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태 간사, "자유주의는 생명어린 삶의 준칙이자 나를 자유케 하는 원동력"
경제민주화, 복지포퓰리즘과 같은 정부개입주의 처방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취업하고 싶은 직장 1위로 공기업이 꼽히고, 공공성이라는 말이 아름다운 말로 여겨지며, 무슨 일만 생기면 정부가 나서 해결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대세입니다. 젊은 세대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부각시키면서 부자와 기업에 대한 반감을 고취시키는 일이 쉽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같은 사회 풍조에 대해 경계하면서 시장경제-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인정하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 번영에 기여한 시장경제-자유민주주의를 호의적으로 보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바로 ‘자유주의’ 운동입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자유주의에 약육강식, 승자독식, 부패와 탐욕이라는 왜곡된 이미지를 덧씌워 신자유주의라는 용어가 만들어지고 퍼져나가면서 그 입지는 더욱 위축되었지만, 그러한 현실에서도 자유주의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자유주의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학생과 대중들에게 쉽게 알리고자 하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유경제원’과 ‘미디어펜’은 그 노력의 일환으로 젊은 자유주의자들의 이야기인 <청춘, 자유주의의 날개를 달다>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자유경제원에서 최근 펴낸 젊은이들의 이야기입니다. 8월 5일 저녁 7시, 서울역 상상캔버스에서 북콘서트도 열립니다. [편집자주]

 

   
▲ 김규태 프리덤팩토리 재산권센터 간사

“선택과 충동은 누군가로부터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 자발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그 반대의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결국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말살할 것이다.”  -  Frederic Bastiat

생명의 길 한복판에 서있는

휴일 오후, 집 근처 광장을 지나다 6.25전쟁 사진전과 마주쳤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벌써 60년 전 이야기다. 부서진 교회 안에서 동생을 업고 기도하던 소녀, 폐허가 된 거리를 헤매던 고아, 강추위에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다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 난생 처음 보는 장난감에 환하게 웃음 짓는 아이들. 사진 속 아이들은 60년이 지나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다.

북한 김일성의 침략으로부터 이 나라 이 땅의 '자유' 를 지키기 위해 전쟁이 벌어졌다. 결과는 참혹했다. 수백만의 이산가족과 전쟁고아를 양산했던 민족상잔의 비극이었다. 그로 인해 대한민국은 가진 건 아무 것도 없는 '무' 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지금의 우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한강의 기적' 한복판에 서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죽음과 고초의 시대 한복판에서 피와 땀으로 생명의 길을 열었던 과거의 모든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얻게 된 이 땅 모든 이들의 자유와 생명, 재산을 각자의 맡은 자리에서 계속해서 지켜나가는 것이지 않을까.

   
▲ ‘청춘 자유주의의 날개를 달다’ 북콘서트

선택에 따른 결과, 그에 대한 책임

고1 시절 봄, 반장선거가 열렸다. 담임선생님이 급우 50명 중 입학성적 1등부터 10등까지 모두 반장선거에 강제출마하게 함으로 인해, 각자의 득표수를 적는 칠판은 말 그대로 도토리 키 재기였다. 그런데 10명의 도토리 후보 중, 유효표 11표를 얻어 10표에 그친 2위를 단 한표 차로 제치고 반장에 당선된 이는 바로 '나'였다.

이제야 솔직히 밝힌다. 중학교 3년 내내 임원으로 선출된 적 없던 나로서는, 내 득표가 매우 저조하리라는 걱정에 그냥 나 자신을 찍었다. 그런데 그 선택이 결국 날 반장으로 만들었다. 내심 반장이고 뭐고 싫었던 나였지만, 차마 급우들과 담임선생님에게 내가 나 스스로를 찍었으니 이 선거는 무효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쪽팔려서.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반장 직을 수락했고, 생각지도 못했던 고생과 책임감에 휩싸인 채 고1 시절을 보냈다.

태어나서 처음 선택의 기로에 섰던 순간은 아직도 기억난다. 질풍노도 청소년기 보다 훨씬 과거의 이야기다. 유치원 크리스마스 무도파티에 함께 할 짝꿍을 고르는 순간이었다. 난 내가 좋아했던 아이를 지목했지만 그 애는 나를 거부했다. 대신 다른 아이가 날 지목했고, 난 더 이상 짝이 없었기에 결국 날 지목한 아이와 짝이 되었다. 내가 좋아한 아이가 아닌 엉뚱한 아이와 짝이 되는 바람에 무도파티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두 번째 순간이 찾아오기까지는 좀 오래 걸렸다. 10년 뒤 중3 시절이었다. 특목고 입시를 준비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에서 호기롭게 특목고 시험을 준비했지만 보기 좋게 떨어졌다. 연합고사를 치르고 난 뒤, 배정 받은 집근처 일반고에 진학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던 과거 두 차례 순간과는 달리, 진짜 선택의 기로가 다가왔다. 고1 학업을 마치고 인문계 이공계 중 하나로 결정해야 하는 기로에서, 부모님은 이공계로 가 의사가 되기를 바라셨지만 피 보기를 죽음보다 더 싫어했던 나는 인문계를 흔쾌히 선택했다.

