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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우석 언론인 |
올해 노벨경제학상이 미 MIT 아비짓 바너지 교수 등 세 명에게 돌아갔다는 뉴스를 지난 주 접했다. 우리네 사는 것과는 무관한 일이겠거니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국경제의 어제와 오늘에 주는 암시도 적지 않았는데, 그걸 확인해준 게 수상 소식을 전한 노벨위원회의 설명이다.
수상자들은 인류의 빈곤 퇴치에 기여했다는 것인데, 그들이 규명했다는 경제학적 성과란 것도 전문용어를 빼고 나면, 심플하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케냐 등 후진국에서 교과서-급식 등을 무상 제공하는 것이 학생 성적 개선에 도움 되지 않았다. 외려 학생 성적이 올라가면 교사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원리를 이들이 밝혀냈다는 것이다.
수상자들은 이런 논리를 무작위 통제실험 즉 RCT란 기법으로 입증했다. 의학에서 하듯 실험집단을 둘로 나눠 서로 다른 조건 아래 결과를 관찰한 것이다. 이걸 일반화하면 무상 복지를 주장하는 좌파 정책이란 미친 짓이며, 또 퍼주기 복지를 무조건 배격하는 우파 역시 잘못이다.
뭐가 대안일까? 가난한 이들의 현실을 염두에 둔 채 인센티브 제공, 즉 신상필벌 원칙을 유지하라는 결론이 수상자들의 메시지다. 어떠신지? 듣고 보니 좀 싱겁지 않나? 내 눈에는 소꿉장난으로 보였다. 노벨상이란 권위, 그리고 경제학이란 학문에 대한 낯가림을 잠시 내려놓고 본다면, 이번 수상자들의 논리란 상식의 재확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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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곤퇴치 연구로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한 아브히지트 바네르지(58)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 에스테르 뒤플로(46)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 하버드대 마이클 크레이머(55) 교수(사진 왼쪽부터). 이들은 빈곤퇴치를 위한 실험적 연구와 노력을 인정받아 올해 노벨 경제학상 공동수상자로 선정됐다. /사진=노벨상 홈페이지 |
우리의 성공을 잊고 사는 우리
그러나 한국경제 어제와 오늘에 주는 암시는 컸다. 일테면 우린 반세기 전, 즉 1960~70년대 바로 그런 인센티브 즉 신상필벌의 원칙을 앞세워 빈곤 퇴치라는 위대한 금자탑을 세웠다. 경제대통령 박정희의 지휘 아래 2차 대전 이후 어느 개도국에서도 일어난 적이 없던 기적을 일으켰다.
올해 노벨상 수상자들의 경제학 원리를 무려 반세기 전 실험한 놀라운 사례였다는 뜻인데, 저들이 경제학 실험을 했지만, 우린 달랐다. 그걸 국가경영 원리로 밀어붙여 끝내 5000만 국민이 가난 탈출에 성공했다. 올해 노벨상 수상자들이 후진국 일부 사회를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한데 불과했지만, 우린 거기에 국가의 명운 걸었고, 지금 부자나라로 벌떡 일어섰다.
문제는 지금이다. 한국인은 그 과정을 송두리째 잊어버렸고 "암울했던 시대"로 표현한다. 세상에 이런 자기망각 혹은 자기모멸이 없다. 일테면 박정희-전두환 시절 대한민국은 성장-분배에서 세계 최고였다고 1993년 세계은행이 일찌감치 공인한 바 있지 않던가?
연평균 9% 넘는 경제성장은 물론 세계 최고의 동반성장까지 이뤄낸 위대한 과정(1965~89)이었다. 결정적으로 그걸 자유시장경제의 틀 안에서 이뤄냈다. 그렇다면 왜, 무엇이 그런 경제적 기적을 창출했나를 규명하고 원리를 일찌감치 우리 손으로 찾아내고 일반화하는 실사구시적 학문에 한국 경제학은 충실했어야 옳았다. 아니 정치권이 그렇게 움직였어야 했다.
