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준의 골프탐험(13)- 모든 샷은 처음이자 마지막
국내 최고의 골프칼럼니스트인 방민준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의 맛깔스럽고 동양적 선(禪)철학이 담긴 칼럼을 독자들에게 배달합니다. 칼럼에 개재된 수묵화나 수채화는 필자가 직접 그린 것들이어서 칼럼의 운치를 더해줍니다. 주1회 선보이는 <방민준의 골프탐험>을 통해 골프의 진수와 바람직한 마음가짐, 선의 경지를 터득하기 바랍니다.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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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 |
대부분의 골퍼들이 18홀을 돌고 나서 9홀 혹은 18홀을 더 돌았으면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이 경우 대개는 초반에 몸이 덜 풀려 스코어가 시원치 않았다가 후반에 접어들어서야 리듬을 찾고 몸도 풀려 볼이 제대로 맞기 시작한다는 뜻인데 이것은 그만큼 집중도가 떨어진 골프를 했다는 증거다.
정말로 모든 샷마다 혼신을 다해 라운드를 했다면 18홀을 마친 뒤 그렇게 민숭민숭할 까닭이 없다. 게임에 몰입해 18홀 동안 최선을 다하는 골퍼는 날씨와 관계없이 등에 진한 땀이 배고 라운드를 끝내고 나면 절로 ‘이제야 끝났구나!’하는 안도의 숨을 내뱉게 된다. 이래야 정상이다.
18홀을 돌고도 성이 안 차고 미련이 남는다면 그것은 힘이 남아서가 아니라 골프에 몰입하지 못하고 건성으로 라운드 했다는 증거다. 무엇엔가 집중하기란 쉽지 않다. 미국의 한 심리학 교수는 항공 관제사나 비행기 조종사를 대상으로 집중에 대한 실험을 한 결과 고도의 정신집중을 요하는 사람들도 업무와 무관한 예상치 못한 물체가 시야에 나타나면 순간적으로 시선이 물체를 따라가 집중이 무너진다는 사실을 밝혀낸 바 있다.
이 실험에서 항공관제사와 조종사에게 컴퓨터 스크린의 도형과 문자 등을 유심히 관찰하도록 한 뒤 예정에 없는 도형 등을 순간적으로 제시한 결과 대상자의 절반 이상이 임무와 관계없는 도형이 갑자기 나타났을 때 시선을 그 물체에 빼앗겼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자신이 그 물체에 한눈을 팔았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신을 집중해 일하고 있는 동안에도 업무와 관계없는 것에 시선을 돌린다는 실험 결과는 몰입이나 집중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매는 한 마리의 들쥐를 잡기 위해 3~5시간을 들판 위 상공을 비행하는 끈기를 갖고 있다. 변변찮은 먹잇감이지만 매는 상공에서 한순간도 한눈팔지 않고 들판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을 살피고 있다가 먹잇감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내리꽂히듯 수직강하, 순식간에 먹이를 발톱으로 움켜쥐고 날아오른다. 굶주린 늑대 역시 장시간 먹이를 추격하지만 한순간도 먹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집중하다 결정적인 순간을 맞으면 혼신의 힘을 다해 먹이에 달려든다. 매나 늑대의 집중력은 바로 골퍼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두 번 다시 같은 샷을 날릴 수 없다. 우승을 목전에 둔 결정적인 순간에 어처구니없는 미스 샷으로 기회를 놓친 수많은 프로들이 “다시 한 번 그 샷을 할 수 있다면?”하고 아쉬워하지만 그런 기회는 결코 오지 않는다. 흘러간 물에 두 번 다시 손을 씻을 수 없듯 온갖 상황에서 맞게 되는 모든 샷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특정 골프코스에서 자주 라운드하는 골퍼들조차 평생 같은 샷을 날릴 수는 없다. 단지 비슷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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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내 발 앞에 놓인 볼은 계속 쳐온 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날릴 수 있는 유일한 볼이다. 내 앞의 볼은 두 번 다시 되풀이 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나의 샷을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볼을 앞에 둔 이 순간이 얼마나 귀하고 엄숙한 순간인가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삽화방민준 |
우선 오늘의 내가 1년 전, 한 달 전의 내가 아니다. 우리 육체는 끊임없이 생물학적 변화를 하고 있고 내 마음도 종잡을 수 없이 변한다. 코스의 조건도 계절 기후 시간의 변화에 따라 변한다. 동반자도 바뀐다. 같은 동반자라도 그 역시 변화 중이다. 골프의 감각 또한 그때그때 다른 것은 물론이다. 근육의 기억도 쇠를 갉아 먹는 녹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마모된다.
지금 내 발 앞에 놓인 볼은 계속 쳐온 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날릴 수 있는 유일한 볼이다. 내 앞의 볼은 두 번 다시 되풀이 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나의 샷을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볼을 앞에 둔 이 순간이 얼마나 귀하고 엄숙한 순간인가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샷을 대강 허투루 칠 수 있겠는가. 두 번 다시 되풀이 할 수 없는 샷을, 후회하지 않을 샷을 날리기 위해서는 치밀하면서도 전체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 과감한 결단력 그리고 소금이 물에 녹아 하나가 되듯 자신을 상황과 일치시키는 고도의 집중이 필수적이다.
이런 과정은 샷을 날려야 하는 모든 순간에 되풀이 되어야 한다. 80대 타수를 치는 골퍼라면 한 라운드에서 80여 차례 이런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식으로 라운드를 마치고 나면 정신과 육체는 녹초가 될 수밖에 없다. 정신과 육체를 소진한 뒤 장갑을 벗으며 동반자들과 악수를 나누는 순간이 감격스럽지 않을 수 없다.
내 앞에 놓인 볼이 어떤 악조건에 처해 있다 해도 최선을 다해 플레이할 가치가 있지 않은가. 아무리 고달픈 삶이라도 살아갈 가치가 있듯.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