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칼럼] '내가 영화로 만들고 싶은 인물 셋'-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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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우석 언론인 |
한국영화는 작품을 좌우하는 영화 캐릭터의 폭이 너무 좁고, 영화 외적 요인에 좌우된다고 지난 글에서 지적했다. 그게 우리영화의 빈곤을 자초하는 요인인데, 때문에 내가 영화감독으로 데뷔할 때 작품화하고 싶은 신선한 20세기 인물 셋을 소개하겠다고 예고한 바 있다.
오늘이 첫 번째다. 일제시대 재계의 인물이라고 운을 뗐을 뿐 이름은 밝히진 않았다. 단 그가 1930년대 골드러시의 주인공인 광산왕 최창학은 아니다. 최창학은 백범 김구가 묵던 집 경교장을 제공했던 사람이기도 한데, 흥미로운 인물이 맞지만 오늘 관심은 아니다. 실은 일제시대 유행어는 "유통엔 화신 박흥식, 제조업엔 경방 김연수"였다.
김연수의 경성방직은 1930년대 베이징에 사무실을 두고 만주 대륙을 호령했으니 글로벌 기업이 맞다. 하지만 영화 캐릭터로 적합한 인물은 내겐 화신의 박흥식(1903~94)이다. "일제시대 최고의 거부,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화신백화점의 오너, 그러나 반민특위 체포 대상 1호…."
세상은 그런 식으로 박흥식을 기억하는데, 그가 착한 기업인인가 아닌가의 여부는 내 관심이 아니다. 영화 캐릭터로 성공하려면 선악 개념을 넘어서는 또 다른 매력이 있어야 한다. 즉 문제적 인물인가 아닌가가 중요한데, 그걸 박흥식은 두루 갖췄다. 풍부한 이야기가 없을 리 없다. 우선 그는 황소 같이 커다란 몸집에 유순해 보이는 얼굴 표정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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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신백화점 오너 박흥식. |
화신은 매판자본인가 민족자본인가
100kg을 훌쩍 넘기는 몸으로 무농약 사과 배를 시도 때도 없이 먹어댔고 한 끼에 보통사람 3인분은 거뜬했던 대식가로 유명하다. 정교함은 덜했을지 몰라도 배포는 확실히 컸다. 1935년 정초 지금 종로타워빌딩 자리의 4층 건물 화신백화점에 큰 불이 났을 때다.
수 천, 수 만 명 구경꾼이 몰려 난리였고, 우에노 총독이 직접 진화 작업을 현장에서 독려했을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헌데 그날 밤 박흥식은 총독을 초청해 명월관에서 저녁을 함께 했다. "모두가 끝났다고 말하지만, 나는 일어선다. 조선 사람들은 본래 불난 집은 불처럼 일어섰다고 믿지 않더냐?" 그렇게 호언하던 그는 총독에게 깜짝 제안을 했다.
"백화점을 새로 짓을 때까지 시한부로 화신 건너편 종로경찰서 구관을 빌려 달라. 거기에서 영업해야겠다. 화신이 불탄 건 변변한 소방시설을 갖추지 못한 총독부 책임도 크지 아느냐?" 놀랍게도 총독은 박흥식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게 훗날 신신백화점이 들어선 계기다.
그 뒤 화신은 승승장구했다. 2년 뒤 화신은 지상 6층의 새 모습으로 재개관했다. 그 직전 평양의 백화점을 인수해 화신 평양점까지 진출했다. 상인은 신용으로 먹고 사는데, 장사는 계속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고인이 된 손정목 교수는 자기 책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서 "화신은 조선민족의 자랑이었다"고 밝혔는데, 그게 당시의 보편적 정서다.
일제 자본인 미츠코시(현 신세계 본점), 조지아(옛 미도파) 등이 당시 일본인 거리 명동 일대를 점령한 상황에서 종로를 떡 하니 버티고 있는 화신은 그 자체로 화제이자 위안이었다. 경성 사람들은 6층 식당가에서 비빔밥을 먹고 아이쇼핑하는 게 최고의 호사였다. 엘레베이터도 신기했다.
