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의식화 스승' 리영희의 전향 불발 아쉬워
임종석-조국도 뒤따랐을 경우 세상 크게 바뀌었을 것
   
▲ 조우석 언론인
우리 사상사의 안타까운 순간의 하나로 나는 '의식화의 스승' 리영희의 전향(轉向) 불발을 꼽는다. 그에게 주어졌던 기회는 1991년 한 해였다. 그때 리영희는 1년 전후 절필(絶筆)을 선언한 채 번민을 거듭했다. 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에 이은 91년 소련 사회주의 붕괴 여파였다.

"나는 지금 거대한 역사적 변혁 앞에서 지적 갈등을 겪고 있고, 지적 오류와 단견을 겸허하게 수용하면서 좀 더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이미 객관적 검증으로 부정된 부분(옛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몰락)을 놓고서 그걸 사상적 일관성이라는 허위의식으로 자꾸만 고수하려는 것은 지식인다운 태도가 아닙니다."(한국일보 91년 6월25일)

좌파 지식인의 원조로 꼽히는 리영희 생애 가장 진솔했던 순간이었다. 그건 좌익 세상에서 발을 뽑겠다는 메시지였다. 애써 운동권을 타이르기도 했다. "우리는 지적-사상적 아집에서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80년, 50년 사회주의를 실험한 본인들이 실패했다고 자인하는데, 서울에서 책 몇 권 읽은 우리가 아니라고 우긴다는 것은 비과학적인 태도입니다."

리영희의 태도에 세상이 시끌시끌했다. 보수진영에서는 리영희가 전향했다고 단정했고, 운동권 진영은 그의 변절 여부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유감스럽게도 전향 9부 능선에서 리영희는 주저앉고 말았다. 1993년 이후 그는 북한과 김일성을 떠받드는 쪽으로 냉큼 방향을 전환했다.

그때 리영희는 때를 놓쳤다

그걸로 종북주의자 제1호 커밍아웃이 이뤄진 것이다. 이후 좌파 운동권도 좌익노선 청산 대신 리영희를 따라 종북의 늪에 빠져들었다. 2000년대 지금 한국 사회의 혼란은 그 여파다. 왜 리영희 얘기인가? 과거 사노맹에서 활동했던 이력의 법무부 장관 후보자 조국이 인사청문회를 코앞에 두고 있기 때문인데, 그가 56억 원의 재산가라는 건 내 관심 밖이다.

그의 어정쩡한 태도가 화를 키우고 있다. 지난 주 조국은 사노맹 전력에 대해 "독재에 맞서고 경제민주화를 추구했던 활동"이라고 밝혔다. "국민의 아픔과 같이하고자 했던 옛 활동이 자랑스럽지도 않지만 부끄러움도 없다"는 게 말도 덧붙였다. 그 해명은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의 비판을 의식한 것인데, 한마디로 크게 미흡했다.

"국가 전복을 꿈꿨던 사람이 법무장관이 될 수 있는가?"란 세상의 질문에 조국은 보다 성실했어야 옳았다. 사노맹이 6.25 이후 최대 규모 비합법 사회주의혁명조직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1989년 그들의 출범선언문에는 "40여 년 허공을 떠돌던 붉은 악령,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마침내 남한 땅에 출현하였다"고 밝히지 않았던가? 

   
▲ 과거 사노맹에서 활동했던 법무부 장관 후보자 조국이 인사청문회를 코앞에 두고 있다. 문제는 그의 어정쩡한 태도가 화를 키우고 있다는 점인데, "국가 전복을 꿈꿨던 사람이 법무장관이 될 수 있는가?"란 세상의 질문에 그는 보다 성실하게 응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때문에 국민이 가장 듣고 싶었던 해명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젊은 시절의 선택은 분명 잘못이었다. 단 저는 그때의 미숙한 조국이 아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 그랬을 경우 그는 200점을 맞았을텐데, 옛 운동권 이력을 엉뚱하게 포장하는 바람에 역풍을 자초했다.

즉 그가 운동권 도그마를 벗지 못한 386의 한 명이란 의구심이 더욱 커졌다. 그만 그런 게 아니다.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처신도 문제였음을 우린 기억한다. 그는 2년 전 국감장에서 전희경 의원과 충돌했다. 전 의원은 청와대 인사들이 운동권 사고에서 벗어났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고 비판하자 임종석은 "모욕감을 느낀다. 부끄럽게 살지 않았다."며 발끈했다. 

당시에도 임종석이 "젊은 시절의 선택은 잘못이었다."고 언급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의혹도 씻고, 문재인 정부가 당면한 현 경제위기-안보위기도 미연에 방지했을 수도 있다. 이 와중에 조국의 발언은 놓고 운동권 출신 하태경 의원이 페북에 올린 글이 날카로웠다. 

"조국이 자기 활동을 대한민국 전복이 아니라 경제민주화로 포장한 건 국민과 자신에 대한 기만행위다." 사실 사노맹을 주도했던 건 백태웅-박노해, 둘이다. 조국은 산하단체에서 활동했던 게 전부다. 때문에 박노해는 몸통인데, 그는 20년 전 이렇게 고백한 바 있다. 사노맹 활동 당시 자신에겐 사회주의 혁명이란 절대진리였다고…. 

박노해의 빛나는 선택

그러나 그는 오래 전 옛 신념을 포기했다. 박노해가 사형 구형을 받은 날이 1991년 8월인데, 공교롭게도 그날부터 전에 없던 상황과 마주쳐야 했다. 최후진술을 한 뒤 구치소로 돌아오는 길에 "소련 쿠데타 발발" 뉴스를 당시 라디오를 듣고 있던 젊은 교도관을 통해 전해 들었다.

독방에 돌아온 뒤 사형 못지않게 사회주의 붕괴 뉴스가 자기에겐 세상이 뒤집히는 충격이었다고 그는 훗날 쓴 책 <오늘은 다르게>(1999년, 해냄)에서 밝힌 바 있다. 이후 오랜 번민 끝에 사회주의 이념을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런 박노해에 비해, 조국의 처신은 너무도 대조적이다. 더구나 그는 법과 질서를 상징하는 법무장관 후보자가 아니던가?

결정적으로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전대협 출신을 포함한 운동권으로 채워진 청와대가 비정상적으로 움직여왔다는 증거는 너무도 많은 게 우리 현실이다. 그게 현대사의 비극이다. 최선의 시나리오는 리영희 전향 선언에 이어 운동권도 1990년대 경 집단적인 방향전환을 단행했어야 옳았다. 

그리고 고(故) 박세일 교수의 말대로 2000년대 이후 선진화 담론으로 갔을 경우 지금의 이 소모적인 사회혼란은 치루지 않아도 좋았으리라. 그랬을 경우 좌파 정권의 잇단 집권과, 과거사에 대한 집착 같은 것도 없었고, 경제성장도 6~8%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헌법 4조가 명문화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의한 통일도 오래 전 이뤄졌을 것이다.

그걸 못해 지금 우리가 이 지경이다. 요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수군대고 있다. "대한민국 국운이 여기까지인가?" "이 나라 앞날이 향후 3년을 내다볼 수 있을까?" 조국의 인사청문회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흔들리는 이 나라 앞날에 새삼 주목한다. /조우석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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