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대각사~천도교 중앙대교당~승동교회~태화관터~보성사터
   
▲ 탑골공원 내 3.1운동 기념탑 [사진=미디어펜]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잘 알다시피 서울은 일제 때 경성으로 불리웠다.

엄혹한 일제의 무단통치하에서도 서울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였고, 항일 독립운동에서도 메카였다.

3.1만세운동 역시 서울에서 잉태되고 준비되고, 폭발했다. 시기는 해외의 무오독립선언 및 2.8독립선언에 뒤졌지만, 서울에서의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은 이후 모든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지하철 1호선 종각역 3번 출구를 나와 조금 걸으면, 기독청년회관(YMCA)이 보인다.

이 건물은 1907년 건립된 근대문화유산이다. 당시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이 쓴, 건물 입구 오른쪽에 붙어 있는 일천구백칠년(一千九百七年)’ 석판 글씨가 선명하다.

한쪽에는 여기가 3.1운동을 준비했던 곳이라는 석비도 있다.

종로2가 네거리를 건너면 탑골공원이다.

탑골공원은 최초로 만세함성이 터진 곳이다. 학생들이 모여 여기서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태극기를 나눠주면서, 처음으로 독립만세 시위행진에 나섰다.

이를 기념해 공원 내에는 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독립선언서 전문이 새겨져있고, 양 옆에 만세를 외치는 석상이 두 개 있다.

그 왼쪽에는 3.1운동의 최고 지도자였던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이 있고, 조금 더 들어가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팔각정도 있다. 탑골공원은 정문에도 삼일문이란 현판이 걸려있는데,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다.

탑골공원은 평소 어르신들의 쉼터인데, 3.1절이 가까워서인지 젊은이와 어린이들도 많이 보인다.

공원을 나와 종로3가에서 창덕궁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종로3가역 7번 출구에서 조금 걸으면, 골목 안에 대각사(大覺寺)가 있다. 바로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 2인 중 한 분인 백용성 스님이 창건하고 주석한 곳이다.

용성(龍城)스님은 선불교 교화사업을 하면서 1912년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게 된다. 백범은 서울에 오면 거의 이 절의 용성스님을 찾았다고 한다.

만해 한용운 스님도 이 곳에 자주 들러 용성스님과 독립 문제를 논의했다.

마침내 3.1운동 때는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고, 이후에도 독립자금을 보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만주의 독립군을 적극 지원하다가, 19403월 대각사에서 열반했다.

이런 용성스님을 기리고 고마움을 표현하고자, 백범과 임시정부 요인들은 해방으로 환국한 직후 대각사를 방문했는데, 이 때 인파가 인산인해였다.

다시 큰 길로 나와 낙원상가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상가에서 길을 건너 안국역 쪽으로 조금 가면,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있다.

3.1운동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가 서로 힘을 합쳐 일으킨 것이지만, 주도세력은 천도교였다.

처음 만세운동을 주창하고 기획했던 천도교는 준비과정에서도 핵심 역할을 했다손병희 선생이 바로 천도교 제3대 교주였기 때문이다. 선생은 친일매국행위로 지탄을 받던 일진회를 축출하고 교단 명칭을 동학에서 천도교로 개칭한 후, 항일독립운동에 적극 나섰다.

3.1운동을 준비하는 총본부격이었던 곳이 바로 이 곳, 천도교중앙대교당이다.

이 대교당은 의암 선생 주관으로 1918년 착공해 1921년 완공됐는데, 높고 웅장한 근대건축물로 당시 명동성당, 조선총독부와 함께 서울시내 3대 건축물(현재 서울시 유형문화재 36)이었다고 한다.

특히 의암 선생은 대교당 건축을 명분으로 모금한 건축비의 상당 부분을 3.1운동에 사용했다.

대교당에서는 3.1절 오전 11시부터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이하 기념사업회)주관으로 기념식 및 기념대회가 열린다. 기념사업회는 3.1운동 때처럼 국내 7대 종단이 모두 함께 하는 거족적조직인데, 합동 기념식을 여기서 여는 것에 기독교를 포함한 다른 교단들도 동의했다.

이제 인사동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인사동 네거리에서 종로로 나가기 직전, 인사동 입구 왼쪽 골목 안에는 승동교회가 있다.

승동교회는 3.1운동 거사를 위해 김원벽 선생 등 학생대표들이 모여 모의했던 곳이다. 이를 기념하는 표석과 안내판이 경내에 있다.

올해로 창건된 지 126년 된 유서 깊은 이 교회에선 33‘3.1운동 100주년 기념예배도 거행된다.

이어 33인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 3창을 외친 후, 출동한 일본경찰에 전원 체포됐던 태화관 터를 찾아간다.

   
▲ 인사동 태화관 터 기념비 [사진=미디어펜]

인사동에서 종로1가 방향으로 골목길을 따라가면, 1층에 국민은행이 입주한 태화빌딩이 있다. 여기가 바로 태화관이 있던 자리로, 건물 왼쪽 옆에 이를 알리는 표석이 우뚝 서 있다기념사업회는 이 자리를 기념공원으로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종로14거리에서 길을 건너 우회전, 조계사 뒤로 돌아가면 수송공원이라는 소공원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터다.

보성사 사주이기도 했던 손병희 선생은 육당 최남선이 기초하고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 인쇄를 당시 사장인 묵암 이종일 선생에게 지시한다.

227일 밤 35000부를 인쇄했는데, 운반 도중에 일본경찰에 발각될 뻔 했으나 족보책이라고 둘러대기도 했고, 인쇄작업 중 형사가 들이닥치자, 뒷돈을 찔러줘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만세운동이 터지자 일제는 보성사를 즉각 폐쇄했고, 6월에는 불을 질러 건물을 아예 없애버렸다.

공원 안에는 3.1운동 80주년을 맞아 지난 199931일 당시 문화관광부와 종교계가 공동으로 건립한 기념조형물과 이종일 선생 동상이 있다.


[미디어펜=윤광원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