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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운 미디어펜 논설위원 |
4.16 세월호 참사 이래로, 그리고 5.19 대통령 담화 이래로, 지금 국가개조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해경해체, 관피아 척결이 국가개조의 출발점인 듯이 이야기되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해경의 구조태만이 많은 희생을 낳았다는 인식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또한 선장과 선원, 그리고 선사의 잘못보다도 그들의 로비에 넘어간 감독당국의 잘못을 더 크게 보는 것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부분적으로는 수긍이 가는 내용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원인진단과 문제해결 방향에서 문제점이 느껴진다. 국가 상층부 조직체계를 바꾼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훈수주의에 현혹되지 말고 현장주의를 중시하자
우선, 해경이 구조를 태만히 했다는 지적에 대해서 살펴보면, 구명조끼만 걸친 해경에게 선실 내로 들어가서 구조작업을 하라고 지시하는 것은 희생을 자초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마치 방화복과 산소탱크도 갖추어주지 않은 채 화재가 발생한 건물 내로 들어가라고 지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일이다. 배가 가라앉고 나서도 잠수사들이 배에 진입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구명줄(가이드라인)을 설치하는 데만도 이틀이 걸렸다.
그만큼 현장의 거센 물결은 순조로운 구조작업의 결정적 방해요인이었다. 따라서 목포해양경찰서장이 원격지에서 선내 진입을 지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23정 정장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하였던 것을 보면, 현장 지휘자의 판단을 존중하여야 한다. 그리고 123정 정장은 FRP선인 어선들과 함께 바다에 떠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172명을 우선 구조했다는 분명한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또 대기 중인 많은 헬기와 배들을 구조자들끼리 충돌하지 않도록 통제한 것도 적절했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 해경이 더 잘 했어야 했고, 그럴 수 있었을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필자는 그들이 말하듯이 더 잘 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또 해경의 구조에 대해서는 전혀 아쉬움이 없는 바도 아니지만, 그러나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구조를 태만히 한(?) 책임을 물어 구조작업에서 제외시키고 해경을 해체시키겠다는 대통령의 선언은 지나치게 과도한 조치라고 본다.
국가개조가 필요하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부분적으로 아쉬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긴박한 상황에서 열심히 구조 활동을 한 사람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영웅적인 대응에 감사 표시를 하는 것이 우선이다. 또한 현장 사정을 모르는 훈수꾼의 희망섞인(wishful thinking) 이야기를 듣고 현장에서 전방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아군에게 후방에서 사기를 꺾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바둑을 둘 때도 훈수꾼은 선수보다 단 수가 높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훈수꾼이 실제로 바둑을 잘 두는 것도 아니다. 스포츠 중계에서도 해설위원이 감독보다 게임의 진행을 더 잘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감독을 더 잘하는 것도 아니다. 몇 해 전 명 해설위원을 야구팀 감독으로 임명했다가 크게 낭패를 본 일도 있었다. 그것은 책임을 지지 않고 말하기 때문에 자유스럽고 그럴듯해 보일 뿐이다.
따라서 대통령은 주위의 훈수꾼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사태를 평가할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영웅적으로 구조에 나섰던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개혁 방향을 잡아야 한다. 압축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현장주의, 현장존중이 개혁의 출발점이다. 미국 등 선진국의 예를 보면, 재난이나 전투가 있었을 때 그들은 항상 영웅이 있었음을 주목하고 또 기억해둔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오사마 빈 라덴을 처치할 때 책임자인 공군준장을 가운데 앉히고 자신은 옆에 쪼그려 앉아 지원세력임을 분명히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 현장에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더더욱 영웅적인 용기가 살아나고, 밖에서 살펴보는 사람도 대통령과 함께 영웅들의 헌신을 지원해주는 일에 함께 나선다. 따라서 국가지도자는 현장에서 그런 영웅들을 발굴하고, 그들을 격려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훈수꾼들이 뭐라고 해도, 국가개조를 논할 때의 개혁은 현장을 존중하고,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믿고 그들에게 책임과 권한을 확실히 부여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아마도 대통령이 현장의 해경에게서 개혁방향에 대해서 의견을 들었다면, 그들은 해경 경비정에 항상 잠수사들을 태우고 유사시에 즉시 잠수 구조 활동을 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는 쪽으로 보강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을 수 있다. 해경 해체보다는 그 쪽이 맞는 방향이 아닐까?
