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들 열심히 안한다" 지적에 김대중에 대우에 나쁜 보고서 매일 올려

   
김우중 전 대우회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97년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대통령에게 수출드라이브로 IMF체제를 조기졸업하자고 대담한 제안을 했다. 연간 무역흑자 500억달러씩 총 5년간 2500억달러를 올리면 IMF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제안이었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김회장의 수출드라이브 제안에 귀를 기울였다. 만일 관료들이 주장하는 철저한 구조조정, 즉 은행과 대기업 해체및 매각 등 구조조정을 받아들이면 대한민국이 월가의 조종을 받는 IMF관리체제로 들어간다는 점을 우려했다. 민족주의적인 시각에서 담대한 제안을 한 것.

매일 부정적인 보고서만 올라오는 것에 비해 김회장의 희망적인 이야기에 기분이 호전되기도 했다. 김대중대통령은 김회장에게 "경제대통령이 돼달라"고 했다. 

김회장은 차기 전경련회장으로 내정된 후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민족주의적 해법을 내놓았다. 그게 바로 연간 무역흑자 500억달러 달성이었다. 대우와 삼성 현대차 등 30대그룹이 주동이 돼서 수출확대를 하면 조기에 IMF체제에서 졸업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전망을 제시했다.  대우그룹부터 솔선수범했다. 과감하게 그룹제품은 물론 중소기업들의 제품을 해외로 실어내보냈다.

김대중 정부관료들은 김회장의 수출드라이브정책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경제관료들은 97년에 고작해서   28억달러의 흑자를 달성할 것으로 예상했다. 김회장은 당시 신흥시장 등 수출시장 여건이 좋다면서 수출을 많이 하면 IMF와 월가의 신탁통치에서 벗어날 것으로 봤다. 경제민족주의적인 제안을 한 것이다. 이는 당시 이헌재 금감위원장, 강봉균 경제수석 등 관료들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었다. 관료들은 IMF의 요구대로 철저한 구조조정을 주장했다. 김회장의 수출드라이브를 통한 IMF 신탁통치 조기졸업과 관료들의 구조조정우선론이 첨예하게 대립한 것.

다음은 김우중회장이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 교수와의 대담을 통해 펴낸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외환위기 당시 무역흑자 500억불 달성 제안을 둘러싼 비화와 관료와의 갈등을 털어놨다.

   
신장섭 교수
다음은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수출드라이브 부문이다.

김우중 회장은 한국 금융위기 초반부터 대우차가 성공 직전에 있고 GM이 다급해서 대우에게 자동차 합작을 다시 하자고 제안했다는 사실을 정부 측에 여러 차례 얘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우 해체 후 국내외에 자리잡고 있는 ‘정사(正史)’는 이와 정반대로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금융위기 처리과정을 상세히 기술한 것으로 평가받는 책 <금고가 비었습디다>는 “(자금사정이 어려워지니까) 대우는 옛 사업 파트너였던 GM과의 전략적 제휴 카드를 빼든다. … 대규모 외자 유치로 정부의 구조조정 압박을 넘길 수 있으리라는 포석이었다.”라고 단정지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GM과의 합작 협상이 대우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 때문에 결렬됐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으로 되어 있다.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은 2012년에 발간된 회고록에서 “… 김우중 대우 회장은 제너럴모터스(GM)와의 전략적 제휴에 모든 걸 걸었던 것 같다. … 그러나 애초부터 불가능한 협상이었다. 대우의 오랜 협력·합작사였던 GM은 대우의 사정을 김 회장만큼 잘 꿰고 있었다… 조건을 바꿔 가며 질질 끌더니 1998년 7월 협상을 깨고 만다.”고 말한다. 이헌재 씨는 대우차가 “기술 자립이 어려웠다”라고까지 강조한다.

   
 

왜 이렇게 김 회장이 말하는 것과 완전히 다르게 역사가 기록되어 있을까? 실제로 이렇게 거꾸로 역사가 기록되면서 김 회장은 한국금융위기 와중에 김대중 대통령(DJ)과 국민을 상대로 큰 거짓말을 한 기업인으로 몰려 있다. 김 회장은 이렇게 된 이유를 금융위기 극복 방안을 둘러싼 경제관료들과의 충돌에서 찾는다.

DJ는 1997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되자 마자 김 회장에게 “경제대통령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실제로 DJ는 금융위기 극복방안을 놓고 김 회장과 처음부터 긴밀하게 협의했다. 김 회장을 청와대 회의에까지 참석시키면서 경제팀과 논쟁을 하게 만들었다. 전례없는 일이었다. DJ는 왜 김 회장을 이렇게까지 신뢰하면서 정책 논쟁에 끼어들게 만들었는가?

DJ는 대통령 후보들 중에서 유일하게 ‘IMF 재협상론’을 제기했던 인물이다. 당시 “IMF프로그램에 따라 철저한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 관료사회와 학계, 국내외 언론의 대다수 의견이었지만, DJ는 “꼭 그래야만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DJ에게 김 회장은 천편일률적으로 나오는 구조조정론과 다른 견해를 들을 수 있는 믿음직한 인물이었다. 김 회장은 당시 한국 재계 2위인 대우그룹을 키워낸 신화적 존재였고 금융위기가 빈발했던 신흥국에서 사업을 개척한 선구자였기 때문에 금융위기와 관련된 실물경제, 정책 등에 관해 누구보다도 해박했다.

게다가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차기 회장으로서 실질적 회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DJ가 실물경제 부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가장 적당한 파트너이기도 했다. 김 회장은 본래 비밀스럽게 비즈니스를 하는 스타일이다. 경제개발 초기부터 정부 측에 경제정책 조언을 많이 주었지만 겉으로 드러나게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금융위기 상황의 절박함과 DJ의 ‘경제대통령 초청’, 전경련 차기 회장이라는 위치는 김 회장을 경제정책 전면으로 나서게 했다.

김 회장은 이 책에서 강조하듯 ‘세계를 경영한 민족주의자’였다(프롤로그). 그래서 관료그룹과 달리 ‘연간 무역흑자 500억 달러 달성을 통한 IMF체제 조기탈출론’이라는 민족주의적 해법을 내놓았다. 신흥국 금융위기를 피부로 체험했던 김 회장은 IMF프로그램이 한국을 돕는 것이 아니라 한국을 국제 금융기관들의 ‘관리체제’로 바꾸기 위한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김 회장은 또 한국은 금융위기를 당했지만 세계경제는 괜찮은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런 환율에서는 돌을 팔아도 수출할 수 있다”며 1조 달러 어치에 달하는 국내 생산설비를 최대한 돌려 수출을 대폭 늘리고 고용을 유지하면서 위기를 탈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은 당시 대기업 총수 중 유일하게 ‘정리해고’에 적극 반대했다. 

결과적으로 김 회장의 주장은 맞았다고 할 수 있다. 정부는 1997년초에 연 28억 달러의 무역흑자 밖에 못 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제로 416억 달러의 흑자를 냈다. 그러나 김 회장은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과정에서 경제관료들과 크게 충돌했다. 기본적으로는 금융위기 극복 철학의 차이에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감정 대립으로 발전했다.

김 회장은 공개석상에서 “관리들이 열심히 안 한다. 자기 할 일을 안 하고 핑계만 댄다. 이래서 나라가 어떻게 되겠나? 자기들이 못하면 자리를 비켜줘야지…. 그러면 얼마든지 좋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데, 안 비켜줘서 할 일도 못하게 한다”고까지 말했다. 그 과정에서 “청와대 쪽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대우에 대해 나쁜 보고가 올라갔다”고 한다. [미디어펜=이의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