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들의 제조업 경기가 살아나고 있고 오랫동안 침체되었던 일본 제조업도 최근 회복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반면에 그간 제조업 강국으로 부상한 한국은 제조업 성과가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장기부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근년 한국의 제조업은 성장성과 수익성 양면에서 모두 낮은 성과를 보이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선진국들이 일제히 제조업 중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첨단제조업 국가전략계획, 독일의 인더스트리 4.0, 일본의 산업경쟁력 강화법안 등이 대표적이고 세부내용에 대해서도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문제는 우리의 경우 제조업 부진을 해소하고 경쟁력 강화를 도모할 정책적 대응이 있느냐는 것이다.
창업 활성화를 주안으로 하는 창조경제 패러다임, 규제완화의 모태가 되는 경제혁신 3개년계획 등이 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것도 기존 주력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직접적으로 추진하는 정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과 함께 제조업 혁명을 위한 전략대안이 추가되어 삼각 편대의 지원체제가 작동하도록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최근 들어 제조업 업그레이드, 제조업 르네상스 등의 개념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데 여기에는 나름대로 이유나 이론적 근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고용의 창출이라는 측면에서 제조업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IT산업이나 서비스업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지만 고용확대에 미치는 효과가 제한적이거나 고용의 지속성이 짧은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제조업을 통한 고용효과는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특성을 갖는다.
둘째로 글로벌 사업전개의 패턴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 ‘유턴’이라고 하고 미국의 경우 ‘리쇼어링’이라는 용어로 쓰이는 새로운 현상으로서 해외진출 기업의 국내 복귀가 늘어나고 있다. 중국, 베트남 등 세계의 공장 지역으로 거점을 옮겼던 기업들이 자국으로 돌아오는 이유는 인건비가 싼 대신 품질관리비가 많이 들거나 공급망 관리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유턴 기업이 늘어나기 위해서는 제조업 정책이 달라져야 한다.
셋째, 제조업 혁명이 요구되는 배경이나 상황은 여러 가지이지만 신축적 전문화(flexible specialization)의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 오래 전에 피오레와 자벨이 제2차 산업분기점1)이라는 저서를 통해 이 문제를 논의한 바 있는데 오늘날의 현실과 잘 맞아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컴퓨터의 활용과 시장의 유연화로 대량생산체제와 신축적인 조정메커니즘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인데 대량주문생산(mass-customization)의 논리와 거의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유행하는 독일의 인더스트리 4.0 구상도 따지고 보면 그 이론적 근거가 신축적 전문화의 가능성 확장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미국의 R&D 정책에서 강조하는 첨단 제조방식 역시 기존 제조업의 근본적 변화와 새로운 첨단기술을 활용한 제품개발 등에 중점이 있는 만큼 선진국들의 접근방법은 상당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풀이가 된다.
우리도 이러한 맥락에서 기존 주력산업을 포함한 제조업 전반의 혁명을 추진하고 일자리 창출을 획기적으로 고양해야 할 것이다. 이 때 구체적인 추진방법으로서 고성능컴퓨팅(HPC)2)의 시스템이나 활용능력을 제고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국적으로는 고성능컴퓨팅과 제조업의 접목, 나아가 과학기술정책과 산업정책의 결합을 시도하자는 것이다.
고성능컴퓨터가 꼭 슈퍼컴퓨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공공기관과 민간기업이 갖고 있는 슈퍼컴 수준은 국제적인 순위에서 열세를 보인다. 따라서 현재의 슈퍼컴 성능을 최대로 활용하고 다양한 형태의 고성능컴퓨팅 능력을 끌어올려야 할 것이다. 슈퍼컴이나 고성능컴퓨터를 순수과학과 기초연구 분야뿐 아니라 응용연구, 개발 등 산업적인 용도에 활용하도록 유도한다면 제조업 경쟁력에 커다란 진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이나 미국에서 사물 인터넷, 스마트 팩토리 등 첨단기술을 활용하여 생산과 공장을 혁신한다고 하는 이면에는 고성능컴퓨팅에 대한 자신감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도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종래 강점을 가졌던 IT의 연장선상에서 고성능컴퓨팅 능력을 제고하고 이를 산업계가 활용하도록 한다는 연계체계를 초기 단계부터 확실히 추진할 필요가 있다.
공공 보유든 기업 소유든 고성능컴퓨팅 능력을 산업적으로 활용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관련된 인력의 양성, 사용방법의 교육, 공동활용 규칙의 제정 등 인프라 정비가 필요하다. 이들 과제는 개별기업 차원을 넘어 정부가 주도하면 좋을 것이다. 동시에 기업도 제조업 혁명을 위해 스스로 R&D와 경영관리의 시스템을 개선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고무적인 것은 자체적으로 고성능컴퓨팅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중소기업들이 국책연구기관의 슈퍼컴을 활용하여 제품개발이나 성능개선에 성공하는 사례가 최근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험을 더 많이 확대하고 광범위하게 전파될 수 있도록 범국가적인 노력이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 /김용열 홍익대학교 국제경영학과 교수
(이 글은 한국경제연구원 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