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준의 골프탐험(8)- 호랑이는 먹이를 쫓을 뿐 발자국엔 관심 없다
화사한 꽃들이 만발하고 녹음이 짙어지는 골프시즌이 돌아왔다. 겨울동안 '밭'을 열심히 갈아온 주말 골퍼들을 설레게 하는 골프 시즌을 맞아 국내 최고의 골프칼럼니스트인 방민준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의 맛깔스럽고 동양적 선(禪)철학이 담긴 칼럼을 독자들에게 배달한다. 칼럼에 개재된 수묵화나 수채화는 필자가 직접 그린 것들이어서 칼럼의 운치를 더해준다. 주1회 선보이는 <방민준의 골프탐험>을 통해 골프의 진수와 골퍼의 바람직한 마음가짐을 가다듬기 바란다.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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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 |
거의 한 달 만에 수도권의 한 골프장을 찾았다. 라운드 약속을 하고 결례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골프 감을 되살리기 위해 이틀 연습장을 찾았지만 매일 연습하던 때와는 여로 모로 느낌이 달랐다.
우선 스윙에 대한 자신감이 줄어들었고 클럽 하나하나에 대한 신뢰감도 떨어져 있었다. 그러니 자신 있는 스윙이 만들어질 리가 없었다. 조심조심 엉킨 골프의 실타래를 풀어가겠다고 다짐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방향성이 나빠져 겨냥한 곳으로 볼을 보내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고 거리 또한 줄어들었다. 어프로치 샷 역시 정확도가 떨어져 좋은 기회를 살려내지 못했다. 특히 퍼팅은 최악의 수준이었다. 흔들림 없는 퍼팅이 장점이었는데 짧은 퍼트를 놓치기는 다반사고 3퍼트도 속출했다.
라운드 결과는 평소 핸디캡보다 15개 정도를 더 쳤다. 동반자들은 노상 주머니를 털어가던 사람에게 돈을 땄으니 즐거워하면서도 고수도 그렇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형편없는 스코어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를 무척 신기하다는 듯 감상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내가 형편없는 스코어에 태연할 수 있었던 것은 200년 전 스코틀랜드의 교습서에 쓰여 있는 연습에 대한 선학(先學)들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겨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연습을 강조하는 교습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현상 유지를 바란다면 이틀에 한 번씩 연습하라. 기량 향상을 바란다면 매일 연습하라. 그러나 현상 유지나 기량 향상 모두 보장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랜 기간 유지해온 매일 연습의 습관을 수개월째 실천하지 않고 있으니 스코어에 대한 기대를 갖는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 연습장에 갈까 말까 하면서 현상유지를 할 수 있다면 누가 골프에 매달리겠는가.
나와 라운드 한 동반자 중에는 어김없이 주중에 연습장을 찾는 것은 고사하고 집에서도 골프채 한번 잡아보지 않고 나온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그렇다고 좋은 스코어에 대한 기대를 접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연습은 안했지만 옛날 가락을 살려 좋은 스코어를 내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라운드에 임한다. 매일 연습해도 뜻대로 안 되는 게 골프인데, 라운드 자체가 연습인 아마추어가 좋은 스코어를 기대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미스 샷은 당연한 것이고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기적이다. 그런데 터무니없는 미스 샷을 연발하면서도 엄연한 자신의 현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자연히 부아가 치밀고 불쾌한 감정에 휩싸인 라운드는 분노와 좌절을 안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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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프는 카르마(karma ․ 업)다. 연습의 질과 양, 본인의 골프에 대한 열정과 집중도, 그리고 라운드의 빈도 등이 한데 어우러져 나타난다. 그러니 오늘 내가 얻는 스코어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 자신이 만들어낸 필연의 발자취이다./삽화 방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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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수없이 했다. 남보다 더한 분노와 좌절을 맛본 뒤 터득한 것은 연습을 많이 했건 안했건 ‘골프에서는 언제든 천당과 지옥을 오르내리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닥 모르는 추락을 태연히 받아들이고 예상치 못한 좋은 스코어가 나왔을 때도 기고만장하지 않는 법을 익혔을 따름이다.
골프는 카르마(karma ․ 업)다. 연습의 질과 양, 본인의 골프에 대한 열정과 집중도, 그리고 라운드의 빈도 등이 한데 어우러져 나타난다. 그러니 오늘 내가 얻는 스코어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 자신이 만들어낸 필연의 발자취이다. 그런데 왜 화를 내고 불쾌해 해야 하는가.
나이가 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고, 앞으로 수없이 할 것이다. 이건 피할 수 없다. 골프가 카르마임을 인정하면 골프장에서 골프를 즐기는 자세가 달라진다. 결코 지나친 기대는 하지 않는다. 연습도 제대로 못했으면서도 전성기의 스코어를 머릿속에 그린다면 도둑심보다.
그렇다고 “아! 옛날이여.”를 외치고만 있을 수 없다. 골프에 대한 열정이 식었다면 골프의 퇴화 역시 겸허하게 받아들이든지, 열정이 살아 있다면 도도한 시간의 물결을 한번 거슬러 오르겠다는 각오로 덤비든지 택일해야 한다. 역류의 시도도 결국은 거센 물결에 좌절할 수밖에 없지만 골프의 열정은 그런 무모한 도전을 가능케 하고 가끔은 그 도전에 대한 보상을 해주기도 한다.
20세기 첼로의 거장 ‘파블로 카잘스’가 만 95세를 맞았을 때 한 신문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이제 95세이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하루에 6시간씩 연습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카잘스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내 제자들도 그 얘길 많이 하긴 해요. 그런데, 이렇게 연습을 하면 지금도 내 연주 실력이 조금씩 느는 것 같거든요….”
아마투어 골퍼들도 파블로 카잘스를 흉내 낼 필요가 있다. 나이 탓이나 하고 근력 탓을 하며 퇴행을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퇴행을 거부하겠다거나 적어도 퇴행의 속도를 늦추겠다는 각오로 달려들면 골프의 열정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
모처럼 골프장을 찾는 골프애호가들에 조용히 귀띔해 주고 싶다. “골프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스코어가 좋으면 그것도 좋겠지만 푸른 잔디밭에서 나잇살 먹은 친구들끼리 키득거리며 자신의 골프 카르마를 시험해보고 라운드를 끝낸 뒤 생맥주를 마시는 게 바로 즐거움이고 행복 아니겠습니까?”
저조한 스코어카드를 보고 태연할 수 없다면 별수 없다. 좋은 스코어를 보장해줄 카르마를 쌓는 길밖에. 바로 끊임없는 연습, 겸허한 자세, 진심에서 우러난 동반자에 대한 배려, 고도의 집중력 훈련 등이다.
설원의 호랑이에게는 먹잇감을 쫓는 일이 중요하지 눈 위에 찍힌 발자국에는 관심이 없다. /방민준 골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