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빈곤 실업, 자유와 창의 짓밟는 과잉규제 탓, 기업가 혁신 질투가 저성장초래

전우현의 민족과 자유의 새지평(10)-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 어느 편이 더 도덕적인가 

민족주의는 우리 근현대사를 이끌어온 핵심 키워드이다. 일제의 36년간 식민지지배와 해방, 그리고 6.25북한의 남침, 남북분단 상황 등...민족주의와 민족이란 개념은 항상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의 이념갈등에서 가장 첨예하게 부딪치게 만드는 핵심용어이다.  자유와 자유주의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대혁명이후 본격 발현된 자유주의는 서구의 근현대사를 추동한 핵심 키워드였다. 자유는 천부인권, 사유재산보호와 함께 서구의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발달을 이끌었다. 반면 공산주의는 급진적 민족주의, 전체주의, 사유재산권 부정 등으로 인류사에서 끔찍한 재앙을 초래했다.  전우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한국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하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 전우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최근 전교조 소속 교사 4명이 북한체제를 전파한 혐의 등으로 징역 4년-6년의 구형을 받았다고 한다. 보도에 의하면 김일성 어록으로 어린이 교육자료를 만들고 김정일의 좌우명을 초등학교 급훈으로 붙였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 나라가 앞으로 어찌되는가? 인민민주주의, 또는 김일성 왕조국가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보다 더 좋은가? 그리고 더 도덕적인가?

공산주의의 원조 러시아혁명은 짜르의 가혹한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그만큼 동기는 도덕적이었다. 노동자가 힘든 노동에서 해방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모두 부자가 될 것이라는 환상 때문이었다. 하지만 혁명을 지도한 공산당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고 모순투성이 인간일 뿐이었다. 그 혁명의 엘리트들은 전위적인 사람이라 하여 당을 지도하고 국민(인민)을 그 지도에 복종하라고 명령했다. 이들은 혁명의 성공 이후에도 권력과 부를 국민과 나누려 하지 않았다.

이들의 지성(知性)은 오류(誤謬)로 가득했다. 재화와 서비스를 필요한 만큼 생산해야 하는데 넘치거나 부족하게 계산했다. 이러한 시스템에서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가 있을 수 없다. 경제가 망할 수 밖에. 모두가 잘사는 세상이 된다더니 모두가 가난뱅이로 되었다. 비록 약간의 맹점과 모순이 있더라도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우수하다는 점이 다시 한번 더 증명된 순간이다.

우리 한국사회가 혁명으로 좋아질까? 좋아진다면야, 유토피아가 된다면야 혁명을 못할 것도 없다. 필자 또한 20대 내내 혁명의 환상으로 살았었다. 그런데 급격한 혁명이 급격한 발전으로 되지 않는 게 문제다. 그 혁명이 그 전보다 나은 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퇴보시키므로 내키지 않는다. 인간은 하루 아침에 발전하지 않는다. 꾸준히 노력하고 대화하여 화합하고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면서 발전하는 존재이다. 인간의 역사가 그러하다. 변혁 즉 혁명을 원하는 사람은 기존 질서에서 권력을 갖지 못해 불만을 품은 2인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혁명을 하여 세상을 피바다로 물들이는 것은 부도덕의 극치다.

그런 열정이 있다면 그 열정으로 미움과 분열의 길로 가기보다 좋은 물건을 발명해서 시장에서 팔아보라. 이 모범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더 좋은 물건을 만들어내려 애쓸 것이다. 인민민주주의 혁명보다 이것이 비교할 수 없을만큼 발전적이고 도덕적이지 않은가? 사회주의 혁명을 지도하기 위해 헛된 땀을 흘리기보다 좋은 모범을 보이기 위해 앞서나가는 창조적 노력을 함이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더 낫다.

이것이 자유, 자유주의다. 이 발전이 거북이처럼 지지부진, 느리다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 한민족에게 자부심과 자극을 주어 노력하게 합의하는 이것이야말로 한반도에 사는 우리가 가장 빨리 발전하는 길이다. 지금 한국사회의 빈곤과 실업은 자유로운 시장 탓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와 창의를 사슬로 묶는 과도한 통제가 문제다. 경제성장과 기업가의 혁신을 시기와 미움의 눈으로만 바라보는 비뚤어진 사회정서에 원인이 있다.

