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 마비·식물국회 초래 국민들로부터 외면 자초

   
▲ 박종운 미디어펜 논설위원
“왜 여당이 아니라 야당이 무너질까”라는 제목을 단 칼럼이 아무개 일간지에 실렸다. 나름 현재의 시국을 ‘걱정하는 분위기가 묻어나는’ 글이라서 정독해서 읽어보았다.

그러나 그 칼럼의 저 질문에는 이미 책임의 소재에 대한 가치 판단과 결론이 실려 있었다(!) 그래서, “어느 모로 보나 집권세력의 책임이 큰 세월호 이슈가 야당을 위기로 몰아가는 현실은 가히 역설”이라는 결론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문제였다.

더 나아가 그가 걱정하는 것은 국가주의 경향이다. “여론을 지배하는 담론을 보더라도 민주주의보다는 국가주의에 가깝다. … 국가나 대통령을 최후의 보루 내지 구원자로 호명하는 일이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공공 영역을 지배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국가가 국민의 전체 의사를 구현할 윤리적 존재로 부각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 그러나 인과관계를 초월하여 대통령에게 책임을 지라는 사람들 외에는 세월호 참사 이후 누구도 대통령을 최후의 보루 내지 구원자로 호명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전반에 퍼져 있는 “유사 경찰국가적 양상,” “중앙의 국가 관료제와 행정 권력만 빠르게 강화되고 있을 뿐, 지역사회도 시민사회도 민주정치도 길을 잃은 것”도 우려한다. 그러나 6월항쟁 이후 시청광장, 광화문 광장을 이렇게 오래 점거하고 시위를 해도,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담론을 모아도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또 있었는가?


민심의 흐름이 과연 역설적인가?

인과관계와 상관 없이 여당이 무너져야 할 때 야당이 왜 무너지는가 하는 이런 질문과 우려를 하는 분에게는 지금 세상 돌아가는 것이 당연히 이상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짚어 보지 못한 것은 세월호 참사를 여야의 정치문제로 비약시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호 참사에 애통 절통해 하던 민심도 ‘세월호 참사의 정치화’에 대해서는 점점 더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 변화의 단적인 예가 세월호 참사로 아이들이 많이 희생된 안산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세월호 참사 관련 현수막을 자발적으로 철거하는 사건까지 일어난 것이다. 우리가 흔히 문상하러 가서 상주들을 위로할 때, 지나친 슬픔을 거두고 고인을 떠나보내라는 뜻으로 하는 말인 “산 사람은 그래도 살아야지...” 하는 위로가, 어느덧 국민들 사이에서 “언제까지 세월호 이야기인가? 산 사람은 그래도 살아야지...” 하는 식으로 스스로를 위한 말로 사용례가 바뀐 것도 그 예다.

‘세월호 참사의 정치화’에 대한 정치적 반응도 두 번에 걸친 선거의 결과를 볼 때 잘 알 수 있다. 6.4지방선거에서는 선거 직전 현역의 수와 당선자 수를 비교할 때, 새민련이 미미하게나마 밀렸다고 할 수 있다(필자의 이전 칼럼 <국민들, 세월호 정치적 이용에 휘둘리지 않았다> (2014.6.8.) 참조). 더구나 국민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7.30재보궐 선거에서는 11:4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왜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일까? 그 이유는 국민들이 세월호 참사가 끔찍한 대형 재난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해상교통사고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교통사고 사망자가 매년 세월호 사망자보다 10여배나 많은 약 5,000여 명씩이나 된다. 그래서 교통사고를 줄이기 위해서 경찰이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다. 또 교통사고 중상자를 살리기 위해서 또 새로운 응급구호 방식의 개선 노력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지속적으로 교통사고 사망자가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인과관계를 뛰어넘어 대통령이 책임지라고, 대통령이 물러나라고 하거나 시청앞에서 광화문광장에서 농성하는 일은 없다.

