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권율, 영화 '챔피언'서 스포츠 에이전트 진기 역 맡아
"생소한 소재, 하지만 마동석이 팔씨름하는 모습 보고 싶었죠"
"작품 즐기는 순간 많은 것들 놓쳐… 죽을 만큼의 노력이 먼저"
[미디어펜=이동건 기자] 연기에 대해 꼬박 한 시간을 이야기해도 시간이 모자란 배우의 말투는 차근차근 쌓아 올린 필모그래피처럼 촘촘하고 정갈했다. 신인 연기자로서 적지 않은 27세에 데뷔,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서일까. 작품과 연기에 대해 이야기할 땐 배우의 풍부한 이해와 열정이 엿보였다.

권율이 지금처럼 단단해지는 데는 꼬박 11년, 연극 활동까지 다 하면 17년의 세월이 있었다. 2001년 연극 '카르멘'을 시작으로 '달려라 고등어'(2007), '내 깡패 같은 애인'(2010), '잉투기'(2013), '명량'(2014), ''식샤를 합시다2'(2015), '한 번 더 해피엔딩'(2016), '최악의 하루'(2016)까지 수많은 작품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명량'의 이순신 아들 이회 역을 맡으면서부터였다.

"무명으로 지낸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연기, 캐릭터 욕심이 많은 것 같아요. 제가 데뷔했을 때가 27살이었어요. 에너지가 넘치던 시기였는데,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하고 선택할 수 없는 시간이었죠. 그래서 괴롭기도 하고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최근 '챔피언'(감독 김용완) 개봉을 앞두고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권율은 하룻강아지 같은 그 시간이 지금의 자신에게 단단한 뿌리가 됐다고 밝혔다. TV를 보며 수없이 시뮬레이션했던 캐릭터들 덕분에 더 과감하게 걸음을 내디딜 수 있고, 시나리오만 주어진다면 백의종군하겠다며 눈을 빛냈다.


   
▲ 영화 '챔피언'의 배우 권율이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연기 스펙트럼에 대한 욕심 때문인지 권율은 이번 작품에서도 180도 달라졌다. 그간 반듯한 이미지를 토대로 캐릭터의 변주를 선보였다면 '챔피언'에서는 능글맞은 스포츠 에이전트 진기로 변신, 색다른 매력을 십분 발휘한다. 확 달라진 권율과 뭘 해도 사랑스러운 마동석의 케미는 '챔피언'의 가장 큰 백미다.

'챔피언'은 타고난 팔씨름 선수 마크(마동석)가 마음보다 잔머리가 먼저 도는 남자 진기(권율), 갑자기 아이들과 함께 등장한 마크의 여동생 수진(한예리)의 도움을 받아 챔피언으로 부활을 꿈꾸는 내용을 그린 작품.

팔뚝 액션 영화를 표방했지만 그 알맹이는 휴머니티다. 언론시사회 현장에서 완성본을 처음 봤다는 권율은 "생각보다 많이 감동받았다"고 하면서도 아쉬웠던 점도 담담하게 고백했다.

"어찌 됐든 배우들은 자신의 연기를 보게 되니까요. 코미디적인 호흡이 더 잘 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감독님이 제시해주는 톤을 맞춰가며 더 많은 안들을 제시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챔피언'을 찍으면서 코미디가 어렵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코미디를 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대단한 분들인지도 다시 한번 느끼게 됐고요."

자신이 생각하는 코미디 포인트와 캐릭터를 통해 구사할 수 있는 코미디의 괴리를 줄이려 부단히 노력했다. 코미디 연기 경험이 많은 마동석에게 의상·걸음걸이 등 세세한 부분까지 상의했고, 극의 활력소 역할을 맡은 만큼 수없이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는 권율이다. 

"얄밉지만 사랑스러운 느낌으로 진기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마크나 수진이 워낙 정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제가 부산스럽게 해서 다채로움을 살리려고 했죠. 그럼에도 제가 한 연기이다 보니 스스로는 부족함이 보이더라고요."


   
▲ 영화 '챔피언'의 배우 권율이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워너브라더스 코리아

   
▲ 영화 '챔피언'의 배우 권율이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워너브라더스 코리아


권율에게 '챔피언' 촬영장은 코미디 호흡부터 영어 대사까지 여러모로 신경 쓸 게 많았던 현장이다. 유학파 출신 마크와의 대화 장면에서는 영어 대사를 외우기 급급했고, 마동석은 그런 권율 옆에서 여러 가지 팁을 전수해줬다.

