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간지기들 자기 호주머니 돈인양 '펑펑'…국민들 피눈물로 생색
   
▲ 정숭호 칼럼니스트·전 한국신문윤리위원
<내가 늙었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고,
내가 죽고 나면 대홍수가 나겠지!
하는 생각에 오싹하며 위안을 느낀다.>

19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오스트리아 문인 페르디난트 폰 자르(1833~1906)가 말년에 쓴 시 '새로운 근교(New Suburb)'의 일부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걸 보니 기가 막히네, 이러다간 망할 것 같아. 늙은 나야  떠나면 그만이지만 남아서 고생할 젊은 사람들 생각하니 걱정만 되네"라는 감정, 요즘 한국의 나이 드신 분들 중에서도 꽤 여러 사람들이 품고 있음직한 감정을 '오싹한 위안'이라고 했습니다. 가슴을 콕 찌릅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한둘이 아니라는 건 잘 아시지요? "곳간의 돈은 놔두면 썩는다"는 며칠 전 청와대 대변인의 궤변 같은 게 대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산은 국민의 피눈물이다. 제발 아껴 써라"라는 주문에 그는 빤질빤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정부와 여당이 예산을 함부로 펑펑 쓰고 있으니 안 그래도 화가 뻗친 사람들의 부아가 더 치솟았습니다. 정부와 여당은 예산을 아끼는 것이 직분인데, 반대로 하고 있으니 화가 안 날 수 없습니다. 곳간주인 노릇하려는 곳간지기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돈 쓰는 맛에 중독됐는지 이번 곳간지기들은 예전 곳간지기들 어느 누구보다 훨씬 더 신나게 퍼다 쓰고 있습니다. 하긴 돈을 쓰면 신이 나긴 하지요. 그것도 남의 돈으로 자기도 실컷 쓰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것저것 사주면서 생색낼 수 있으면 그 기분 엄청 좋을 겁니다.
 
   
▲ "곳간의 돈은 놔두면 썩는다"는 궤변으로 논란을 일으킨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 곳간의 돈은 국민들의 피눈물로 걷힌 세금인만큼 정부와 여당은 아끼고 필요한 부분에만 지출해야 한다. /사진=연합뉴스

이번 곳간지기들이 곳간주인의 돈을 막 퍼다 쓰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닙니다. 내년 4월 총선에서 이기려면 돈이라도 막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경제, 외교·안보, 교육 등등 어느 한 곳에서도 잘했다 소리 듣지 못하니 이대로 가면 선거에서 지고 정권을 넘겨줘야 할 걸  겁내는 거지요. 그러면 또 자기들이 해온 것처럼 정치보복도 있을 것 같으니 걱정이 안 될 수 없지요. 돈을 확확 풀어 경제에 활기가 도는 것처럼 꾸며야 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막 써버리면 안 된다는 거지요. 한 푼을 풀더라도 들어가는 돈보다 나오는 것이 많도록, 투입보다 산출이 높도록 써야 하는데 이렇게 앞뒤 생각 없이 급하게, 함부로 돈줄을 풀어버리는 걸 보면 그런 생각은 머릿속에 '1'도 안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돈이라면 그렇게 못 씁니다. 그렇게 쓰는 돈은 '똥'밖에 되지 않습니다. 거름으로도 쓰지 못할. 농사에 비유한다면, 앞으로 당분간 날이 가물고 땅이 척박해질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곳간지기가 이렇게 막 써대면 누가 수긍하겠습니까. 주인 몰래 먹고 뿌리는 게 내년 농사지을 종자가 아닌가 라는 의심도 듭니다. 농사짓기 좋을 때가 와도 밭에 뿌릴 씨앗이 없는 기막힌 상황이 되는 겁니다.

어쨌거나, 당장에는 배를 채웠으니 기분이 좋을지 모르지만 하루만 지나면 걱정이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동냥해온 걸 다 털어먹은 지 며칠 지나 배가 등에 붙은 거지가 아들에게 "쌀이 있으면 냄비를 빌려 밥을 해먹을 텐데, 아궁이에 땔 나무가 없구나!"라고 헛소리를 했다는, 예전 배고픈 시대의 우스개도 생각납니다. 곳간지기와, 그들과 가까운 사람의 아이들은 곳간지기가 빼돌린 것으로 살이 통통 오르는 반면 정작 곳간주인 아이들은 날이 갈수록 여위게 되는 상황도 올 것 같습니다.

폰 자르가 오싹한 위안을 느꼈을 당시 오스트리아에는 빈부 격차가 심화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수도 빈의 도심부에는 귀족과 돈 많은 상인들의 호화로운 주택과 그들을 위한 극장과 전시장 따위가 늘어나는 반면 새로 개발된 근교에는 날림으로 지은 노동자 거주 구역이 계속 들어서고 거기서 만난 허약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이 시를 썼다고 합니다.

사회가 조화롭게 발전하지 못하고 갈등 속에서 퇴보하는 것에 체념한 거지요. "무자비한 사회적 상승의 확대"와 "무자비한 사회적 비참함의 확대!"에 절망했다고도 합니다. 이런 체념, 이런 절망 때문에 '오싹한 위안'을 하는 사람이 한국에서는 안 나왔으면 좋으련만 그럴 것 같지 않아 걱정입니다. /정숭호 칼럼니스트·전 한국신문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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