   
▲ [자료 출처: 경찰청 브리핑, <교통사고 사상자 줄이기>, 2014.2]
마찬가지로 이번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도 원인과 결과를 잘 분석하고, 책임자를 처벌해야 하며, 재발방지책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그 사고에 대해서 샤먼시대적 사고처럼 모든 불행에 대해 대통령이 책임지라고, 대통령이 물러나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부 혹세무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정권이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기획한 사고는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상적인 수사와 재판이 이미 진행되고 있고, 관련자들의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도 불구하고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음에도, 야당이 그 요구 이유가 불분명한 ‘수사권 기소권 요구’로 국회를 마비시키고 민생법안들을 내팽개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경찰과 검찰을 못미더워 한다고 해도, 그래서 특검을 한다고 해도, 특검에 대해 두 차례나 합의해놓고도, 야당이 일부 단원고 유가족의 반발 때문에 이를 파기하고 국회를 마비시켰다는 점에서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건전한 상식과 괴리되는 길을 걸으면서도 어찌 야당이 10% 내외의 지지 수준으로 무너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과연 어떤 국가주의가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가?

건전한 상식은 인과관계에 맞게 사태를 분석하고 그에 따라 처벌 및 대책 수립 등 문제를 처리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가뭄이 들건 홍수가 나건 인과관계를 뛰어넘어 만사귀일(萬事歸一)로 국정 최고 책임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부여시대에나 있을 법한 샤먼시대적 사고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샤먼시대적 사고를 벗어나서 합리적 인과관계 사고를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국가나 대통령을 최후의 보루 내지 구원자로 호명”하고 그 책임을 논하는 것은 맞지 않다. 그런 점에서 인과관계를 뛰어넘는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샤먼시대적 국가주의적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 대다수는 오히려 바로 이런 샤먼시대적 국가주의적 사고를 우려하고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지지자들만의 민주주의,’ ‘같은 사고를 가진 사람들만의 민주주의,’ ‘파당적 민주주의’로 이해하지 않고, 국민 대다수도 민주주의의 민이라고 인정(!)하고 국민 대다수의 뜻에 따른 정치라고, 국민적 민주주의라고 제대로 이해한다면, 바로 인과관계와 상관없이 모든 것을 대통령과 국가의 책임으로 돌리는 이런 샤먼시대적 국가주의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155일째인 17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세월호 단식농성장에서는 대통령의 책임을 요구하며 농성 참가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의 대의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는 실제 양상은 다음과 같다. 일부 단원고 유족은 박영선 새민련 원내대표 겸 비상대책위원장의 여야합의안을 두 번이나 파기시켰다. 또 새민련으로 하여금 세월호특별법과 민생법안을 연계시키도록 하여 국회 전체를 마비시켰다.

더 나아가 일부 단원고 유족은 민생법안에 대해서도 “서민들에게만 세금을 많이 내라는 것이고, 부동산 투기를 부추기고 의료비를 폭등시킬 우려가 높은 의료 민영화를 하려는 법안이 아닙니까” 하면서 다른 민생법안에 대해서도 반대를 하는 높은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래선지 이들이 새민련의 총재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까지 생기기도 한다. 이들이 새민련을 좌우하며 국회를 마비시키는 괴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오죽하면 그런 말이 나올까?

야당이 무너지는 이유는 바로 이런 샤먼시대적 국가주의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휘둘리고 있고, 그 이면에는 스스로도 그에 동조하는 사고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민심의 흐름에 부응하지 못하고 무리한 사고를 하는 것에 대한 내부 반발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잘못된 상태에서는 그나마 올바른 사고를 하려는 사람들 중심으로 변화의 기운이 생겨날 수밖에 없으며, 기존의 수구적 입장을 고집하는 사람들과 내분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야당이 살 길은 빨리 국민 대다수의 생활을 걱정하는 건전한 정치세력으로 되돌아오는 것, 그리고 인과관계를 뛰어넘어 샤먼시대적 국가주의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의 포위망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고 내분위기에서 수구적 태도를 버리는 것이다. 진정 국민을 걱정하고, 진정 합리주의적 대안을 내놓는 수권정당 노선, 섀도우 캐비닛 활동 노선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그 때서야 비로소 새민련이 지금처럼 밖에서 외면받고 안에서 스스로 무너지는 길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 박종운 시민정책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