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 (25) - 그리스 신화의 총체적 입문서, 그리스인에게 꿈과 희망, 도전정신을 심어준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 아폴로도로스(BC 180?~?)의『그리스 신화』
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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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
그리스 신화는 우주와 신들의 탄생에서부터 인간 영웅들과의 희로애락까지 포괄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 신화를 빼놓고 그리스 문명과 인류 문명의 기원을 설명하거나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들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우리의 삶의 일부분으로 체화되어 있다. 음악, 미술, 건축, 조각, 체육, 정치, 철학, 종교 등 어느 분야도 그리스 신화의 모티브와 얽히지 않은 영역이 없다.
아폴로도로스(Apollodoros)는 이러한 수많은 그리스 신화들을 빠짐없이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해냈다. 그는 호메로스(Homeros)나 헤시오도스(Hesiodos)와 같은 서사시인도 아니요, 페레퀴데스(Pherekydes)나 아쿠실라오스(Akousilaos)와 같은 산문작가도 아니다. 그는 문법학자였다. 문학작가가 아닌 그이기에 오히려 여러 신화의 출전을 꼼꼼히 확인하고 신뢰할만한 출전을 선별하고 인용하며 신화를 종합적으로 잘 요약 정리해냈다.
이 책 『그리스 신화(Bibliotheke)』의 필사본에 ‘아테나이 출신 문법학자 아폴로도로스의 도서관(Bibliotheke)'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는 바로 이 책의 특성을 말해준다. 그리스 신화를 총체적으로 수집 정리한 하나의 도서관과 같다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아폴로도로스는 그리스의 지역별 신화와 주요 영웅들의 가계도까지 상세하게 채록하고 있다. 그가 기원전 2세기에 활동했으니, 그때쯤이면 그리스 신화를 정리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성숙되어 있었을 것 같다. 기원전 4~5세기 그리스 황금기에 신화를 소재로 한 수많은 문학작품이 탄생했으니 말이다.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이자, 신과 인간이 부딪히고 소통하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그리스 신화는 신과 그리스인들의 도전과 갈등, 사랑과 질투, 애환의 스토리를 담고 있다. 이 이야기들은 호메로스와 같은 위대한 작가에 의해 긴 호흡의 서사시로 전개되기도 하고, 헤시오도스와 같이 짧은 서사로 나타나기도 한다.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가 전자의 예이고, 『신들의 계보』, 『일과 날』이 후자의 예다. 또 다양한 비극작가들에 의해 신화의 골격에 작가적 상상력이 가미되어 새로운 신화로 각색되기도 했다.
그리스 신화의 구체적인 이야기는 오랜 세월을 두고 여러 작가에 의해 작품화 되었다. 따라서 신화의 골격은 같지만 세밀한 부분에서 작가마다 달리 기술하는 경우도 많다. 이 책 『그리스 신화(Bibliotheke)』는 개별 신화의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각 신화의 핵심적인 줄거리를 정리하고 요약하여 그리스 신화의 전체 목록을 파악하고 개관할 수 있도록 한 입문서 성격을 띤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가 담긴 개별 작품들을 이미 읽은 독자들의 경우, 이 책을 통해 신화의 전후 정황을 파악하거나 여러 작품 속에 담긴 신화에서 부분적으로 달리 기술된 대목이나 또는 해석이 상이한 부분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물론 아폴로도로스가 채택한 원전이 해당 신화 가운데 가장 정통의 기술이라고 단언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이 책이 개별 신화들이 기술하고 있지 않은 부분을 다른 작품 속에 나타난 신화의 내용에서 차용하여 완성시켜 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예를 들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의 단 며칠의 상황 속에 20여년의 전쟁의 전개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일리아스』는 파리스가 헬레네를 유혹해서 트로이로 데려가는 과정이나, 전쟁의 준비, 그리고 전쟁의 뒷이야기를 생략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일리아스』 전후 이야기를 다른 여러 작품의 출전을 인용하여 보충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여러 신화의 총체적 전말을 파악하게 해준다는 점이 이 책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호메로스가 『오뒷세이아』에서 기술하지 않았던 오뒷세우스와 페넬로페의 상봉 이후의 이야기와 새로운 방랑과 죽음의 결말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이 책을 그리스 신화의 백과사전으로 활용하며 서사시나 그리스 비극 작품의 연속적인 이야기로 대조하고 확인하면서 읽으면 더욱 흥미로울 것 같다. 특히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수많은 이름, 지명은 길고 특이해서 짧은 음절의 이름을 쓰는 우리로서는 기억하기가 매우 어렵고 혼동하기 쉽다.
또 신들과 영웅들의 계보는 더욱 복잡해서 신화를 읽는 와중에도 자주 친족 관계를 재확인하지 않으면 헷갈리기 일쑤다. 이 책은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부록으로 복잡한 신과 영웅들의 가계도를 싣고 있고, 제우스, 포세이돈, 헤라클레스의 수많은 교합상대와 그 자녀들의 일람표를 제시한 것도 유용하다.
이 책의 백미는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에 대한 기술이다. 헤라클레스가 잠시 미쳐 아들들을 살해한 죄를 씻기 위해 미케네(Mycenae)의 에우리스테우스(Eurystheus) 왕의 종이 되어 그가 부여한 12가지 과업을 차례대로 수행해 나가는 내용이다. 헤라클레스의 뛰어난 괴력과 영웅적 활약상이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헤라클레스는 신들의 왕인 제우스와 테베에 사는 암피트리온의 아내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헤라클레스는 반신(半神)이었던 셈이다. 그는 12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나면 불사(不死)의 몸이 될 것이라는 델포이의 신탁에 의해 영웅적 모험에 나선다.
헤라클레스의 담대한 도전과 성취는 그리스인들에게 무한한 도전정신과 개척정신의 추구를 통해 인간 역량이 최고의 탁월성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가 그리스인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주는 사랑받는 영웅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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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포이 아폴론 성역에 세워진 시프노스 보물창고의 북쪽 프리즈 부조에 묘사된 헤라클레스, 헤라클레스는 초인적인 무용(武勇)으로 올림푸스 신족(神族)과 거인족의 전쟁에 올림푸스 신들의 편을 들어 거인족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다. 델피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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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을 취하고 있는 헤라클레스 청동상, 헤라클레스를 상징하는 지물(持物)은 사자 가죽과 뭉둥이다. 파리 르부르 박물관 ⓒ박경귀 |
이 책이 많은 그리스 신화의 전말을 잘 정리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책을 읽고 그리스 신화를 모두 읽었다고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이 책이 요약 정리한 내용만으로는 그리스 신화의 진정한 묘미를 제대로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기에 소개된 신화의 줄거리에서 흥미로운 모티브를 발견하고 개별 신화가 자세히 담긴 작품을 직접 읽어나가는 게 바람직하다.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신들의 계보』, 『아르고호 이야기』를 읽어보자. 소포클레스의 비극의 개별 작품인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엘렉트라>, <필록테데스>, <아이아스>에도 신화가 펼쳐진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아가멤논>,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테베의 일곱 장수>의 이야기도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를 통해 이아손과 메데이아의 신화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도 있다.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의 동명의 비극 작품인 <엘렉트라>를 통해 두 사람의 서로 다른 관점을 확인해 볼 수도 있다. 그리스 신화의 작품들을 읽을 때, 그리스 신화의 백화사전인 아폴로도로스의 『그리스 신화(Bibliotheke)』를 옆에 두고 수시로 펼쳐보면 즐거운 신화여행이 될 것 같다./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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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도서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아폴로도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2011, 7쇄), 4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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