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의 박근혜대통령 리더십 해부(1)-원칙없이 흔들리는 포퓰리즘이 문제다
지난 2개월 세월호 참사, 문창극 파동을 거치며 박근혜 정부에 대한 민심 이반(離反)이 예측했던 것보다 빠르고, 큰 규모로 이뤄지고 있다. 법과 원칙이 사라진 떼법 천하의 사회, 민중주의(평등주의)에 함몰된 무책임한 지식인 그룹과 언론 집단이 뒤엉킨 복합위기의 국면이다. 이런 난맥상을 콘트롤할 정부는 기회주의적 좌우합작 정권이라는 조롱을 받고 있다. 항구적 불안사회 대한민국의 구조와 변화 가능성을 짚어보기 위한 시도로 연속칼럼 ‘박근혜 리더십 연구’를 내보낸다. 칼럼은 ①박근혜는 정말 포퓰리스트인가? ②그는 박정희의 유산을 이해하는가? ③사회전반의 지식정보 오염 정화(淨化)가 관건이다 등 3회로 나눠 싣는다.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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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우석 미디어펜 객원논설위원 |
“세월호 대처 때도 그러더니 총리 지명을 놓고 또 한 번 이렇게 무기력하게 끌려다니기만 하는 정부가 대체 말이나 됩니까? 우리가 과연 충성을 바칠만한가 하는 의구심도 피할 수 없죠. 오도된 여론정치에 굴복한 대통령이 문창극 후보자를 자칫 중도사퇴라도 시킨다면, 역사학자 이인호 선생의 말씀처럼 우리도 여길 떠나야 하나요? 지금의 무정부 상태를 돌파하려면 국회 해산 등 뭔가 비상한 조치를 검토해야 하는데 정말 답답하네요.”
그날 밤 후배 한 명이 토로해낸 격정과 울분을 나는 기억한다. 문창극 중도사퇴 기자회견 꼭 3일 전 상황이었는데, 그의 생각이 내 마음과 꼭 같았다. 참고로 그는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운동권이었으나 철든 뒤 우파로 전향한 50대 초반의 사회 중견이다. 그의 지적대로 정말 걱정인 한국사회는 더 이상 내부의 동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한반도 전체 상황이 북한 변수와 유동적인 동북아 변수 등 외부 힘에 의해 끌려가며, 사회 내부는 비전을 공유하는 동질성 높은 집단에서 한참 멀다.
한국사회 표류를 더 악화시키는 건 다름 아닌 대통령?
표류하는 한국사회의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정작 대통령 자신이다. 세월호 참사와 문창극 파동에서 그가 재삼 보여준 것은 무능함-무기력함이었고, 많은 이들의 지적처럼 비겁하기까지 했다. 오렌지 정당에 불과한 새누리당, 영혼없는 공무원 집단 등 당정(黨政) 모두 마찬가지다. 국가적 진실을 수호해야 할 것은 엄연히 그들 관군(官軍)이라서 더욱 분노의 대상이었다. 좌파에게서 대한민국을 보호해야 할 법적 권한과 막대한 예산을 쥔 그들은 막상 멱살 잡힌 채 휘둘리고 있고, 수소의 의병(義兵)들은 발을 구르고 있는 형국이 지금이다.
“지금 정부가 명백한 거짓선동을 한 KBS의 협박에 밀려 자기 편 장수의 목을 배는 정도라면, 이런 국가는 더 이상 존립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 아닙니까?”
지금도 귀에 쟁쟁한 그의 말을 염두에 두고 지난 수년 정치인 박근혜의 정책과 언행을 복기해봤다. 일단 잠정 결론은 그가 ‘원칙 없는 포퓰리스트’라는 점이다. 물론 아직 혐의일 뿐이고, 앞으로 3년 반 개과천선할 여지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바뀌도록 도와줄 의무 역시 우리에게 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포퓰리스트 박근혜의 실체를 새삼 묻지 않을 수 없는데, 우선 경제 분야에서의 검증이 필요하다. 7년 전 대선 공약 때 그는 ‘줄푸세’ 공약, 즉 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 질서는 세운다는 우파적 공약을 내세웠다. 그러던 그가 5년 뒤의 대선 때는 느닷없이 경제민주화 공약을 앞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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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대통령의 원칙없는 포퓰리즘이 우파진영의 불안감을 확산시키고 있다. 세월호 참사대응과 문창극 총리후보자의 낙마등을 계기로 좌파와의 전쟁에서 청와대와 당정이 수수방관하는 등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처는 좌파와 사회주의가 팽배했던 70~80년대 영국적 가치와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갖고 영국병을 치유했다. 박대통령은 대처같은 뚝심리더십이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박대통령이 30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면서 목이 마른지 물을 마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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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줄푸세’ 공약에서 경제민주화 공약으로 건너뛰었나?
