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세정 소재 불산 국산화 막은건 정치권과 환경·시민단체
   
▲ 정숭호 칼럼니스트·전 한국신문윤리위원
"위기는 기회다"는 좋은 말이다. 실의와 좌절에 빠진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을 북돋워주는 말이다. 일본의 대한 수출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과 기업인 간담회에서도 이 말이 나왔다. 대통령이 먼저 말했는지 기업인들이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행사를 보도한 대다수 언론매체가 이 말을 제목으로 달았다. 다함께 힘을 모으자는 뜻에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 말이 그다지 감동을 자아내지 못하고 있다. "위기를 누가 만들었나?"라는 의문 때문이다. 12일 아침 여러 신문이 칼럼과 사설로 다룬 불산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이번 위기는 우리(대한국민)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것 말고도 우리 내부적 위기 발생 원인은 많겠지만.

불산은 불화수소를 물에 녹인 거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세정(洗淨)하는 데 꼭 필요한 소재다. 이게 없으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못 만든다. 삼성 이재용 부회장이 청와대의 부름도 뒤로 하고 지난 7일 일본으로 황급히 떠난 것도 이걸 구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는 이튿날 귀국할 예정이었으나 11일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뭐가 잘 안 풀리는 모양이다.
 
이 귀한 불산공장은 우리나라에서는 지독한 혐오시설로 대접받고 있으며, 글로벌 석유화학업체가 대규모 불산공장을 남해안에 지으려다가 무산되기도 했다. 그 이면에는 대통령과 여권 인사들과 환경단체들의 무지몽매와 조폭 수준의 횡포와 가짜뉴스와 괴담 유포가 있었다는 게 내가 읽은 칼럼과 사설의 내용이다. 사실이면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먼저 대통령. 대통령은 첫 대선 도전 때인 2012년 9월 경북 구미에서 4명의 사망자가 숨지는 불산 유출 사고가 나자 사고 열흘 뒤 현장을 찾아 방독면을 쓰고 말라붙고 비틀어진 고추밭에서 사진을 찍었다. 또 트위터에 "목과 눈이 따갑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기침을 해댔다"라고 썼다.

   
▲ 문재인 대통령과 국내 대기업 30개사의 총수 및 최고경영자들이 10일 청와대에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대한 대응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불산은 휘발성이 강해 열흘이나 공기 중에 남아있을 수 없다. 이게 전문가들의 말이다. 그러니 열흘 지난 뒤에 찾은 현장에서 목과 눈이 따가웠다는 당시 대통령 후보의 글은 괴담이고 방독면을 쓴 그의 사진은 괴담이 진실로 받아들여지게끔 하기 위해 동원된 과장이라는 의심을 받는다.

어쨌든 이 글과 사진으로 구미 불산 공장은 혐오시설로 낙인 찍혔고, 이후 연산 13만톤 규모의 불산 공장을 여수 부근에 신설하려던 국내 공기업과 외국 석유화학업체의 투자유치협약도 불산처럼 휘발돼 공중에서 사라졌다.

2013년 1월에는 삼성전자 화성공장에서 불산 유출로 협력업체 직원 1명이 숨졌다. 이때는 당시 야당이던 민주통합당(현 더불어 민주당)이 설쳤다. 구미 사고에 화성 사고가 겹치자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을 개정해 유해물질 취급 공장이 충족해야 할 안전기준을 기존 79개에서 413개로 무려 5배 이상 늘였다.

사업장마다 최소 수억 원씩 시설 개선비를 투입해야 할 상황이 오니 국산화를 포기하고 수입하는 쪽을 택했다. 재계는 개정 화관법으로 인해 국산 소재 개발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됐다며 재개정을 건의했지만 당시 야당의원들은 코웃음만 쳤다. 
 
결국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대통령과 여권 인사들, 여권 인사들과 서로 얽히고 설킨 '환경단체'와 '시민단체'들이 기업의 손발, 몸뚱이까지 묶어놓고는 지금 와서는 왜 기업들이, 특히 삼성이 그 많은 돈을 벌면서 왜 진작 불화수소 국산화에 나서지 않았냐고 몰아치고 있는 거다. "위기는 기회!"라면서. 참 우습고도 서글픈 현실이다. 위기를 만든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게 말이다.

"위기는 기회!" 이 말은 1997년에는 IMF를, 2009년에는 국제금융위기를, 2016년에는 대통령 탄핵사태를 극복하게 해줬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의지해 바닥에서 뛰쳐나왔다. 이 좋은 말이 다시 감동적이 되려면 먼저 위기를 만든 사람들이 반성하고 고집을 버려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이 말 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위기 자체가 사라지거나 크게 줄어들 것이기에. "우리나라는 위기 공화국"이라는 자조도 없어질 것이다. /정숭호 칼럼니스트·전 한국신문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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