몇 년 뒤, 십대의 마지막 선택의 순간은 금세 찾아왔다. 수능 성적이 나온 뒤 지망할 학교를 고르는 일이다. 평소에 가장 염두에 두었던 학교를 선택했다. 이십대에 들어서니 십대와 크게 달라진 점은 하나 있었다. 시간관리든 인간관계든 그 어떤 것이든 십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택의 영역이 매우 커졌다. 하다못해 군대마저도 여러 갈래로 선택할 수 있었다. 심지어 도피도 가능했다. 물론 그러진 않았지만.

아버지가 잔소리 아닌 쓴소리를 하시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평소에 표현을 많이 하시고 대화도 많이 나누었던 아버지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규태야, 네 선택은 네가 책임져라. 그래야 후회도 보람도 모두 네 것이란다. 결과에 대해서 남 탓 할 수는 없지 않니.

이후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나의 것이었다. 행정학과를 선택한 것, 행정학과에 다니다가 도시공학을 접한 것, 졸업하자마자 공부를 이어 하지 않고 아버지 회사에 들어간 것, 그러다 내 회사를 차려 따로 나와 회사 대표로 일한 것, 연구원 두 군데를 거쳐 지금 몸담고 있는 곳에 이르기까지... 그 와중에 도시계획 공부를 하고 경제학 연구과정까지 다닌 것은 덤이었다.

삶의 결정적인 순간,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나에게는 경제학 연구과정에 다녔던 시간이 그러했다. 연구과정을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평소 염두에 두고 있던 교수님께 찾아가 상담을 요청했다. 모임에서 인사만 한번 드렸고 사석에서 따로 대화를 나눠 본 적 없는 분이었다. 학업 진로에 대해 상담을 받고 싶어 찾아갔는데, 교수님과의 얘기는 예상보다 길어져 한 시간을 넘겼다. 상담이 끝날 무렵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규태씨, 괜찮으면 내 연구실에 들어와 공부할래요? 난 연구실에 자주 머무르지 않으니 규태씨가 자유로이 학업에 매진할 수 있을 거에요. 필요할 테니 열쇠도 건네줄게요.”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선택의 기로에서 감사히 그 제안을 받았고, 교수님 연구실에 들어갔다. 이후, 연구실에 꽂혀있던 수많은 서적과 교수님과의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 몇몇 사상과 지식을 습득했다. 나는 그곳에서 자유주의를 접했다. 작년 봄, 김정호 선생님과의 일이다.

지금껏 별 볼일 없는 삶을 살아오면서 교훈 하나는 얻었다. 나쁜 선택이나 좋은 선택이란 없다. 선택은 그냥 선택일 뿐이다. 오로지 그로 인한 결과만 뒤따른다. 중요한 것은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본인이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망각하면 언제나 후회하고 항상 불평불만을 늘어놓게 된다. 각자의 인생은 각자의 것이지 다른 누군가가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겪어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택의 자유다. 결정할 자유 말이다. 선택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사실 자유가 아니다. 그냥 그렇게 이미 정해져 있는 길이다. 우리 부모님을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이러한 선택의 자유가 남들의 선택과 부딪친다는 것이다. 자유는 항상 남과 부딪칠 수밖에 없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이를 둘러싼 사람들의 필요는 차고 넘치도록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수요의 폭과 깊이는 자유롭고 개인별로 가지각색이다.

나는 왜 자유주의자가 되었나

작년 가을 어느 날의 일이다. 식사약속이 있어,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서 맨 위층 식당가로 올라가려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하3층, 지하2층, 지하1층을 차례로 거치면서 엘리베이터 안은 금세 찼다. 그러다 1층에서 남자아이를 동반한 가족이 마지막 정원수를 채우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출근길 지하철 마냥 콩나물시루였던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람들 틈바구니에 껴있던 그 아이는 아빠를 포옥 안으며 칭얼거렸다.

“아빠, 사람들 너무 많아서 싫어. 너무 답답해.”

아빠 왈.

“너도 사람이잖아. 쫌만 참아.”

아빠의 한마디를 들은 엘리베이터 안 사람들은 쿡쿡 거리며 웃었다. 나도 아이를 보며 싱긋 웃었다. 세상의 이치에 얼떨결에 맞부딪친 아이의 표정은 정말 볼만 했다. 자기만 답답한 게 아니라 남들도 답답하다는 것, 그렇기에 혼자서만 여유롭게 편히 있을 수는 없다는 점, 이를 남에게 강요할 수 없으며 때로는 자신의 불편함을 참아야 한다는 세상의 이치 말이다. 아이는 그 순간 몇 살은 훌쩍 먹은 것처럼 보였다.

