). 5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