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명량' 자유와 경쟁이 빚어낸 기업가정신 걸작품, 생산적 경쟁은 필수

전우현의 민족과 자유의 새지평(9)-자유가 뿜어내는 민족의 파워

민족주의는 우리 근현대사를 이끌어온 핵심 키워드이다. 일제의 36년간 식민지지배와 해방, 그리고 6.25북한의 남침, 남북분단 상황 등...민족주의와 민족이란 개념은 항상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의 이념갈등에서 가장 첨예하게 부딪치게 만드는 핵심용어이다.  자유와 자유주의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대혁명이후 본격 발현된 자유주의는 서구의 근현대사를 추동한 핵심 키워드였다. 자유는 천부인권, 사유재산보호와 함께 서구의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발달을 이끌었다. 반면 공산주의는 급진적 민족주의, 전체주의, 사유재산권 부정 등으로 인류사에서 끔찍한 재앙을 초래했다.  전우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한국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하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 전우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영화 ‘명량(鳴梁)’이 관객 1,000만 명을 돌파했다. 감독과 제작자가 관객이 열광하는 임진왜란의 스펙터클 등 경쟁력(競爭力)있는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일 게다. 이처럼 어떤 분야에서나 ‘경쟁력’이 있으면 성공한다. 그 ‘경쟁력’은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고 기쁨을 안겨줄 수 있는 힘(수요 충족력)이다.

누구나 경쟁에 노출되기를 싫어한다. 시달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쟁은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먹을 것, 입을 것, 가지고 싶은 명예·권력은 한정되어 있고 인간의 욕구는 무한한 탓이다. 오늘의 인간은 옛적부터 어제까지 땀흘린 경쟁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데 경쟁을 겪으면 그 후에 자신의 능력이 커져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사회나 국가도 그렇다. 기업은 더하다. 우리나라 경제성장을 위하거나 기업의 체질을 강하게 하려면 경쟁에 노출시키면 된다. 물론 경쟁력이 없는 기업은 쫓겨날 것이다. 그러나, 살아남은 기업은 이전보다 훨씬 더 영리하고 효율적인 조직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흔히 말하듯 자유주의 사회에서의 경쟁은 약육강식의 무자비한 동물적 경쟁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왕정이나 봉건사회, 계급투쟁의 공산주의 사회야말로 약육강식의 무자비한 경쟁사회다. 거기에서 인정받으려면 관리(官吏)가 되는 길 밖에 없다. 공무원 즉 관리가 되면 모든 것이 보장된다. 그러니 사색당쟁(四色黨爭)으로 무자비하게 반대당파를 모함하고 공산당원이 되면 당원이 아닌 사람과 신분 자체가 달라진다. 이것이야말로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라는 무자비한 생존경쟁을 부른다. 그리고 비생산적이다.

그에 비하면 자유주의 사회는 ‘타인의 필요를 충족시켜주기만 하면 누구든지 성공할 수 있는’ 경쟁을 한다. 그러니 그 경쟁의 방법이 매우 다양하다. 또, 무언가 좋은 성공 방법을 찾아내려는 생산적인 경쟁이다. 공부로 경쟁할 수도 있지만, 돈버는 것으로도, 축구‧야구‧골프‧피겨스케이팅같은 스포츠, 음악‧미술‧연극‧영화 같은 예술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경쟁방식이 있다. 공부를 잘하면 박사, 대학교수, 의사, 법조인, 관료가 되고 돈을 잘 벌면 사업가가 된다. 운동선수, 예술가로도 얼마든지 1인자가 될 수 있다.

봉건주의 조선이나 북한 공산주의 체제보다 훨씬 기회가 많이 주어진다. 또, 패자부활전이 있는 경쟁이다. 물론 모든 경쟁은 피와 땀을 다하여 싸워야 하는 처절한 면이 있다. 그래도 자유주의 사회의 경쟁은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가 아니다. 또 언제든지 아차 하는 사이에 순위가 뒤집혀질 수 있다. 이것이 무자비한 경쟁인가? 이 정도의 경쟁도 없는 사회는 없다.

특히 우리 한국 사회가 발전하려면 국내경쟁을 회피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인간사회에서 어차피 경쟁이 피할 수 없다면 잘 살게 하고 인류진보에 기여하는 생산적 경쟁을 해야 한다. 아무리 보아도 자유민주사회의 경쟁이 인간적이고 쓸모 있는 경쟁이다.

우리 호주머니가 두둑해지게 부자가 되려면 단순히 종자 돈(자본)이 많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토지, 노동과 자본 3박자를 결합하고 그 생산요소를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재주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 천재적인 사람은 기업가다. 산업혁명 이후 기업가들이 증기기관, 내연기관, 전기, 기차, 자동차, 비행기, 세탁기, 스토브, 전자레인지, 컴퓨터, 산업용 기계, 핵에너지 등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의 틀 없이는 경제인도 맥을 못춘다. 물고기도 깊고 푸른 물이 없이는 유연하게 헤엄을 못치는 법이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건국을 통해 이런 깊고 푸른 물을 만들었다. 북한은 인민민주주의 계획경제로 틀을 잡은 반면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을 만든 것이다. 여기에서 가르마가 확실해졌다.