만일 그랬다면, 우리나라 경제학자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는 이미 여럿 나오지 않았을까? 노벨상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1인당 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 배고픔을 해결한 건 지구촌 인구의 4분의 1에 그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대한민국을 롤 모델로 해서 몽땅 바꿔줄 수도 있었다.
그건 실로 인류사적 기여가 됐을 것이라고 나는 자신한다. 그리고 우리 경제는 87년 체제 이후의 저성장 기조와 달리 지금도 고성장을 거듭하며 국민소득 6만 불 시대를 열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현실은 누추하다. 왜 그런가? 우리가 한국의 경제현실을 분석하고 경제학의 일반이론으로 만들지 못한 결과이고, 정치권과 국민이 정신 못 차린 탓이다.
그래서 경제학의 경우 1960~70년대 개발연대의 위대한 성취는 '경제학의 미스터리'로 남아있고, 엉뚱한 서양 학자들이 벌이는 수상 잔치를 지금 우리는 멀뚱히 바라보고 있다. 그리곤 바보짓에 코 박고 산다. 기존 수입경제학에 각주 달고 해설자 노릇을 하기에 여간 바쁘지 않다.
그러나 지금의 경제학이란 게 무엇이던가? 시장경제 이론이라고 해보니 그건 "주어진 자원-부의 최적 분배원리"가 전부가 아니던가? "주어진 자원-부의 창출 원리"엔 크게 미흡하다. 경제학자 좌승희 박사의 따끔한 지적대로 경제학은 가난을 방치해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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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승희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이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전시공간에 걸려있는 박정희 대통령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사진=미디어펜 |
한국경제 얼마나 더 망가져야 할까
그건 몇 해전 그의 책 <박정희, 살아있는 경제학>에서 했던 썩 흥미로운 지적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 국내 경제학자들은 새마을운동을 포함한 1960~70년대 개발연대의 위대한 성취를 보지 못한 채 올해 노벨상 수상자인 아비짓 바너지 교수 등의 아류 노릇을 하기에 여념이 없다. 오늘 다시 물어보자. 새마을운동은 무엇이었던가?
그걸 포함한 1960~70년대 개발연대의 경제운용 원리는 무엇이었던가? 그건 올해 노벨상 수상자들이 말한 인센티브 주기 즉 신상필벌 원칙에 충실했던 경제 운용이었다. 일테면 박정희는 마을마다 n분의 1씩 지원하는 퍼주기 식 정책을 단연 거부했던 일화로 썩 유명하다.
새마을운동 제2차년도인 1971년, 그는 잘하는 마을만을 선택해 집중 지원한다는 원칙을 밀어 붙였다. 한강의 기적 전체가 그러했다. 수출 잘하는 기업에만 지원을 집중한 수출육성책으로 중소기업을 대기업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공산주의가 못 사는 이들을 지원한다고 하다가 사회 전체를 빈곤의 늪에 빠뜨리는 것과 정반대로 원리로 움직인 것이다.
문제는 박정희 사후 우린 '박정희 반대로' 가는 걸 개혁이라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경제학도 그 따위다. 몽땅 주류경제학의 도그마에 갇혀, 즉 시장 만능주의에 빠져 그걸 하나님으로 섬긴다. 올해 노벨경제학상이 의미 있다면, 우리의 이런 얼척 없는 현실을 바로 보게 해줬다는 점이 아닐까?
그래서 새삼 물어봐야 한다. 언제나 우린 결국엔 시장이란 게 각자의 노력에 따라 보상을 달리 해주는 메카니즘이란 좌승희 박사의 주창을 선뜻 받아들일까? 언제나 우린 철이 들까? 안타까운 가을, 한국경제가 망가지는 걸 지켜보는 게 고통스럽다. /조우석 언론인
[조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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