1등 짜리 선수의 다리를 묶어 두면 내가 100미터 경주에서 더 빨라지나? 부자되고 성장하는 것에 적대적인 대학교수, 시민운동가의 사상토양에서는 성장하는 기업, 청년 대학생을 고용하는 역동적인 공장이 나올 수 없다. 벌써 전자, 자동차, 조선 등 국민을 먹여살려온 주력산업에 빨간 등이 켜졌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가난과 실업의 고통은 앞으로 더하면 더했지 덜해지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한국은 이제 조로하거나 기업 적대적인 산성토양이 대세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르완다의 혁신에서 오히려 지혜를 빌려와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람도 욕망을 다 이룰 수는 없다. 어디에나 나보다 뛰어난 사람, 더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이 나보다 더 잘 살면 시기질투에 몸을 파르르 떤다. 특히 재능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그렇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에 결코 승복하지 않는다. 사회 구조가 잘못이어서 그렇다고 변명을 하고 싶어진다. 급기야 자유주의, 자본주의 자체에 원인을 돌리고 자신의 지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다른 사람들을 모은다. 현실에 부족을 느끼는 젊은이들은 그 최대 참가꾼이 된다. 부자 사촌(富者 四寸)에 대한 시기질투심에 성냥불을 그어댄다. 이것이 대중정치(大衆政治)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사회는 정치화되고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 성공하기보다는 대중선동으로 쉽게 권력과 부를 가지려 한다. 국민 모두 일하지 않고 먹겠다는 부도덕(不道德)한 집단최면(集團催眠)에 걸리고 만다. 이런 분위기가 되면 열심히 혁신하여 투자하고 공장을 짓는 기업가는 강력한 정치권력 앞에서 의욕을 잃는다. 옛날의 로마, 지금의 남유럽도 혁신과 의욕이 보상받지 못했기에 쇠망(衰亡)했다. 양 극단을 비교해 보자.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 어느 편이 더 선한가?

공산주의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유토피아를 빙자하여 국민을 폭력으로 대한다. 더 말을 안들으면 강제수용소,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 개나 돼지와 같은 짐승 취급을 한다. 유토피아로 가기 위해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본성을 말살해야 하나? 인간의 본성,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주의자는 폭력을 행사한다.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가차없이 배제하는 사이비 교주가 된다.

자신이 세운 왕국(王國)에 들어오지 않음은 아직 교화(敎化)가 부족한 탓이라고 꾸짖는다. 공산주의는 유물사관, 계급투쟁론, 국가소멸론, 프롤레타리아 독재론 같은 사이비 진리를 받든다. 그러니 사이비 종교와 비슷한 길을 간다.

사람은 댓가로 뭔가를 받으면 열심히 일한다. 또, 자신이 번 재화를 당장 다 써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훗날 더 요긴할 때 쓰려고 한다. 이것이 모이면 사유재산이 된다. 이를 사회가 인정하면 사유재산권이 된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은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진다. 그러니 사유재산권 보장은 자연의 질서에 가깝고 인간 본성에 따른 결과이며 도덕적인 제도이다. 이를 부정하여 소유 욕구를 제거하는 폴포트의 킬링필드가 더 도덕적이었나?

