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조우현 기자]“사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의식적으로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사회에 더 효과적으로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사업이라고 뽐내는 사람 치고, 실제로 사회에 기여한 자를 한번도 본적이 없다.” -애덤 스미스
|
|
|
▲ 애덤스미스./사진=미디어펜 DB |
선거를 앞두고 “지역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후보들이 많다. 실제로 지역을 위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정치인도 존재하겠지만 애덤스미스는 이 같은 구호를 ‘공익의 허구’라고 지적했다.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 의식적으로 ‘공익’을 표방하며 노력하는 것보다 사회에 더 효과적이라는 의미에서다.
다만 애덤스미스의 통찰과 달리 우리 사회에서는 ‘사익 추구’에 대한 편견이 높다. 사익을 이야기하면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소인배․이기주의자로 취급받는 반면, 사익과 배치되는 단어인 ‘공익’을 논하면 정의로워 보이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정치인들 역시 표를 얻기 위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공익을 위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곤 한다.
사익은 정말 소인배들이 추구하는 사사로운 이익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시장경제의 이론을 정립한 애덤스미스는 경제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익을 인간의 본성으로 본다는 점을 강조했다. 개인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사익을 추구하다 보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공익이 극대화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탄생한 말이 “우리가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양조장, 빵집 주인들의 자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에 대한 그들의 관심 때문이다”이다. 사익에 대한 그의 통찰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익 추구의 연장에 기업의 이윤이 있다. 사익에 의한 기업의 이윤 추구가 한 나라의 경제 발전을 이끌고 양질의 일자리라는 ‘공익’을 창출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불법을 저지르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면 결국 시장에서의 평판이 나빠져 퇴출된다. 자생적으로 사익추구의 부정적인 행위가 억제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사익이나 기업의 이윤을 억제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고, 공익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상생, 동반성장, 경제민주화 등의 정책이 대표적인 예다.
현진권 전 자유경제원 원장은 “사익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꿔야 한다”며 “사익을 나쁜 것으로 보고, 억지해야 할 인간본성으로 취급하게 되면 시장경제가 더 발전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익을 나쁜 것으로 보고, 말로만 ‘정의’를 외치는 공허함이 번질 때, 우리 사회는 퇴보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미디어펜=조우현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