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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상민 성신여대 교수 |
베이징과 방콕, 싱가포르를 휘익 다녀왔다. 1주일 만에 손에 쥔 건 가상제국 티켓이다. 중국에는 너무도 튼튼한 전통 국가가 건재했지만 35세 이하 신인류들은 이미 동영상 포털 빅 3인 유쿠 토도우, 소후, 텐센트와 지구 최대 인터넷 쇼핑몰 알리바바라는 가상제국 거주민으로 살고 있었다.
다만 미국 발 가상제국 브랜드인 유투브와 아마존, 검색 대마왕인 구글을 기어이 봉쇄하고 키운 중국 민관 합작 유형 가상제국이라는 점이 생경했다. 미국뿐 아니다. 한국 발 가상제국 침투도 여지없이 커트 당한 이번 여름이었다. 네이버 라인도 카카오톡도 단전 단수 조치 당하듯이 그냥 끊겼었다.
반대로 <별에서 온 그대>와 같은 드라마, 음악, 게임은 더 많이 들여온다. 입도선매로 질러가며 아직은 매력 넘치는 한국 콘텐츠들을 싹쓸이 하겠다는 공략이다. 한 점씩 콘텐츠는 되고 무한대로 미디어 대로를 까는 유투브, 라인, 카톡과 같은 플랫폼은 막자는 식이다. 자국 청년들이 다른 문화권 가상제국으로 이민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대응하는 이런 중국 사회의 정책은 스크린 장막이라고 불러야겠다.
태국 방콕은 또 다른 가상제국으로 이행하고 있었다. 트랜스 젠더들의 해방구 나나 스트리트에는 거리의 욕정이 비등했다. 흥청대고 흐느적거리는 방콕의 무국적자, 무정부주의자 코스모폴리턴들은 분명 또 하나의 제국을 도모하고 있었다. 컨트리 리스크. 군부 쿠데타 세력이 단순 명쾌하게 새 총리를 지명한 게 바로 지난 주 목요일 21일이었다.
이처럼 공백기가 늘어지고 너무 잦은 과도기로 답보와 정체를 거듭해 나가자 방송에선 디지털 전환이나 IPTV 라이센스 발급 등 모든 일정들이 망가지고 있었다. 담당 관료와 의사결정자 위원회도 대책 없는 쿠데타 신음 중이었다. 그러니 태국 사업자와 이용자는 지체 없이 가상제국으로 줄달음치고 있었다. 동영상은 유투브가, 검색은 구글이 가상제국을 접수했다. SNS 서비스는 놀랍게도 한국 네이버 라인이 가상제국을 석권하고 있었다.
중소 업체 간부 명함에서 페이스북과 트위트는 한쪽 귀퉁이로 내려앉았고 이름 밑 전화번호 다음 칸에 네이버 라인 녹색 로고가 떡 하니 박혀 있다니. “네이버 라인을 방콕에서 많이 사용한다. 웹툰 서비스도 알고 있다. 태국 로컬 만화를 모바일로 서비스하는 새로운 비즈니스를 현재 협상하고 있다”고 어느 출판만화 임원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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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라인과 카카오톡 등 미디어 플랫폼을 지배할 수 있는 외국의 가상제국은 철저히 차단하고 있다. '별에서 온 그대' 등 한국드라마와 음악 콘텐츠는 여전히 싹쓸이했다. 태국은 한류드라마가 퇴조했다. 반면 네이버 라인은 태국의 SNS시장을 석권했다. 한국은 괴물처럼 비틀어진 가상제국에 급속히 빨려들어가고 있다. 드라마 등 우수한 콘텐츠가 없는 미디어팽창은 매우 취약하다. 한국이 아시아적 가치를 주도하는 콘텐츠개발을 주도해야 한다. |
대단히 반가운 징조다 했건만 방콕 둘째 날 반전이 발생했다. 적어도 동남아에서 승승장구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한국 드라마를 보는 따가운 시선이 감지된 것. 그들은 한류를 떠나가고 있었다. 한류라는 오랜 가상제국에서 이탈하고 싶어 했다. 어느 드라마는 여주인공이 너무 늙어 보인단다. 뜨끔했다. 최근 한국 드라마 추세이기도 하다. 어떤 아이돌 그룹은 태국 신예들보다 나을 게 없단다. 인정했다. 태국 음악, 영화가 많이 치고 올라온 건 사실이지 않나?