선택, 결과, 책임, 자유는 모두 함께 맞물려 가는 선물꾸러미이지만, 이를 무리 없이 굴러가게 하는 유일한 도덕은 다른 이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다. 내가 받고 싶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하라. 성경에 나오는 준칙이지만,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황금률이기도 하다.

나는 왜 자유주의자가 되었나, 이제야 답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이유는 따로 없고 그냥 그렇게 살아왔다. 나에게도 엘리베이터 안 아이가 겪었던 그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나 또한 세상 이치에 맞부딪친 가운데 이를 거역하지 않고 순응하며 살았다. 계속 그렇게 살아왔는데 시간이 흘러 뒤돌아보니 내가 살아온 길이 자유주의임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물론 깨달음에 대해 감사할 분들은 분명 있다. 선택의 연속이었던 인생 가운데 발견한 자유주의자의 길은, 선택에 대해 책임지라는 아버지의 훈육과 자기결정 자기선택 자기책임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겸손으로 일깨워주신 김정호 선생님 덕분이다.

원리원칙, 죄책감과 두려움을 일깨워준 최초의 기억

갑작스레 생각난 기억 한 토막을 소개한다. 초등학교 1학년, 첫 시험을 보았다. 잘 풀어가다가 한 문제에서 막혔다. 4개의 그림으로 그려진 벼농사의 순서를 맞추는 문제였다. 김매기, 씨뿌리기, 모내기, 추수하기 등의 그림이 제각각 있었는데, 순서가 전혀 기억나지 않던 나는 대뜸 책상서랍에 있던 교과서를 꺼내어 내용을 확인하였다.

감독하던 담임선생님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컨닝이 잘못이라는 그 어떤 죄책감이나 두려움 하나 없이, 페이지를 넘겨가며 벼농사 부분을 발견하고서 당당하게 옮겨 적는 순간. 역시나. 선생님께 딱 걸리고야 말았다. 칠판 앞으로 불려나와 길게 혼난 다음 아이들 앞에서 손바닥 매를 맞는데, 어찌나 아프던지.

선생님은 매사에 원리원칙을 강조하시며, 온유함과 엄격함을 함께 지니셨던 분이었다. 그분의 말씀은 단순했다. 시험성적은 그간 공부했던 노력과 시간에 대한 보상이다. 시험 보는 과정 속에서 같은 반 친구들과 규태 너 스스로에게 떳떳하려면 정직해야 한다. 그런데 정직함을 지키는 규칙을 어긴 것은 잘못이다. 규칙을 어기는 잘못을 저질렀기에 벌을 받는 거다. 선생님은 앞으로 규태가 규칙을 존중하고 스스로 정직해지기를 바란다. 이것은 사랑의 매다. 선생님은 규태가 앞으로 더 잘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선생님께 사랑의 매를 맞은 이후, 학창시절 내내 컨닝하지 않았다. 원리원칙을 한번 마음에 품으면 쉽게 양보하지 않는 내 성격은 어쩌면 그 때부터 조금씩 형성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양보할 수 없는 자유주의, 나를 자유케 하는 원동력

집이나 가족의 품에만 있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함께 웃고 함께 떠들고 함께 싸워가며 30년 간 살아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살아온 가운데 지금껏 키워온 내 삶의 준칙, 남들에게 쉽게 양보할 수 없는 원리원칙은 자유주의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복잡성,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컨벤션, 자생적 질서나 신의 섭리 등을 전제로 하고, 그 가운데 드러나는 인간의 한계와 세상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설파하고 있다. 자유주의의 요점은, 개인의 선택과 충동은 누군가로부터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 의해 자발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 반대의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 뿐 아니라 생명까지 말살하리라는 점이다.

반대의 것을 주장하는 이들은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 완전하다고 전제하고 이 지상에 천국을 만들려 한다. 인간에게 이타적 심성을 심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통칭되는 모든 시도가 그렇다. 사회적경제, 공유경제, 경제민주화, 마을공동체로 대변되는 작금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상천국을 만들려는 시도는 언제나 지옥으로 끝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고, 다른 이의 마음을 자기 뜻대로 할 수 없으며, 신과 같이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성경의 한 구절이다. 이를 신앙적으로 해석하면 예수님으로 인하여 완성된 율법(말씀)과 십자가 보혈을 믿어야 죄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말이다. 반면에 이를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면, 나 자신을 분명히 알고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알아야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로 치환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부모세대가 피와 땀으로 열었던 생명의 길 한복판에 서있다. 그 길에 서있는 나 또한 생명의 길을 지키기 위해 내 자리에서 노력할 것이다. 남들에게 쉽게 양보할 수 없는 자유주의는, 나 자신과 세상 모두를 돌아보는 가운데 나를 자유케 하는 원동력이자 생명의 길을 지키려는 노력의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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