같은 정치인의 입에서 나온 공약이라고 볼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런 변신은 표를 얻기 위한 전술이 아니었을까 싶었지만, 자기정체성마저 뒤흔드는 일은 국민들에게 너무 곤혹스러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경제민주화 구호는 전술, 그 이상이었다. 취임 전후 구호였던 국민행복시대의 선언, 기초노령연금 등 복지에 대한 강조 역시 좌파적 어젠더를 즉흥적으로 차용(借用)해가며 오락가락하는 게 실체없는 박근혜 정치철학의 특징이 아니었던가? 이번 기회에 나는 그의 1년 반 전 대통령 취임사를 새로 읽어봤다.
“창조경제가 꽃을 피우려면 경제민주화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공정한 시장질서가 활성화되어야만, 국민 모두가 희망을 갖고 땀 흘려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쯤되면 경제민주화는 구호나 전술을 넘어 정치적 신념의 하나라고 봐야 한다. 은연중 내면화한 경제철학이 분명하고, 그가 좌파 어젠더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보여준다. 즉 우리의 박근혜는 애시당초 마가릿 대처가 아니었다. 대처는 옥스퍼드대 대학생(1943~47년) 시절부터 자유주의에 대한 가치관이 분명했고, 좌파라야 명함을 내미는 2차 세계대전 전후 영국의 지식사회 분위기 속에서 ‘왕따 여학생’임을 자초하며 성장했던 뚝심의 여걸이었음을 기억해두자.
박근혜와 마가릿 대처가 서로 다른 점과 같은 점
그건 그가 총리로 취임하던 197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도 사회주의 물결이 하도 심해서 아담 스미스의 나라 영국에서조차 시장경제란 용어를 꺼내는 것조차 힘들을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대처는 영국적 가치를 감히 옹호했고, 그게 승리의 원동력이었다. 대처와 달리 박근혜의 정치적 지향과 경제철학은 생각 이상으로 취약하다. 그게 우리의 잠정결론이다. 기회에 살펴봐야할 건 취임 연설문이 화려하나 공허한 레토릭의 반복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국가적 어젠더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취임시 그는 국민행복과 경제부흥, 문화융성을 약속했는데, 그럴싸하지만 아무 것도 아닌, 겉도는 소리다. 그건 글쟁이로 살아온 필자만의 육감이다. 아무리 제3자가 써준 취임사라고 해도 선택 어휘나 강도에서 대통령 본인의 속마음이 어느 정도 묻어나는 법인데, 그게 안 느껴진다. 즉 그는 누군가가 많이 떠들어온 국민행복과 경제부흥, 문화융성이란 목표, 그리고 경제민주화라는 구호에 편승했을 뿐 육화(肉化)된 자기철학의 흔적은 별로 없다.
강도에게 훈장 걸어준 격인 4.3 국가추념일 지정
그게 포퓰리스트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의 각종 공식 연설문은 매끄럽고 그럴싸한 어휘구사가 반복되지만, 공허한 게 특징이다. 글만 그런 것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현대사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결정적인 대목이 제주 4.3 희생자 추념일을 국가기념일로 하겠다는 대선 공약이었다.
아무리 표가 아쉬웠다 해도 그럴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는데 그는 선을 넘었다. 4.3 희생자 추념이 대표적 케이스였다. 그걸 대선공약으로 그걸 올린 대선 캠프의 엉터리 실무자나, 덥썩 그걸 물었던 대통령 후보나 오십보백보라는 판단을 피할 수 없다. 1948년 8월 대한민국을 열었던 건국에 반대했던 폭도들의 반역행위를 미화해주는 건 명백히 대한민국 헌법의 가치에 반한다. 정말 이해 안 된다. 어쩌면 그는 1980년대 이후 대세였던 반(反) 대한민국의 386세대 가치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닐 듯하다.
그 결과 4.3사건 희생자 위령제는 올해부터 정부 주관행사로 올려졌는데, 그건 민가를 침입한 강도에게 용감한 시민상을 주고 훈장을 걸어준 것과 다를 게 없다. 그렇게 심정적 포퓰리스트인 대통령은 자기 역할을 국민대통합과 100% 대한민국 만들기로 설정했는데,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지만 정치적 센티멘털리즘에서 나온 대통합이란 구호 앞에 지켜야 할 국가적 원칙, 헌법적 가치가 흔들릴 수도 있다. 박근혜 식의 포용과 통합은 진실과 거짓이 한 보자기에 담겨 뒤섞이는 최악의 혼돈으로 나타날 수 있다.