자기책임 원리의 정착 - 국가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울 수 있을 뿐이다
이번에 꽃다운 청춘들과 많은 승객들의 희생이 300명이나 되고, 또 그들이 안타깝게 선실 내에서 숨져간 것은 선실 내에서 대기하도록 만든 방송이었다. 대피 방송은 너무 시간이 늦었다. 그들이 갑판으로만 나왔어도, 배가 잠기는 것과 상관없이 바다 위에서 경비정 및 어선들에 의해서 구조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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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몰돼 전복된 세월호 주변에서 해경경비정과 민간어선들이 선내를 탈출한 승객들을 구조하고 있다. |
그 바다 위에서 국가는 바로 경비정이었다. 갑판위로 나왔거나 바다로 뛰어든 경우에는 대개 구조를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맹골수도의 빠른 물살과 선실 속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거센 물결 등을 감안하면 (선장 및 선원들의 잘못된 안내에 의해서) 선실 내에 대기하는 사람들까지 구조할 수는 없었던 듯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선장과 선원들이 승객의 대피에는 신경쓰지 않고 자신들만 몰래 탈출한 행각에 더더욱 분노가 치민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즉 국가의 실체가 경비정이었고, 또 구할 수 있는 방법상의 한계가 분명함에도 그 희생들을 마치 학살인 것처럼 묘사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좋게 말해서 국가를 ‘신처럼’ 과대평가하는 것이고, 신도 구하지 못하는 것을 국가에게 구조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어느 경우든 국가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울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여객선에서 사전에 반드시 대피훈련을 실시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사전에 대피훈련이 있었다면, 비상 사태 발생 시 머리 속은 하얘졌을지라도 몸이 기억을 해서 대피를 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어이없는 수많은 희생을 낳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배가 출발하기 직전 혹은 직후에 반드시 구명복을 입고 정해진 장소로 집결하여 대피를 하는 훈련을 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은 여객선사의 책임이다. 국가의 대피훈련 매뉴얼은 구비되어 있으나 그것이 실시되지 않은 이상 백약이 무효였다. 그 매뉴얼은 사후 약방문이 되어, 책임자를 처벌하는 기준으로만 작용했을 뿐이다. 안타깝게도 고귀한 생명들을 잃어버린 뒤...
따라서 국가개조 개혁은 안전훈련에 대한 국민의식의 변화와 훈련의 실행 관행으로 정착되어야 한다. 여객선사도, 여객 대표도 반드시 대피훈련을 실시하는 것이 당연시 되도록 하여야 한다. 훈련 여부를 감시 감독하는 인원을 늘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책임의 원리로 문제를 풀어나가자는 이야기다. 스스로의 안전은 스스로가 책임진다는 각오로 훈련을 거듭하면, 부득이하게 사고가 났을 때도 잘 대처해나갈 수 있다. 굳이 공무원 수를 더 늘려서 감시 감독하는 인원을 두지 않아도 안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5.28일 서울지하철 3호선에서 씨너와 부탄가스를 가지고와서 불을 붙여서 자살을 하려던 사람을 발견하고 소화기를 동원해서 끔으로써 2003년 대구지하철 사고와 같은 대형참사를 막아낸 권순중 씨의 사례를 보면, 이러한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 스스로가 안전에 신경을 쓸 때 안전한 사회가 더 가까이 온다.
그러나 국가에게서 그 이상을 기대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국가책임론, 정권책임론으로 몰고 간다. 그렇다고 더 안전해질 것 같지는 않다. 여객선사도 여객도 스스로 안전해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국가가 도대체 무슨 수로 안전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규제개혁이 더 필요한 상황/가격상한제 등 국가간섭주의 규제 비극 막아야
이번에 세월호 참사의 직접적인 원인은 항해사와 조타수의 변침 잘못이지만, 간접적으로는 배의 무리한 증축 및 화물 과다적재, 평형수 부족 등이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 돈에 눈이 어두운 여객선사에 대해서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다. 또한 무리한 증축 및 화물 과다적재 등을 눈감아준 한국선급 및 안전관리자 등 감독기관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가 높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여객선사는 승객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리는 것이 주 임무다. 그러나 현행 요금 체계 하에서는 수지를 맞추기가 힘이 들었다. 따라서 무리한 증축 및 화물 과다 적재라는 우회를 택했다. 이것이 잘못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잘못을 저지르고, 그것을 눈감아주도록 로비를 한 데는, 설마설마 하는 방심, 장기적 이익에 대한 관점의 결여 등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요금 억제도 한 몫을 했다. 정상적으로 요금을 받아서 배를 운항할 수 있었다면 그러한 무리를 하지 않았어도 될 것이다. 그러한 무리를 하는 과정에서 로비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경제학의 기본 원리를 국가 간섭주의가 방해했기 때문이다. 연안 도서 주민들의 승선료 부담이 크다면, 그것은 그들에 대한 요금지원으로 해결할 문제이지 요금억제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국가간섭주의의 가격상한제는 당장은 비용이 들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또 명령 내지 압력만으로 간단히 실행할 수 있는 듯이 보여도, 결국엔 다른 사고유발 우려가 있는 우회로를 만들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 간섭주의가 숨을 쉬고 있는 가격통제부터 개혁하여 현실화 정상화의 길을 걷도록 해야 한다.
또한 국가간섭주의는 “관피아(=관료마피아)”라고 하는 용어로 불리는 현상까지 만들어냈다. 이 같은 규제조치가 있는 한, 민간 사업체가 규제당국 출신을 로비스트로 고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공무원 윤리강령이나 각종 취업제한에도 불구하고 규제조치가 있는 한 관피아가 근절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필자는 칼을 휘둘러 일시적으로 청소를 하는데 자족하기보다는, 그리고 사건 사고가 기억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다시 되살아날 환경은 오히려 그대로 방치하기보다는, 관피아와 로비가 음지에 기생할 수 없도록 규제를 풀고 자유를 주는 쪽으로 개혁하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본다. [미디어펜=박종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