재산권이 인정되면 상속(相續)도 허용된다. 그러면 자기 노력없이 부(富)를 대물림받아 편하게 사는 사람이 나온다. 우리 사회는 이것에 부정적이다. 그래서 ‘부(富)의 대물림’이라는 말이 나왔다. 눈꼴시게 미운 것은 사실이다. 회사에서 상사 눈치보며 허리가 휘도록 일해도 겨우 살까 말까한 월급장이가 있는데 아버지 잘 만나 잘 산다니? 아예 사회를 확 뒤집어 버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인간사회에서 상속을 없앨 방법은 없다. 이미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도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한 바다. 상속을 인정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번 것을 아끼지 않고 허랑방탕 다 써버리고 만다. 사회적으로는 자본이 모이지 않는다. 이런 결과에 대해 좀 시기질투가 나지만, 너무 약올라 하지 않아도 된다. 사회가 상속인의 비윤리적 소비를 제재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또, 상속받은 사람이 허랑방탕하면 금방 추락하게 되어 있다. 부모가 노력하여 이룩한 재산도 자식이 지키려면 그 부모만큼 노력해야 한다. 노력하지 않는 상속인에게 혹독한 댓가를 치르게 하는 것 또한 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 경제질서다.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 사상은 자유주의 다음으로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알고보면 자유주의 이전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남이 잘되면 내가 안된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네가 부자가 되면 나는 가난하게 된다”는 논리(착취이론)가 경제론, 정치론, 국가론에 배어있다. 능력에 따라 일하라는 명제를 주었지만, 자기 능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일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게 되었다. 인민의 수준이 낮아서? 인민에 대한 교양사업이 부족하여? 천만에. 인간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본래 가급적이면 전쟁에 반대한다.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은 자유주의에도 심각한 손상을 가져오므로 전쟁보다는 서로 교환하는 무역이 이익에 들어맞는다고 본다. 때로 불공정한 무역과 식민지 전쟁이 있었던 것은 제국주의 정치제도 탓이다. 즉, 민간에게 맡겨야 할 경제문제를 모두 정치적인 일로 장악한 ‘너무 큰 정부’가 일으킨 일이다(예, 아편수출을 위해 중국을 침공한 영국, 나치 히틀러의 독일, 무솔리니의 이태리, 군부가 장악했던 일본 등).

이들 침략국은 자유주의 국가였다고 할 수 없다. 그러니 탐욕과 전쟁을 모두 자유주의의 필연으로 가르침은 옳지 않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노력을 경제로 보상하려 할 뿐, 무지막지한 전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인류역사 200만 년 동안 전쟁 위험 없이 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는 인간의 재능과 노력 차이에 따른 불만을 총과 대포로 뒤집으려 하지 않는다. 무지막지한 전제주의, 계급투쟁의 인민민주주의보다는 자유주의가 세계평화주의, 도덕주의에 훨씬 더 가깝다.

인간 세상에서 똑같이 잘 살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이런 세상은 한 번도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다만, 가난한 사람이 더 부자가 될 수 있게 기회를 만들 수는 있다. 바로 자유주의 경제에서만이다. 자유주의에서는 누구나 남에게 필요한 일로 열심히 일하면 부자로 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내가 자란 시골 마을에서도 열심히 일한 농부가 자식을 서울의 일류대학에 보내기도 했다. 동생을 국회의원으로 만든 지게꾼도 있었다.

그 반면 자유주의에서는 비록 물려준 재산이 있어도 허랑방탕하면 금새 가난에 내몰린다. 이것이 공평한 사회, 정의로운 세상이 아닌가? 아주 이상에 딱 맞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인간세상에서 그런대로 괜찮지 않나?
 

그 반면, 양반사회, 계급사회(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땀의 보상, 계층간 자유로운 이동이 안된다. 과거에 급제한 양반이나 당원 가족이 아니고서는 아무리 애써도 허사다.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고 착취대상이 되고 만다. 관아(官衙)와 노동당(勞動黨) 정부의 실세에게 정치권력과 경제적 풍요는 독점되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정치), 시장주의(경제)는 완벽하지 않다. 허점이 많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를 따라잡는 것도 쉽지 않다. 부자는 대를 이어 부자가 된다. 속 뒤집어지는 일이 한 둘 아니다. 그러나, 더 나은 제도가 아직은 발명되지 못했다. 부의 평등을 보장하고 고매한 인민의 도덕을 실현한다고 하여 더 나은 발명품인 줄 알았던 공산주의는 알고 보니 인민(국민)들 밥도 못먹이는 불량품이었다. 자유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 중 어느 쪽이 더 도덕적인가? /전우현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