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학생과 다른 지역 학생 애국가 확연히 달라지는 문제 고려해야

서울시 교육청이 애국가를 3도 낮춰서 부르도록 하는 방침을 정해 일선학교에 하달한 사실이 알려졌다. 당장 음악계에서 문제가 제기되었다. 애국가를 3도 낮춰 부를 경우 원곡의 장중함이 사라지고 구슬픈 단조풍의 노래가 되어 국가의 기상을 담아 부르는 국가로서의 의미가 퇴색된다는 주장이다.

이에 더해 조희연 교육감의 이념성향과 연결시켜 애국가를 격하시키려는 저의가 깔린 처사라는 분석에도 힘이 실렸다. 서울시 교육청은 학생들이 애국가의 고음부를 부르기 힘들어해 음을 낮춰 부르기 쉽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명했지만 ‘애국가 낮춰부르기’에 대한 비판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서울시 교육청의 ‘과도한 배려’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것은 그간 애국가가 겪은 수모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작곡가의 친일논란, 외국민요 표절논란에 이어 지난 좌파 정부에서는 공식석상에서 국민의례 대신 민중의례를, 애국가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리우는 일까지 벌어졌으니 왜 또다시 애국가를 건드리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만도 한 일이다.

국가의 상징은 그 나라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국민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중요한 매개체다. 태극기의 경우 ‘대한민국국기법’에서 국기의 존엄성을 규정하고 제작, 게양방법, 관리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형법에서는 국기, 국장모독죄를 두어 훼손행위를 처벌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애국가에 대해서는 1948년 정식 국가로 채택되어 불리고 있음에도 법규정을 따로 두지는 않아 왔다. 이 때문에 통진당이 국민의례를 거부하고 애국가를 부르지 않아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을 때 애국가에 대한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크게 확산되기도 했다.

서울시 교육청의 ‘애국가 낮춰부르기’ 사태가 갖는 심각성은 한 나라의 구성원들이 같은 국가를 부르며 느끼는 국민된 동질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데 있다. 그간 여러 장소에서 누가 부르느냐에 따라 애국가에 대한 변주가 다양하게 이루어 졌으나 이를 문제 삼는 경우는 없었다. 애국가의 원형이 무엇인지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분명한 가운데펼쳐지는 변주는 애국가를 친숙하게 하거나 보다 매력적으로 변신시키는 긍정의 작용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시 교육청의 계획대로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서울시 학생들이 듣고 부르는 애국가와 여타 지역의 학생들의 애국가가 확연히 달라지는 상황은 아무리 봐도 비정상적이다. 서울시의 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애국가의 음역을 낮출 필요가 있었다고 해도 이는 국가지사이지 일개 지자체의 교육청에서 속전속결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다.

   
▲ 전희경 자유경제원 사무총장이 4일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 주최로 열린 <애국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교육쟁점 연속토론회 패널로 나서  "서울교육청의 애국가 낮춰 부르기 지침은 학생들에 대한 과잉 배려와 사려심 부족이 빚은 촌극"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애국가 논란을 불러일으킨 서울시 교육청이 또 한가지 간과한 것은 애국심을 촌스러움과 동일시하는 요즘 세태다. 학생들이 애국가를 크게 부르지 않거나 아예 부르지 않는 것을 단순히 음이 높아 부르기 힘들어서라는 인식은 지나치게 단편적이다. 기성세대들이 그들이 겪어온 권위주의 시절에 대한 반발심에서, 민주화 쟁취에 따른 도취감에서 자라나는 세대에 대한 국가관, 국민의식 교육에 소홀한 사이 국민의례는 거추장스럽고 애국가를 목청껏 부르는 일이 멋쩍은 일이 된 것은 아닌지.

입만 뻥긋 거리게 되는 애국가의 문제는 후자에 기인할 확률이 더 높다. 그렇다면 무조건 음만 낮추면 된다는 서울시 교육청의 처방은 틀려도 한 참 틀렸다. 원인을 모르니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한 교육을 강화할리도 만무하다. 서울시 교육청이 관내 학교들마다 우렁찬 애국가 소리가 울리게 하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학생들에게 대한민국관을 심어주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해방 전후의 혼란 속에서 기적과 같은 건국을 이뤄내고,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섰으며, 세계 최빈국에서 경제강국의 반열에 올라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과 땀이 뿌려진 나라인지를 알게 해 주어야 한다.

그때가 되면 애국가의 한 구절 한 구절이 학생들의 마음에 들어설 것이다. 그 쯤 되면 이제 애국가는 목이 아닌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가 될 것이다. 목청이 작아도 감동이 있는 애국가면 또 어떤가. 서울시 교육청의 ‘애국가 낮춰부르기’ 사태는 배려심 과잉과 사려심 부재가 빚어낸 촌극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애국가의 안위 뿐만 아니라 서울시의 교육이 걱정되는 요즘이다. /전희경 자유경제원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