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 프랑스어: [tɔma pikɛti], 이하 피케티)는 저서 <21세기 자본론>을 통해 지난 300년간 펼쳐진 부의 집중과 분배에 관한 주제의식을 역설한다. 피케티는 자본 수익률이 경제 성장률보다 높아질 경우 부의 불평등 또한 이와 비례해 늘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80%의 누진소득세를 부자에게 매기고, 전세계적으로는 모든 국가가 연대하여 부에 대해 매기는 세금(a global tax on wealth), 즉 글로벌 부유세를 신설하자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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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 피케티 파리정경대학 교수. <21세기 자본>에서 부자들에 대한 세금징수를 통해 세습자본주의를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피케티의 이론은 부자에 대한 증오와 질투를 부추기고 있다. 그의 이론은 국제경쟁력을 바탕으로 성장해야 하는 한국경제에는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 공감을 얻고 있다. |
하지만 이러한 피케티의 논리에는 여러 가지 오류가 발견된다. 목적을 위하여 수단을 짜맞추었다는 비판에서부터, 피케티 법칙 등 몇몇 수식의 학술적 오류가 지적되기도 한다.
피케티의 오류
피케티 논리에서 발견되는 오류의 시작은 ‘불평등이란 무엇인가’이다. ‘불평등의 정의’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분분하다. 사실 견딜만한 불평등, 허용할만한 불평등, 최상위 소수가 전체 부의 몇 %를 점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은 학계에서든 일반대중들 사이에서든 합의되거나 규정된 바가 전혀 없다. 기준선이 있는 절대빈곤과 달리 상대빈곤은 국가, 지역, 계층, 직업, 나이를 떠나서 개인마다 피부에 접하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을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 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피케티는 몇몇 선진국에서 지난 300년 간 흘러온 부의 불평등에 대해서 조망한다. 하지만 이를 현재의 중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의 경우로 확대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경제성장 및 자유화로 인해 중산층이 급속도로 늘어나는 다수의 국가에서는 부의 불평등이 감소하고 있다.
피케티가 문제 삼는 것은 상위 1%이다. 부를 1 대 99의 구도로 바라보는 것이다. 피케티는 저서를 출간하면서 이에 대한 학계의 비판적 분석 및 논의 과정을 건너뛰고, 바로 대중에게 접근하는 방식을 취했다. 짧고 감성적인 메시지로 대중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피케티는 1%에 속한 부자들에게 80%의 누진소득세를 매기자고 얘기한다. 상위 5%에게는 60%의 세금을 적용하자고 한다.
우리나라의 2010년도 가계금융조사 원자료를 분석하면, 연소득 1억원을 버는 이가 상위 5%에 해당한다. 피케티 주장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연봉 1억원을 버는 이에게 60%의 세금을 물리자는 것이다. 2013년 세법 개정을 통해 누진세를 매기려고 했다가 국민여론의 악화로 증세를 철회했던 기준점이 연소득 5500만원(상위 23%)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피케티 방식의 증세가 과연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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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대학생포럼이 주최하고 자유경제원이 후원한 <피케티 『21세기 자본』 바로읽기> 북콘서트 |
피케티의 두 번째 오류는 경제성장, 부의 증식, 자본 축적이 제로섬게임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경제성장, 부의 증식으로 대변되는 경제활동은 전적으로 윈윈게임이다. 시장경제는 번영의 길을 따라 그 자생적 질서를 확장한다. 나와 상대방의 거래를 기초로 하는 장사, 부의 증식, 개인 및 기업 경제활동 모두는 거래 양방이 이득을 보도록 호혜적으로 작동한다.
거래는 손해가 아니라 이익을 전제로 한 서로 간의 교환이다. 이러한 시장경제 질서는, 법치로 인한 사유재산 보호나 거래 질서 확립이 이루어지지 않아 무분별한 강탈이 일어나는 도적 떼의 세상을 제외하고 언제나 번영을 꾀한다.
따라서 사유재산제도 및 법치, 거래의 자유화를 기초로 한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결과적으로 지난 수백 년간 생활수준의 보편적 향상을 가져왔다. 과거 상위 0.01%나 다름없던 200년 전의 왕족이나 대부호 보다 현재의 중산층이 수명, 영양, 여가, 활동반경 등에 있어서 더욱 높은 삶의 질을 구가하고 있음은 주지할 만한 사실이다. 자본주의를 통하여 삶의 질이 전체적으로 향상되면서 평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성장 페달을 밟으면 분배구조가 장기적으로 개선된다는 점은 이미 입증된 진실이다. 성장을 통해 분배를 개선한다는 원리는 경제학의 철칙이다. 자본축적도 마찬가지다. 투자증가율과 성장률을 함께 그려보면 정확히 매칭된다.
하지만 피케티의 논리에는 이와 같은 경제성장, 자본축적의 메커니즘이 빠져 있다. 약탈적인 과세나 다름없는 피케티의 처방에 따라 자본축적에 대하여 조세를 걷게 되면, 자본축적의 속도는 느려지고 이에 따라 경제성장은 정체되어 불황이 찾아오고 소득불평등은 가중된다. 피케티는 모든 사람이 가난해지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게다가 피케티는 중국, 인도, 제 3세계 중남미 각국의 경제성장 및 중산층의 등장, 이로 인한 ‘부의 분배구조 완화’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외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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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 피케티의 <21세기자본> |
세 번째 오류는, 피케티의 논리에 인간성이 없다는 점이 꼽힌다. 누구나 인정하는, 경제성장에 크게 기여하는 변수가 있다. 바로 기업가이다. 하지만 피케티는 경제성장을 분모로 한 매우 간단한 수식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경제성장에 기여하는 수많은 변수들(기업가 포함)을 다루지 않는다.
불평등에 대한 조세 처방을 언급하면서, 증세에 따라 이것이 각계각층에 끼치는 경제적 영향에 대한 언급도 부재하다. 한 경제학자는 이러한 피케티 이론을 두고, 산수에 불과하다고 일컫기도 했다.
기업가정신이 투철한 자본가는 수익을 낸다. 하지만 동일한 자본을 갖고서도 까먹는 사람도 많다. 이순신과 원균이 동일한 조선 수군을 거느리고 다른 결과를 냈듯이 말이다. 그러나 피케티의 법칙에는 이러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들어가 있지 않다.
피케티는 상위 1%가 지닌 부의 추이를 300년간 살펴보았지만, 상위 1%가 지난 300년간 몰락했든 진입했든 그 구성이 얼마나 어떻게 바뀌어왔는지에 대한 고찰은 전무하다. 불평등을 제대로 연구하고자 한다면, 각 개인의 생애소득 전체를 두고 비교해야 한다. 피케티는 모든 부의 단위가 사람이며 개인이라는 명제를 무시함으로써, 질적인 분석을 스스로 포기했다.
맺으며
맑스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고 외쳤지만, 지난 80년간에 걸친 사회주의 실험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피케티는 (부자증세를 위해) “모든 국가여 단결하라”고 외친다. 하지만 피케티의 실험은 이미 자국에서 실패했다. 피케티가 고안하여 제공했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부유세 공약’은 위헌판결을 받았으며, 그 사이 부유세에 반발한 수많은 부자들이 프랑스 국적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떠났다.
지금은 경제의 개방화 자유화로 인하여,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가 법인세를 낮추려 경쟁하는 시대이다. 피케티는 분별없는 열정을 갖고서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려고 애썼지만, 결론은 대중에의 감정적인 호소로 끝났다. 피케티 신드롬은 그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