그런가 하면 이름을 떨치던 시인 주요한과 소설가 조벽암 등을 채용해 화신의 광고 업무를 맡기는 수완도 박흥식 머리에서 나왔다. 정말 대박은 연쇄점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300개 점포를 각지에 세운 것이다. 일본 등지에서 싸게 확보한 물건을 연쇄점에 공급하는 대형 잡화점 네트워크였으니 참 유통왕다운 행보였다.
그런 박흥식의 고공행진은 총독부 비호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좋다. 영화는 그런 측면을 그대로 보여주면 된다. 일제 말 비행기 헌납 사실도 숨길 게 없다. 큰 사업을 하는 처지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반민특위 공판에서는 무죄로 풀려났는데, 선고 이유가 이랬다.
"그 시기 겨레의 상권을 수호했다. 그를 친일파로 기소한 건 편파적이었다." 여기까지 얘기는 알려졌지만 그 다음도 관심거리다. 화신이 부도난 건 80년이다. 그럼 해방 이후 35년 동안 무얼 했나? 냉장고 TV 등을 만드는 화신전기-화신소니 등을 잇달아 차렸다. 그러나 손대는 것마다 실패였다. 그의 몰락은 부채를 쓰지 않는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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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독대하며 서울 외곽의 신도시 개발안을 설명하고 있는 박흥식. |
1930년대에 불광-수색에 뉴타운 꿈꿔
즉 거대자본 시대에 옛날식 경영은 이미 낡았다는 말이다. 그걸 떠나 시운(時運)이라는 게 있긴 있나 보다. 결국 가회동 집을 팔고 역삼동의 아파트로 옮긴 게 87년. 담석증과 파킨슨으로 고생하다가 타계했는데, 박흥식의 반전은 따로 있다. 그게 바로 도시계획가로서의 면모다.
일테면 1930년대에 불광-수색 일대의 신도시 개발계획을 수립한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불광-수색은 경기도 땅인데, 박흥식은 여기에 뉴타운을 조성하고 종로까지 지하철로 연결한다는 그림을 가지고 있었다. 엄청난 스케일인데, 총독부와 밀당하다가 중일전쟁 여파로 끝내 접었다. 그런 박흥식은 60년대에 잠시 부활한다.
불광-수색 신도시 소문을 전해들은 박정희 정부가 그에게 서울 인구 폭증 대비한 과제를 준 것이다. 놀랍다. 당시 박흥식은 강남 개발계획안을 떡 하니 제출했는데, 그게 지금 강남 지역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거상(巨商)답게 시야 자체가 달랐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또한 끝내 무산됐다.
결국 약간의 시차를 둔 채 70년대 이후 강남 개발이 박흥식을 완전 배제된 채 거대한 꽃으로 피어났고, 그게 오늘의 서울을 만들었다는 게 역설적이다. 결국 박흥식은 괴짜이고, 다면체의 얼굴을 가졌다.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도산 안창호를 출옥시킨 공헌도 있으니 쉽게 말하기 힘든 인물이 맞다. 내가 영화 캐릭터 박흥식에 관심 갖는 건 이유가 있다.
때가 좀 묻고 일그러졌더라도 그게 우리 앞세대 모습이기 때문이다. 어찌된 나라인지 근현대 1세대 기업인인 그를 다룬 단 한 권의 단행본도 나온 바 없는데, 실로 경악할 노릇이다. 영화 상품의 등장은 이런 목마름을 채워줄 것이고, 흥행 대박은 당연하지 않을까? 그래서 물어봐야 한다.
아무리 봐도 멀쩡한 영화 캐릭터이고, TV드라마 소재인데 왜 우린 까마득한 조선시대의 경주 최부자나 조선시대 거상 김만덕 등에만 코 박은 채 없는 스토리를 억지로 부풀리고 있는가? 동시대 삶의 숨결을 가진 인물을 가감없이 등판시켜야 영화산업이 살아나고, TV드라마 역시 풍요로와진다. 동시대 인물을 애써 외면하는 건 분명 비정상이다.
그리고 내가 감독이라면 영화 맨 뒤에 이런 스크롤을 쫙하니 올릴까 한다. 참고로 이건 그가 만년에 한 경제지와 했던 인터뷰다. "내가 한참 뛸 때 이병철씨는 동대구에서 양조업을 하고 있었고, 정주영씨는 자동차를 수리했다. 두산 박두병씨는 동동구리무 화장품 장사를 했고…." /조우석 언론인
[조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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