한류 위기감을 객관화하려 태국의 조영남 급 쯤 되는 터줏대감과 만났다. 한 술 더 뜬 그는 “5년 안에 한국 콘텐츠 인기는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내다봤다. K POP을 보면 대부분 비슷비슷한데다 한국 전통문화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명작이 없다는 힐난이었다. 그러면서 그가 예를 든 것은 70년대 한국 가요 <사랑해 당신을>이었다. ‘예 예 예 예예예 예예예 ~ ’ 하고 장단까지 맞춘 그는 이런 노래라야 진짜 국제적인 문화가 되고 오랫동안 사랑 받을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맞는 말이다.
콘텐츠로서 한류는 위기이고 대신 네이버 라인과 같은 미디어 플랫폼 유형 가상제국은 크게 일어서는 특이한 현상이 태국에서 나타난 셈이다. 물론 페이스북 같은 라인이나 카카오톡은 국적성이 없는 미디어 전기나 전류, 즉 에너지 같아서 한류와는 일단 무관한 순수 가상제국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류 불씨가 아니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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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서 온 그대'에 출연한 김수현과 전지현. 동남아에서 한류는 실속이 없어지고, 날로 퇴조하고 있다. 동남아 전문가들은 한국이 IT부문에서 최강이고 삼성과 LG가 최고이지만 한국적인 것은 고사하고 아시아적 문화나 콘텐츠에는 소홀하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 |
세 번째로 들른 싱가포르에는 국가 수축이 드러났다. 인구도 활력도 줄어만 가는 외견상 쇠락이 진행되고 있어 보였다. 그러니 가상제국은 더욱 위력을 떨칠 수밖에. 루카스 필름이나 디스커버리 채널, HBO 같은 글로벌 브랜드들이 싱가포르 정부가 차려놓은 산업 생태계 클러스터 미디어 폴리스를 리드하고 있었다. 디지털과 모바일 환경에서는 이미 싱가포르 4개 공용어는 의미 없었다. 영어와 중국어, 말레이어만이 미디어 플랫폼을 차지하고 있었고 현지 토속어는 가상제국에 진입하지도 못한 듯하다.
다행히도 한류 콘텐츠들은 싱가포르 상공 가상제국에서 인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최신 드라마들도 여전히 뜨거웠고 수년 전 일본이나 중국 TV가 그랬듯이 더빙된 한국 드라마가 싱가포르 현지 채널에 가득 올라와 있었다. 워낙 국제화된 그들은 프란치스코 교황 한국 방문 소식도 잘 알고 있었고 한국 정부가 노력하는 창조경제 움직임도 꿰고 있을 정도였다.
가상제국 미디어 인프라 차원에서는 역시나 미국 유투브, 구글이 지배했고 네이버 라인이나 카카오톡은 미미했다. 한국이 콘텐츠로는 가상제국을 일부 접수했으나 미디어 플랫폼이라는 솔루션, 소프트웨어, 기술 인프라 측면에서는 전혀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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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라인은 태국에서 SNS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한류 드라마는 뚜렷한 퇴조세를 보였다. 중국에선 라인과 카카오톡이 구글 등과 함께 가상제국 침투가 철저하게 차단돼 있다. 중국은 대신 별에서 온 그대 등 한류콘텐츠는 많이 사들였다. 가상제국은 끝까지 지키려는 중국정부의 의지가 드러나 보인다. 네이버 라인의 홈페이지. |
이렇게 중국, 태국, 싱가포르는 저마다 특색 있는 가상제국을 키우고 있는 중이다. 중국은 전통국가와 가상제국을 일치시키느라 단내가 날 정도였다. 태국은 전통국가가 꿈쩍 않는 반작용으로 가상제국에서 한류를 제압할 자체 문화콘텐츠에 도발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했다. 싱가포르는 가상제국에서도 글로벌 표준을 따르되 뭔가 한류와 아시아 콘텐츠에 목말라하는 뿌리 의식을 살짝 노출시켜주었다.
