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칼럼] '내가 영화로 만들고 싶은 인물 셋'-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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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우석 언론인 |
한국영화의 캐릭터로 관심있는 20세기 인물 중 일제시대 기업인 박흥식, 불도저 시장 김현옥을 각각 소개한 바 있다. 남은 한 명이 오늘 밝히지만, 영화감독 신상옥(1925~2005)이다. 그에 대한 내 관심은 심플하다. 그처럼 20세기 냉전시대를 드라마틱하게 살았던 인물은 없다.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양쪽을 넘나든 사람 자체도 드물지만, 해당 지역에서 각각 최고 권력자의 비호 아래 눈에 띄는 활동한 사례는 없다. 신상옥-최은희, 둘이 북한에 납치당하는 과정 역시 스릴 넘치는데다가 8년 뒤 서방으로 다시 넘어오는 탈출 과정 또한 영화 이상의 영화다. 오죽했으면 냉전 말기 미 CIA도 그들 부부에 관심 가졌을까?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목숨을 걸고 녹음했던 김정일 육성 녹음테이프를 미국에 제공하자 CIA는 보상으로 평생 연금을 지급했다. 지금이야 포털에서 잠깐 검색해도 김정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세상이지만, 이 모든 게 40여 년 전 신상옥 부부의 스릴 넘치는 삶의 결과다.
독재자 김정일의 숨겨진 고독을 본 인물
사실 60~70년대 충무로를 주름 잡던 명감독 신상옥과 명배우 최은희가 어느 날 평양에 납치당한 뒤 김정일의 영화 고문으로 활동했다는 것부터 거의 초현실적 상황이 아니던가? 이후 행적도 신상옥답다. 김정일의 전폭 지원 아래 만든 여러 편의 영화로 해외영화제 호평을 받았다. 최은희는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타고, 신상옥은 감독상도 탔다.
북한에서도 잘 나간 셈인데, 그때를 전후해 김정일 비밀파티의 단골손님이 됐다. 당시 당 간부들의 희한한 술버릇과, 그들이 떼창하며 부르던 '찔레꽃', '노란 샤츠 입은 사나이', '쨍하고 해 뜰 날' 등 유행가 목록까지 우리가 꿸 수 있게 된 것도 신상옥의 훗날 증언 덕이다.
"우리 오빠 잘 도와주세요"라며 다가와 인사하던 김정일 여동생 김경희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김정일은 노래는 거의 안 했지만, 파티 때 흥이 나면 지휘봉을 잡았다. 그때 여성 밴드 단원들은 감격했다는 듯 "김정일 동지 만세!" 외치며 깡총깡총 뛰는 걸 잊지 않았는데, 김정일은 조용히 신상옥에게 한마디했다. "저건 모두 가짜요. 거짓으로 하는 소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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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일과 함께 한 신상옥-최은희. /사진 자료=조우석 제공 |
김일성을 묘사한 영화 '조선의 별'에 대해서도 "그건 역사지, 영화가 아니다"라고 신상옥 앞에서 혹평했다. "정치와 경제 문화에서 우린 활력을 잃어버렸다"며 내밀한 고백도 했다. 그게 독재자 김정일의 숨겨진 고독이자 숨소리이고, 80년대 이미 죽어가던 북한의 실상이었다.
신상옥이 그런 체제를 탈출한 건 너무도 당연한 선택이었다. 문제는 그가 북한 돈 230만 달러를 갖고 탈출했다는 점이다. 북한엔 큰돈이었다. "영화 제작비로 준 그 돈을 떼먹으려고 우릴 배신했다"고 북한이 펄펄 뛰었다. 신상옥은 그걸 깨끗이 돌려줬지만, 당당한 조건을 내걸었다. "돈을 돌려 줄테니 당신들이 우릴 납치했다는 사실부터 인정하라."
그 한마디로 신상옥은 김정은에 멋지게 한 방 날린 것이다. 맞다. 그 전 서울에서 활동할 때 신상옥은 당대의 영화 연출 역량으로 본래는 박정희의 총애를 받았다. 신상옥의 회고에 따르면 박정희가 문화훈장을 주겠다며 호의도 표시했다. 그러던 둘이 틀어진 건 70년대 중반 이후다.
