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현의 민족과 자유의 새지평(8)-자유가 틔우는 희망의 싹
민족주의는 우리 근현대사를 이끌어온 핵심 키워드이다. 일제의 36년간 식민지지배와 해방, 그리고 6.25북한의 남침, 남북분단 상황 등...민족주의와 민족이란 개념은 항상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의 이념갈등에서 가장 첨예하게 부딪치게 만드는 핵심용어이다. 자유와 자유주의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대혁명이후 본격 발현된 자유주의는 서구의 근현대사를 추동한 핵심 키워드였다. 자유는 천부인권, 사유재산보호와 함께 서구의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발달을 이끌었다. 반면 공산주의는 급진적 민족주의, 전체주의, 사유재산권 부정 등으로 인류사에서 끔찍한 재앙을 초래했다. 전우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한국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하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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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우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자유! 이 말에 목이 메지 않는 사람은 없다. 자유가 무엇인가? 행복하게 살기 위한 스스로의 소망이다. 그러자면 잘 먹고 잘 입고 잘 자야 한다. 이것은 나라가 잘 살아야만 가능하다.
최경환 신임 경제부총리는 경기부양을 위해 안간힘을 쓴다. 부동산 규제완화, 기업투자 활성화, 민간소득의 증대로 인한 소비증가 등을 거론한다.
사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기 전 우리가 자유, 자유주의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다면 이렇듯 벼락치기 공부하듯 하지 않아도 된다. 평소 자유의 진가를 알아주는 풍토가 아쉽다.
오늘 불편하고 불행해도 자유가 있다면 내일의 희망을 틔운다. 자유로 경제적 기초를 놓고 선진화를 이루며 민족 통일의 힘을 키울 수 있다.
먼저 경제성장·발전을 이루어야 한다. 빨리 가난, 결핍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도대체 경제성장이 필요하냐?”고 하는 사람도 있다. 밥은 왜 먹으며 옷은 왜 필요한가? 실업자 구제는 왜 필요하냐고 묻고 싶다. 본시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김일성 주체사상에 친화적인 사람은 경제성장에 별 관심이 없다.
공산주의 중국이 경제적으로 도약한 것은 등소평의 지도하에 공산주의 일변도를 버리고 자유주의적 개혁개방을 한 결과일 뿐이다. 결코 중국의 공산주의(사회주의)가 성공한 게 아니다.
빈곤층, 노약자, 고아, 심신장애자, 마약이나 알콜 중독자 등 사회적인 배려가 필요한 약자들에게 가장 구원의 손길을 잘 뻗을 수 있는 것도 경제건설의 기초인 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다. 자유주의 경제발전을 토대로 한 사회보장제야말로 어떤 사회주의 배급제보다 훌륭하기 때문이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 대한민국 사회가 사회통합을 하기 위해서도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 가난하게 되면 서로 머리를 쥐어뜯고 싸우게 된다.
조금 더 부자가 되면 조금 덜 싸우고 더 많이 부자가 되면 더욱 덜 싸운다. 동서고금의 진리다. 그리하여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이윤을 남기는 일을 해야 한다.
부국(富國)은 모든 시대 모든 나라의 소망이다. 그러자면 우리나라는 더욱 공업과 상업을 부흥시켜야 한다. 농업도 소득을 많이 올리는 사업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길은 중상주의다. 중상주의로 나가야 우리가 산다. 우리 민족 각성의 싹인 실학사상에 중상주의가 들어있는 이유다.
실학에서도 농학(農學), 상학(商學), 기기학(汽機學), 공예학(工藝學)을 중시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 아니라 상공농사(商工農士)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주식회사로 대표되는 기업은 국가발전을 선도하는 큰 과제를 짊어져야 한다. 그리고 기업이 회사를 훌륭히 경영하여 세금을 많이 내는 것 자체로 마땅히 애국애민(愛國愛民)하는 것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여기에 인색하고 기업가를 적대하면 기업하려는 사람이 외국으로 도망간다. 우리나라 청년 대신 외국의 실업자를 고용하여 배불린다.
물질적으로 경제적 풍요를 기약하는 자유, 자유주의는 정신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다. 사람은 위대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약하기도 하여 신앙을 갈구한다.