박근혜 식의 통합은 진실과 거짓이 뒤섞이는 큰 혼돈
사실 자기 철학 없이 여론에 의존하는 즉흥적 태도, 이른바 ‘국민의 뜻’에 맞추는 포퓰리즘 행태는 KBS 거짓선동 방송에 굴복하기 전 중요한 고비에서 반복됐다. 노무현 말기인 2006년 그는 “나는 김대중(DJ) 햇볕정책의 지지자”라고 감히 말했다. 햇볕정책의 양면성을 정확하게 파악 못하기 때문에 나온 발언이었으리라. 이듬해 그는 “DJ가 나보고 국민화합의 최적임자라고 했다”는 말을 하고 다녔는데, 더 심각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그 전인 2002년 평양에 가서는 김정일을 향해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호평과 6‧15 선언의 완수를 함께 약속했다.
이 많은 것이 단순한 수사(修辭)나, 일과성 발언이 아니라면? 어느 순간부터 박근혜의 정치적 소신으로 굳어진 것이라면?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둘 경우 박근혜의 안보-통일의 큰그림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뿌리가 공허하다는 점에도 착안해야 옳다. 이외에 포퓰리스트적 즉흥 결정의 사례는 많다. 광우병 사태 당시 그는 “국민들의 불안감 해소를 위해 재협상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당시 구조화된 좌파 거짓선동의 실체를 채 모르고 있었다는 얘기다. 용산 화염병 난동 사태 당시에도 “경찰이 너무 서둘러 진압했다”고 비난했던 것도 너무 즉흥적이었다.
국가안보와 외교 하나만은 확실하겠지라는 것도 오산?
실은 헌재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 구상한 세종시 건설을 그가 지지했던 것이야말로, 박근혜 식 포퓰리즘의 압권이다. 충청표를 얻기 위한 기회주의적 발상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 대한 대응과, KBS 선동에 따른 문창극 파동 역시 그가 대중선동에 엄청 취약하다는 걸 새삼 재확인해준 셈이다.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의연한 지휘 태도 대신 유족의 억지와 떼쓰기 앞에 덩달아 눈물을 짓거나 특별법을 용인해주는 즉흥적 행태 역시 실망스러웠다.
그러다가 충격요법으로 돌연 들고 나왔던 해양경찰청 해체 선언도 해양국가 포기와 다름 없는 패착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래도 박근혜는 국가안보와 외교 하나만은 확실하겠지라고 생각해왔지만, 그것마저도 흔들린다. 눈먼 지식인과 야당의 극렬반대를 무릎 쓰고 1965년 박정희는 한일국교정상화를 했는데, 대한민국에게 좋은 안보 환경이자 부자나라를 만들어준 토대인 1965년 체제를 지금 딸이 허물고 있다.
지금 외교환경과 관련해 좌파들이 원하는 건 딱 하나다. 그건 ‘1965년 체제’의 붕괴인데, 미국과 소원해지고 센티멘털한 반일(反日)정서에 사로 잡혀있는 박근혜의 외교는 좌파들의 그림과 가깝다. 박근혜 외교는 이웃 일본을 가상적으로 돌리고, 맹방 중의 맹방인 미국과는 MD도 지지부진하고, 대륙의 눈치를 살피며 친(親)중국으로 치닫고 있다. 이런 스탠스가 해양국가를 포기한 채 대원군 식의 쇄국정책으로 돌아서자는 것이고, 중국의 변두리 나라였던 조공(朝貢)국가 조선왕조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는 이미 현실화됐다.
성격이란 절반의 운명…그래도 바꿔야 산다
지금 대한민국은 선대(先代) 박정희의 아우라에 둘러싸여 있던 박근혜 대통령의 멘탈리티를 재점검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정말 안타깝게도 우리의 중간결론은 그리 해피하지 않다. 정치학자 존 G. 스토신저에 따르면, 정치행위에서 이념(자본주의·공산주의)이나 지력(知力) 못지 않게 최고지도자의 성격이 결정적이다. 그리고 성격이란 절반의 운명이다. 그만큼 바꾸기 어렵다는 뜻인데, 박근혜 대통령은 스스로 언명했던 국가 개조의 프로그램만큼 자신의 스타일과 멘탈을 바꿔주길 지금 요구 받고 있는 중이다.
이게 과연 가능할까? 가능한가 아닌가를 떠나서 대한민국 명운을 가르기 때문에 되물어야 하는 질문인데, 쉬운 답이 잘 안 나온다. 문창극 총리 후보자가 중도하차하던 날 언론사 대선배인 인보길 뉴데일리 대표께서 저녁 늦게 필자에게 전화를 해왔다. 그 분만한 에너지와 기백을 가진 분도 실로 드문데, 많은 얘기 끝에 그가 신음하듯 토해냈던 말이 지금도 내 귀에 쟁쟁하다. 그의 신음은 이 나라의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등 우파들이 지금 내뱉고 있는 고통스러운 질문이다.
“우린 이제 누굴 믿고 살아야 하지? 누굴 믿어야 사느냐고?” /조우석 미디어펜 객원논설위원,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