점점 강화됐던 영화 검열은 본래 까칠했던 신상옥을 급기야 화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예술을 할 수 있겠나?"하고 툴툴댄 게 권력의 미움을 샀다. 당시 신상옥은 영화감독협회장 신분이었으니 그런 발언이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그게 끝내 영화사 간판을 내리게 만들었다. 그 애증 관계를 털고 "미국 이민 갈까?" 하던 차에 터진 게 납치 사건이었다.
사실 그 직전 전 중정부장 김형욱의 도움으로 이민 신청까지 마쳤다. 그걸 전후해 신상옥 삶은 롤러코스터 인생이 됐다. 영화 찍던 사람에서 기막힌 영화 소재로 바뀐 셈이다. 그래서 신상옥-최은희 커플은 동서 냉전사의 희귀사례가 분명한데, 왜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는가?
딱 한 번 다큐로 제작된 바 있다. 외국 감독 로버트 캐넌의 '연인과 독재자'(2016년)가 그것이다. 단 납치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 우리가 원하는 건 신상옥의 삶 전체를 다룬 장편 극영화다. 당연히 우리 감독이 만드는 게 정상이 아닐까? 더구나 신상옥이란 캐릭터는 쉬 해독되지 않는데, 좌우 어느 진영인가 콕 찍어 말하기도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북한에 변화 바람을 몰고온 신상옥
"나는 모험적 좌익도 싫어하지만, 모랄 없는 우익도 싫어한다"던 게 그였다. 그런지라 감독에 따라 다양한 얼굴의 신상옥 묘사가 가능하다. 본래 그는 타고난 자유인이었다. 일테면 납치 전엔 창작의 자유를 목숨처럼 중시했다. 그 연장선에서 작곡가 윤이상과도 잘 통했다.
그래서 서독 방문 시절 둘이서 박정희 욕을 그렇게 신나게 했었다고 배우 신성일이 자기 책 <맨발의 청춘>에서 회고한 바 있다. 그렇다고 윤이상처럼 한쪽 사람으로 돌변한 건 아니다. 외려 북한에서 영화실험도 주저하지 않았다. 일테면 '철길따라 삼만리'를 만들며 북한 영화사 처음으로 남녀 키스 장면을 삽입했다. '사랑 사랑 내 사랑'이란 제목의 영화도 만들어봤다.
"북한 사람들을 피가 통하는 인간을 만들어야겠다"는 복안이었는데, 실제로 두 영화 개봉 때 북한 사회 처음으로 암표가 등장했다. 신상옥 스타일은 북한 탈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김정일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지만, 반공 선전의 도구로 활용되는 걸 굳이 원치 않았다.
그래서 탈출 직후엔 북한 비판을 자제했었다. 그러다가 탈출 9년만인 95년 '김정일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쓰면서 변모했으니 모색 기간이 꽤 길었던 셈이다. 편지는 개혁 개방으로 나가라는 충고였는데, 무엇이 변화의 계기였을까? 놀랍게도 천하태평하게 배 두드리며 사는 한국 국민들의 무책임 무감각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는 게 신상옥의 판단이었다.
어쨌거나 만년의 신상옥은 영화를 통해 세상을 비판하던 예술가에서 펜을 들어 세상을 각성시키는 경세가(警世家)로의 변신했던 게 사실이다. 내가 신상옥을 그린 영화 연출을 할 경우 그걸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신상옥이란 문제적 인물에 대한 해석은 열려있다.
어떤 영화 전문가에게 "왜 신상옥을 소재로 한 영화가 안 만들어지지?"라고 물었더니 "이 나라 영화판 분위기에서 가능하겠어요?"라고 대답했다. 무슨 뜻인지는 나도 대충은 안다. 하지만 이 나라 영화판에 이 화끈한 인물 신상옥을 놔두고 엉뚱한 일에 코 박고 사는 바보들만 득시글거리는 건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다. 참고로 6년 뒤가 그의 탄생 100주기다. /조우석 언론인
[조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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