자기 능력과 노력만으로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아서 무언가에 기대야 한다. 그런데 남한테 기대기보다는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게 제일이다. 말도 통하지 않던 구석기 때부터 그랬다. 동굴에 벽화를 그리고 어제까지 함께 하던 사람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영원한 세계와 연결하고자 했다.
죽음을 맞아 그저 잊혀지기에는 너무나 애석한 생명이기에 돌무덤을 만들고 저 세상 너머의 복을 빌었다. 이 믿음 없이는 도저히 불가사의한 일들을 이해할 수 없고 슬픔을 위로할 수 없었다.
지금도 아프리카 오지에서는 원시종교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늘과 땅의 이치를 지배하는 초월자와 연결하려는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고통과 슬픔을 딛고 일어선다. 이승에서의 삶의 의미도 생기고 착하게 살아가고자 애쓴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인간의 본질은 변할 수 없고 위대한 인간도 속을 들여다보면 나약한 자아 존재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한 발짝만 세상에 나가도 세상사에 얽매이고 만다. 그 세상사라는 것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 얽혀서 드렁칡처럼 살다보면 자기 의지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 그러자면 자연 세속의 힘에 굴복하기 십상이고 세상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럴 때 신앙은 참으로 큰 힘이 되어준다.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신앙은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현실은 팍팍하다. 결코 이상에 미치지 못하기에 믿음을 원한다. 이성(理性)이 중요하지만 이성(理性)이 미치지 못하는 신비영역이 있음도 받아들여야 겸허한 사람이다.
자유라는 이성과 믿음이라는 신앙은 충분히 각각의 사명이 있고 또 서로 존중해야 한다. 우리 한민족은 5천년 역사 동안 유불선, 기독교 등 신앙과 함께 해왔다. 우리 한민족처럼 고통을 많이 겪고 한이 많은 민족도 드물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종교가 더욱 친근하다.
그런데도 공산주의의 창시자 마르크스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했다. 곪아든 자본주의를 수술하지 않고 아편처럼 진통제를 주어서 달래기만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진, 홍수, 맹수의 습격으로 원시인이 죽음을 맞은 것이 신앙 때문이 아니듯 근현대 사회의 모든 문제들도 종교의 탓은 아니다.
무산자 혁명만을 바라보는 외눈박이의 눈에서는 민중혁명 아닌 모든 것이 적으로 보이는 착시(錯視)이다. 민중혁명 아닌 모든 것 중에서 왜 유독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지목했을까? 종교가 그만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터이리라.
세상살이에서 못다푸는 한의 빈 공간을 위로로 채워주는 종교가 마르크스는 얄미웠을 것이다. 세상살이의 한을 모두 무산자의 붉은 혁명열기로 채우고 싶어하는 공산주의자는 그래서 종교를 싫어한다.
마르크스 이후에도 인간의 영혼을 지배하고자 하는 이는 타인의 신앙의 자유를 싫어한다. 즉 폭압적 지배자가 신앙을 싫어하는 법이다. 신을 믿으면 자신의 지배력이 약해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자신을 신으로 모시기를 바라는 그야말로 가장 악하디 악한 마음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 영혼을 훔치려는 이 시도야말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최악의 범죄다.
삶에 지치고 죽음 앞에서 두려운 우리는 모두 신앙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 남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도 않고 가장 근원적인 욕구인 신앙의 자유는 하늘이 부여한 우리의 타고난 인권이다.
변화무쌍한 인간을 믿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는 신에게 헌신하고 싶은 욕구에서 우러나기에 자신을 정화시키고 사회를 아름답게 한다.
사람을 믿고 사랑하더라도 신을 매개로 한 진정한 신뢰 위에서 변하지 않는 인간관계이기를 원한다. 참으로 신앙의 자유는 우리를 동물의 비참함에서 천상(天上)의 높은 세계로 구원해올리는 기적의 샘이다.
자유세계가 경제건설, 영혼의 자유에서 건져올린 풍요(豊饒)는 사회복지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 사회도 높은 이혼율로 인한 가족해체, 출산기피, 비싼 사교육비, 산업재해의 위험 속에서 사회적 안전망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래서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복지라는 이상이 훌륭해도 현실의 추진력이 없으면 안된다.