결국 우리가 기댔던 한류는 실속이 없어졌고 위기는 날로 심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가상제국이라는 미디어 신대륙에서도 몇몇 일부 선전하는 미디어 플랫폼 쪽 사례를 제외하면 진짜 문화 팬덤, 콘텐츠 매혹과 충성도라는 자산은 아주 많이 엷어지고 있다. 이런 전세를 만회하기에는 우선 국내 사정이 만만찮다.
우리 안방에서 전통국가와 사회가 흔들리고 대신 가상제국이 너무 삽시간에 고개를 쳐들어 버리는 미디어 실패가 커질 지경이다. 소통도 않고 믿지도 못하고 급기야는 쳐다보지도 않는 미디어 좀비 사회의 징후까지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괴물처럼 비틀어진 미디어 가상제국으로만 자꾸 파고들어 악성 루머와 괴담, 배설 욕지거리나 장난 댓글, 자극적 우스개에만 집착하는 한국형 가상제국이 굳어지고 있지 않은가.
하여 베이징과 방콕, 싱가포르가 보여준 가상제국 출현과 이행이라는 뚜렷한 현상은 우리 미디어산업에 선명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문화와 콘텐츠라는 뿌리 없는 미디어 팽창은 매우 취약하다는 교훈이다. 또한 미디어 플랫폼을 수반하지 않는 한류 콘텐츠 수출이나 전파도 유행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중국과 태국, 싱가포르 전문가들은 모두 말했다. 한국은 IT가 최강이고 삼성, LG가 최고이지만 한국적인 것은 고사하고 아시아적 문화나 콘텐츠에는 소홀하다고. 아시아적 가치, 즉 ‘Asian Value’를 추구하는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뼈아픈 지적이다. 서양을 따라고 하고 일본처럼 만들어서 가까운 동아시아 시장에 내놓기 급급했던 벼락 한류였다는 자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귀국하는 길에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쥐어 짤 수 있었다. 아세안 10개국 워킹 그룹이 좋은 예다. 싱가포르는 펀드로 통합을 꾀하고 태국은 관광, 음식과 같은 전통지식으로 창조를 제안하고 말레이시아는 첨단 미디어 밸리로 주도권을 넘보는 활기찬 각축장이 바로 미디어 부문 논의구조인 워킹 그룹이다. 한국도 여기에 어떻게든 끼어야 한다. 한중일 동북아 협력이 힘든 마당에 동남아 연합 흐름마저 놓쳐서는 안 될 일이다. 옵서버든 파트너든 자문역이든 한국이 동참하는 길은 한류 도취가 아니라 가상제국 문제 해결 능력으로 다가가야 한다.
지나친 초국가 현상, 비현실적 미디어 일탈을 우려하는 아시아 국가들에게 안정감 있는 우수 문화콘텐츠 전형을 보여줘야 한다. 가령 EBS 같은 멋진 교육콘텐츠 전당을 지닌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이런 남다른 면모로 가상제국이 반기는 보편적인 고급 콘텐츠를 한국이 공급해야 한다. 이래야만 뿌리 깊은 아시아적 가치가 탐욕과 과잉으로 비뚤어진 가상제국 생채기를 마침내 치유해내는 창조적 굿 비즈니스를 바라볼 수 있다./ 심상민 성신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