   
▲ 영화 '명량'은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빚어낸 명작이다. 자유와 경쟁속에서 이루어진 대박작품이다. 기업가정신은 자유민주주의체제속에서만 꽃필 수 있다. 지금처럼 전방위 규제로 기업과 기업가정신을 폄훼하면 투자와 일자리가 줄어든다. 본사도 동남아등으로 옮길 것이다. 경쟁은 필수적이다. 자유주의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좁은 통발 속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관료가 계산한 만큼만 지시대로 협동농장에서 생산하는가, 푸른 바다에서 개인의 주도적 판단으로 생산하는가의 차이가 생겨났다.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은 위험이 따른다. 그러니 망하는 회사도 있다. 그러나, 무수한 시행착오로 노하우가 생기고 생산방법과 유통의 혁신이 생긴 것은 북한의 협동기업(協同企業)이 아니라 남한의 주식회사(株式會社)였다.

비록 국내에서는 사회에서 혼이 나면서도 그나마 밖에 나가 A학점을 받아 온 것은 우리 기업이다. 이는 특혜성장만으로는 안되는 일이다. 이것이 특혜로만 가능했다면 다른 외국기업, 외국정부도 다 그렇게 했을 것이다. 기업의 횡포, 부정과 비리에 대해서는 엄벌하더라도 우리나라가 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 틀을 유지해 주어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요즘 세태는 어떠한가? 지금은 70년대 위험을 감수하고 중동 열사(熱沙)의 건설시장에 뛰어든 정주영 같은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안보인다. 젊은 대학생은 회사를 만들어 경영해보겠다기보다 안전한 공무원이 되고 공기업에 가고자 한다. 글쎄 별로 생산적이지 않은 공무원, 공기업 직원되는 게 피끓는 20대의 희망 1순위라니. 나라가 망하는 징조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간이 콩알만한 사람들만 있어서인가? 아니다. 기업하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인은 원래 신명(神命)의 민족이다. 최치원 선생도 우리 민족이 신바람 민족이라고 했다. 신바람 나는 환경만 만들어주면 죽을지 살지 모르게 미치도록 몰입하는 게 우리 한민족의 최고 장점이다. 그만큼 열심히 드라이브한다. 김연아, 싸이, 류현진의 열정을 보라.

그런데, 요즘 정부, 국회는 긍정(포지티브)보다는 부정(네거티브)마인드다. 죄지은 사람 혼내더라도 열심히 땀흘리는 사람은 일할 맛 나게 하는 법률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 법을 만드는 기초는 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 정신을 이해하는 마인드다. 생각이 자유주의에 적대적인 국회의원이라면 기업을 적대할 것이다. 더 큰 기업에 대해서는 더 적대할 것이다. 그 결과는?

큰 기업을 안 만들고 작은 기업도 창업하지 않는 것이다. 돈이 있으면 은행에 넣어둘 게다. 그 이자로 여행이나 하며 여생을 편히 살고자 마음먹는다. 만약 기업을 하더라도 계약의 자유를 더 허용하는 타이, 베트남, 말레이시아로 회사를 옮길 것이다. 옮겨간 회사는 본사만 한국에 있지 이미 한국회사가 아니다. 그 회사가 이윤을 남겨도 타이, 베트남, 말레이시아 근로자의 배만 불린다. 그 책임이 매국적인 기업가에게 있나? 글쎄다.

우리는 누구나 잘살고 싶어한다. 또, 중국과 일본에 얕보여서는 안됨을 절실히 느낀다. 신앙의 자유도 소중하게 생각한다. 어려운 이웃도 돌보아야 한다. 세계에서 번듯하게 존중받고 싶어한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의 주춧돌인 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에는 너무 인색하다. 엘리트일수록 자유적대적이다. 자유주의를 깎아내리는 것이 지성인다운 듯 여긴다. 자유주의에 대한 근거없는 이 편견은 결국 부메랑으로 우리 가슴에 상처로 꽂힌다. 우리를 가난의 틀에 가둘 것이다.

중국‧일본‧미국‧러시아의 멸시(蔑視)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어려운 이웃은 더욱 고통스런 빈곤에 갇힌다. 양극화(兩極化)는 심해지고 여유로운 이웃의 따스한 손길은 줄어들 것이다. 이것을 원하는가? 전근대사회에서는 왕자(王子) 공주(公主)도 어릴 때 엄청나게 사망했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가져온 근대사회에서는 서민(庶民)의 아기도 질병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모든 사람이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장수(長壽)를 누렸다. 이는 자유주의가 모든 사람을 열심히 일하게 하고 그 결과 새로운 발견, 발명이 가능한 덕택이다.

흔히 반(反)자유주의자들이 상상하듯 물질의 완전평등한 분배는 불가능하다. 설령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도덕적 타락을 가져온다. 사회, 국가, 민족 전체에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한 방식의 분배는 심지어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역사상 단 한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자유주의에 대한 편견(偏見)과 오해(誤解)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런 풍토에서 나오는 국제정치적·문화적 여유는 강대국인 중국, 일본에 굴복하지 않도록 자존을 드높일 것이다. /전우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바른사회시민회의 상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