현실의 재원(財源)이 없으면서 이상적인 복지를 하자는 것이 바로 복지포퓰리즘이다. 복지 포퓰리즘은 이미 남들 나라에서 폐해를 경험했다. 후발 주자인 우리가 늦게 출발하는 잇점이라도 누리려면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한다.
어린애들은 누구나 공짜를 좋아한다. 그러나, 어른들은 세상에서 그 무엇도 공짜란 없다는 것을 안다. 짜장면을 공짜로 얻어 먹어보시라. 그 뒷끝이 어떤가? 한 달쯤 지나면 전화가 온다. 공짜로 먹은 것의 몇 십배의 댓가를 요구하는 전화다.
가축들은 공짜로 얻어먹는다. 먹이를 주는 주인은 겉으로 인자하게 보이지만 잔혹함을 숨기고 있다. 이들의 진짜 모습은 잔칫날 살찌운 돼지나 소를 도살할 때 드러난다.
파멸도 추락도 다시 일어나면 좋다. 미끄러져도 교훈을 얻어 재기하면 한 때의 쓴 약으로 삼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추락하면 다시 일어나기 어렵다.
다른 나라들이 우리가 일어서게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가 파멸하고 추락하면 우리의 자식들은 아프리카의 소말리아, 남미의 파라과이, 아시아의 방글라데시에 가서 구걸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가장 걱정인 것은 지난 역사처럼 다시 중국이나 일본의 노예로 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제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빌고 빈다.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는 공짜에 열광하는 자들과 맞서 싸웠다. 그 어려운 전쟁에서 위대하게 살아남아 우리에게 기적적인 풍요를 남겼다. 그 싸움이 없었다면 남한도 공산주의로 되고 우리는 개나 돼지처럼 주인에게 잡아먹히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독재자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눈물을 흘릴 게다.
여기에서는 재능도, 재산도 무용지물이다. 오로지 노예의 순종, 굴종으로만 살아남을 수 있다. 바로 공짜는 한편에서 시민의 세금을 올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공짜 이념을 설파하는 거짓 선지자, 선동꾼의 호주머니를 채운다.
복지에는 돈이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많은 돈이 필요하다. 수 천억 또는 수 조원이 들어간다. 수 천억, 수 조원을 벌지 못하면 안되는 게 복지다. 그러니 무조건 돈 달라고 하는 복지는 있을 수 없다. 재원마련 없는 복지, 돈벌이가 없는 상태의 복지는 공산주의 나라에도 없다.
우리나라에서 복지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담배가격 인상, 사회보험료 인상, 새 사회보험종목 신설 등 별 방안이 다 나오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든 국민이 세금을 더 내야만 한다. 복지는 정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해야 한다. 혼자 사는 노인들, 고아, 선천적·후천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 정신박약자, 중증환자, 소년소녀 가장을 위해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이것이 맞춤형 복지이다.
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보육, 고령자연금 등은 정말 가난한 사람들에게 갈 돈을 중류층에게 주려는 것이다. 내가 당장 50만원 받자고 정부가 국민세금 올리도록 압박해서는 안된다.
나라 살림을 적자로 만들면 제2의 외환위기가 오고 나라가 망한다. 나라가 망한 다음, “그 때 50만원씩 안 받을 걸…” 후회해도 소 잃은 후의 외양간 고치기다.
원래 복지를 가장 강조한 것은 공산주의다. 북한도 예외가 아니었다. “기와집에 살고 쌀밥과 고깃국을 먹게 하는 것”이 최고라고 했다.
그러나 공염불이다. 복지라는 평등이념은 인간의 잘살고 싶은 욕구, 혁신하려는 의지를 긍정하는 성장의 푸른 숲에서만 솟아날 수 있는 샘물과 같다. 그러니 복지를 하더라도 무리한 포퓰리즘에 빠져서는 안된다.
우리는 자유가 틔우는 싹을 잘 길러 울창한 숲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부강한 힘을 길러 자기 힘으로 살아가기 힘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지속가능한 복지를 해야 한다.
바로 자유의 힘이 성장과 복지, 통일, 행복이라는 희망의 싹을 틔운다. 그리고 빈부의 차이도 줄인다. 평등도 가능하게 한다. /전우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