"영어 선생님이 주신 가이드와 현장 가이드로 대사를 소화했어요. 영어 선생님이 주신 가이드는 너무 회화스러운 느낌이 나다 보니 마동석 선배가 뉘앙스를 다시 잡아주셨죠. 예로 '컴언 브로'도 '컴언 형'이라는 대사로 바꾸고요. 유학 갔다 온 사람들이 자주 그런대요.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던 마동석 선배의 경험담에 도움을 많이 받았죠."

팔씨름 영화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팔씨름을 금지했다는 비화도 전했다. '20인치 팔뚝 요정' 마동석의 손을 잡아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권율은 "마동석 선배의 손은 벽을 만질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며 웃어 보였다.

"생각보다 많이 다치는 운동이라 팔씨름은 금지됐어요. 옥택연씨도 팔씨름하다 뼈가 으스러져서 흉터가 생겼고, 제 주변에도 다친 사람이 몇 명 있어요. 팔씨름은 제대로 교육받지 않으면 위험한 운동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현장에 있는 스태프분들도 혈기왕성하고 힘이 센 분들이었는데, 팔씨름은 못 했죠."


   
▲ 영화 '챔피언'의 배우 권율이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워너브라더스 코리아


권율도 '챔피언'을 접하기 전까진 스포츠로서의 팔씨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팔씨름을 소재로 한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 영화 '오버 더 톱'을 아는 정도였던 그는 이제 팔씨름의 역사와 팔씨름 인기 국가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팔씨름 영화라고 하니 굉장히 생소한데, 마동석 선배가 한다고 하니까 기대감이 들더라고요. 마동석 선배가 팔씨름하는 모습은 한 번 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고. 거기에 진기라는 캐릭터 자체도 풍성한 이야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됐어요."

사기꾼 기질이 다분한 진기지만, 그 뒤에는 생(生)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있다. 주차 관리소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못마땅한 눈빛, 연민의 시선은 또 어떤가. 권율의 말처럼 진기는 '챔피언'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권율은 집에서 어떤 아들인지도 문득 궁금해졌다.

"전 굉장히 효자입니다.(웃음) 감정 표현을 많이 하진 않지만 저희 형보다는 어머니와 대화를 많이 하려고 하는 것 같고. 가족의 일이라면 제 일처럼 생각하고. 제가 당장 해결해드릴 수 있는 건 없겠지만 얘기를 많이 들어주려고 하는 것 같아요. 반면 제 고민이나 힘든 점은 잘 얘기하지 않는 것 같아요. 다들 공감하시겠지만 제가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걱정시켜드리고 싶지 않아서. '아무 일 없어요' 하고 넘어가는 편이에요."

대신 고민을 털어놓고 함께하는 동료들이 있다. 소속사 대표, 대학 동기들, 선배 윤계상까지 연기만 바라보고 달려온 권율에게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특히 작품 활동을 해나가는 데 있어 정신적 지주는 '비스티 보이즈'(2008)로 인연을 맺은 윤계상이라고. 

"연기적인 조언보다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나 응원이 선행되는 것 같아요. '포기하지 말고 잘해' 같은 입에 발린 말을… 농담이고(웃음). 윤계상 선배는 인간적으로도 귀감이 되고, 멘토 같은 분이에요. 저에겐 본보기라 형이 잘 되면 늘 기쁘고, 기도하기도 해요. 언젠가는 꼭 한 작품에서 다시 연기하고 싶어요."

전부 옮기지 못했으나 권율과 함께한 한 시간 동안 대부분 멘트의 마무리는 작품과 연기였다. 그래서 늘 마지막인 것처럼 최선을 다한다는 그의 말도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자신에겐 적용되지 않는다는 권율.

"전 죽도록 노력해야 마음이 놓여요. 즐기는 순간 많은 것들을 놓친다고 생각하죠. 그건 잘 즐길 줄 몰라서 그러는 것도 있지만, 제 연기가 타협 또는 무책임으로 번질 수 있다는 걸 염두하기 때문이에요. 우선 죽을 만큼의 노력이 선행된 다음 즐기는 게 맞지 않나 싶어요. 제가 아는 모든 배우들이 죽을 만큼의 노력을 하고 있고요. 11년간 연기를 하며 느낀 건 성공한 배우가 천재라서 그런 게 아니라 건강한 신체와 노력, 체력 등이 뒷받침돼서라는 거예요."

힘겨운 시간도 있었지만 자신에 대한 의심은 결코 하지 않았다. 대신 어떤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지, 어떤 모습을 대중이 좋아할지 상상하고 또 곱씹었다. 달콤한 로맨틱 코미디부터 느와르, 액션, 스릴러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권율은 아직 보여주지 못한 이야기가 많이 남았다.


   
▲ 영화 '챔피언'의 배우 권율이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워너브라더스 코리아

   
▲ 영화 '챔피언'의 배우 권율이 미디어펜과 만났다. /사진=워너브라더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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