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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희 전 방통위 대변인 |
박근혜정부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의제와 담론의 부재를 꼽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제대로 된’ 의제와 담론이 없다는 것이다.
의제와 담론은 정치의 동력이다. 어떤 정치세력이든 집권 후 자신들의 이상과 주요 정책을 정치적 언어로 간결하게 제시하며 ‘새로운 변화’를 모색한다. 의제와 담론은 정치세력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이면서 때로는 중대한 정치적 돌파구로 작용한다. YS(김영삼 전대통령)는 임기중반 정치적 위기에 처하자 ‘역사바로 세우기’를 전면에 내세워 정국을 반전시켰다. DJ(김대중 전대통령)는 ‘햇볕정책’이라는 통일 아젠다를 자신의 정치 엔진으로 삼았다.
박근혜정부도 출범이후 여러 가지 아젠다를 제시했다. 집권 초 ‘창조경제’라는 아젠다가 등장했고, ‘통일대박론’이 한 때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런데 이런 정치적· 정책적 의제들이 처음에는 국민들의 시선을 모으는 데 성공했지만 지금은 허공을 멤돌고 있다.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의제와 담론이 힘을 받으려면 공보나 홍보 혹은 정치선전의 영역을 넘어서야 한다. 치밀하고 정교한 정책이나 구체적인 정치행위들로 뒷받침되어야 하고, 목적과 메시지가 분명해야 한다. 그래야 ‘긍정적 이미지’가 ‘정치적 에너지’로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이미지로만 허공에 떠있다면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라는 정치적 역공의 소재가 될 뿐이다.
실제 ‘재임중 1원 한푼 안받겠다’는 YS의 의지는 이후 ‘금융실명제’의 전격실시로 이어졌고, YS의 ‘역사바로세우기’는 5·18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신군부 세력에 대한 사법적 단죄를 통해 구체화됐다. DJ의 햇볕정책은 ‘남북정상회담’과 ‘개성공단’ 등 일련의 남북 화해 조치로 현실화됐다.
창조경제론이나 통일대박론은 아직 진행형이라 아직 평가를 내리기는 이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제시된 박근혜 정부의 아젠다나 담론은 ‘언어의 마력’에만 의존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창조경제론은 용어의 모호함으로 인해 ‘개념 논쟁’부터 출발하며 삐거덕댔다. 통일대박론은 국민들에게 통일의 의미를 각성시키는데 ‘대박’을 쳤다. 현실에선 대북관계에서 조그마한 진전도 없다. 요즘 ‘경제민주화 담론’을 거론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박근혜 정부는 최근 자의반타의반으로 또 하나의 아젠다를 제시했다. 이른바 ‘국가개조론’이다. 지난 4월 세월호 참사 당시 박 대통령이 유족들을 만난 자리에서 ‘안전한 국가’를 강조하며 국가개조를 거론한 것이 시초이다. 유임된 정홍원 총리는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최근 ‘국가대개조범국민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 발표는 또 한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도대체 무엇을 개조한다는 것이지?
정홍원 총리가 발표한 국가개조 작업의 큰 줄기는 크게 네 갈래이다. ‘공직개혁’과 ‘부패척결’, ‘안전혁신’과 ‘의식개혁’ 에 전문분과를 두고 광범위한 국가개조 활동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 중 언론에서는 특히 ‘부패척결’과 ‘공직개혁’을 더 비중 있게 보도하며, ‘안전혁신’의 핵심수단으로 부정부패 척결을 앞세웠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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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대통령이 집권후 내세운 창조경제와 통일대박, 세월호 참사이후의 국가개조 등이 처음엔 국민의 시선을 모으는데 성공했지만, 지금은 허공에 멤도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정부 개혁은 치밀하고 정교한 정치철학과 정치행동을 통해 이뤄져야 소기의 성과를 거둔다. 박근혜정부의 개혁정책들은 이런 점에서 실천적 힘이 부족하다. 공무원과 공직사회 사정을 통해 국가개조 성적표를 내려는 것도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국가개조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데 역점을 둬야 성공한다. 박대통령이 최근 김포의 로컬푸드를 방문해 설명을 듣고 있다. |
그러나 공직개혁과 부패척결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는 검찰 등 사정기관의 존재이유이다. 또한 모든 정권에서 내세웠던 슬로건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거의 모든 정권에서 ‘사정(司正)정국’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애용되는 정치수단이기도 하다.
부패척결 태스크포스(TF)도 만든다는데 이건 또 뭔가. 정부가 검찰과 경찰 등 사정업무를 맡는 국가 기관을 못 믿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구색 갖추기인지 모를 일이다. 부패척결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새삼 국가개조의 아젠다로 강조할 일이 아니다. 이런 발상들이야 말로 범국민위의 의식개혁분과에서 다뤄야 할 개조 대상이다.
공직개혁도 마찬가지이다. 공직사회는 언제나 ‘혁신대상’이다. 이는 단순히 공직사회가 부패해서가 아니다. 공무원들이 가진 힘에 대한 견제의 의미이고, 보다 효율적인 국가운영시스템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직 사회가 부단히 자기개혁을 하고, 수준을 높여야 나라전체에 활력이 생긴다. 이는 공무원들을 ‘사회악’ 취급하고, 공직사회를 얼어붙게 만드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오히려 어느 정권에서나 ‘만만하게’ ‘일상적으로’ 죄인 취급받는 공무원들이 측은하고 걱정된다. 이제는 ‘관피아’라며 조직폭력배와 동급으로 취급받는 수준에 이르렀으니, 이를 듣는 공무원들의 마음은 오죽할 것인가. 국민 의식을 개혁을 한다는 것도 시계를 거꾸로 돌린 것이다. 정부가 국민들을 훈육하겠다는 권위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정책적 수단도 캠페인을 제외하면 마땅치 않다.
길게 이야기했지만 결론은 국가개조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백화점식으로 나열된 과제들로 인해 목표도, 방향도 흔들린다. 정부가 상시적으로 해야 할 당연한 일들을 국가개조의 주요 과제로 내세웠으니 코드부터가 잘못됐다. 국가개조론이 아젠다와 담론으로 힘을 얻으려면 ‘안전한 나라’ 만들기에 모든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래야 목표가 분명해지고, 메시지가 간결해진다. 사회의 안전시스템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자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소, 전력, 수도, 통신망, 철도와 지하철 등 주요 사회 인프라들은 정말 안전한가? 수많은 초고층빌딩들의 잠재적 위험은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는가? 이를 위한 법과 제도는 충분한가? 감사원과 각 부처의 감사기능은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가? 민간영역에서의 안전 관리체계는 충분히 갖춰져 있는가?
물론 안전한 국가관리 역시 당연히 정부가 해야 할 일이지만, 지금까지 우리사회에선 ‘성장’코드가 ‘안전’코드를 압도했다는 점에서 부패척결이나 공직개혁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이미 개명했고, 국가안전처까지 신설할 정도로 안전이슈에 정부가 관심을 갖는다면, 국가개조론의 모든 동력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로 만드는 일에 쏟아야 한다. 국민들을 ‘잠재적 위험’과 ‘보이지 않는 공포’로부터 보호하는 일이야 말로 우리사회를 업그레이드 하는 국가개조론의 메시지이다.
이건 정말 사족이지만, 국가개조작업 성적표를 ‘공직사회와의 전쟁’을 통한 ‘사정 성과물’로 채우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만약 그렇다면 국가개조 아젠다는 또 허망하게 허물어질 것이다. /이태희 (재)TEIN협력센터 사무총장, 전 방송통신위 대변인, 전 한국일보 정치팀장(청와대 출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