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서 폐기된 이론..."시장경제 본질은 봉사, 자본은 수단일뿐"

   
▲ 박종운 미디어펜 논설위원
프랑스에서도 짧게 득세했다가 폐기된 토마 피케티의 80% 진보세 주장

지금 대한민국에, 그리고 미국에 또 다시 마르크스의 망령이 배회하고 있다. 19세기 ≪자본(Das Kapital)≫이 ≪21세기 자본(Le capital au 21e siècle)≫이란 이름으로 제목을 바꾸어 달고 나타났다. 그 저자인 토마 피케티가 당당히 서울 거리를 활보하고 강연회까지 열고 있으며, 미국에서도 그의 책이 많이 팔리고 있다고 한다. 폴 크루그만이나 스티글리츠 같은 좌파 학자들에 의해서 칭찬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잠시 1800년대와 1900년대의 역사를 되돌이켜 보자. 마르크스가 1848년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에서 선진국에서 진보세(Progressive Tax)를 부과함으로써 부를 몰수하자고 선동한 이래, 그리고 1871년 ≪프랑스내전(The Civil War in France)≫에서 혁명으로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장악하자고, 결과적으로 아예 부를 국유화하자고 선동한 이래, 또 1917년 레닌이 민주주의 두마(국회)에서 소수가 되자 혁명으로 두마를 해산시킨 뒤 권력을 장악하여 노동자농민의 직장대표회의(soviet) 정권을 수립한 이래, 사회주의가 일세를 풍미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사회주의가 득세하자 (슘페터나 새뮤얼슨 같은 유명 경제학자들조차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오류를 범했지만)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인 미제스(Mises)는 시종일관 이에 반대했다. 그는 레닌의 사회주의 혁명 성공 직후인 1920년 <사회주의 공동체에서의 경제계산(Die Wirtschaftsrechnung im sozialistischen Gemeinwesen)>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그는 사회주의가 사람들이 자신들의 효용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재화에 대한 가치평가를 재조정한 결과인 자유시장 가격 체제를 없애버린 것이어서, 산업경제로서 존립할 수 없는 체제임을 분명히 하였다. 당국이 정한 가격으로는 제대로 된 교환이 이루어질 리 없고, 현상유지는 커녕 성장은 더 더구나 기대할 수 없다고 했다.

미제스의 주장에 대한 직접적 증거가 곧바로 나왔다. 레닌도 사회주의 혁명 이후 경제가 돌아가지 않자 1921년 10차 공산당대회에서 신경제정책(NEP, New Economic Policy)을 채택함으로써, 사회주의가 실현 불가능한 것임을 드러냈던 것이다. 소기업이나 소농에 국한된 것이었지만 부분적인 시장경제의 허용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국가자본주의적 배급경제(Rationing Economy)는 애초에 실현가능하지 않았다. 스탈린이 나중에 전면적인 사회주의로 치달을 때조차도, 사회의 존속 비밀은 실은 이웃 시장경제 나라들의 세계 시장 가격을 몰래 참조한 데 있었다.

   
▲ 토마 피케티 교수(파리경제대학, 21세기 자본론 저자)
미제스가 1922년에 펴낸 ≪공동체 경제(Die Gemein Wirtschaft)≫(나중에 1936년이 되어서야 영문으로 ≪사회주의(Socialism)≫로 번역됨)는 사회주의의 불가능성을 가장 체계적으로 입증했다. 이 책에서 설파했던 진실인 사회주의의 불가능성은 드디어 1989-1991년에 베를린 장벽 붕괴 및 소련붕괴로 현실화되었다.

최근의 피케티 열광 현상을 보면, 유전자 속에 사회주의가 들어 있어서 격세유전되는 것인가 아니면 과거를 잊어버린 탓으로 역사가 반복되는 것인가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위에서 말했던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서 나왔던 처방 중 일부를 지금 피케티가 다시 되풀이하고 있고, 일부 몰지각한 좌파들이 그에 열광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일찍이 ≪공산당 선언≫에서 1. 토지 소유를 폐지하고, 2. 소득에 대해 높은 진보세를 적용하며, 3. 모든 상속권을 폐지하고, … 5. 국가자본과 배타적 독점을 가진 국립은행을 통하여 신용을 국가의 수중으로 집중시키고, 6. 통신 운송 수단을 국가의 수중으로 집중시켜야 한다는 등 10개조의 사회주의적 대안을 제시했다.

피케티는 마르크스가 지속적인 기술발전과 생산성 증대의 가능성을 무시했다고 마르크스를 일면 비판하는 듯 하지만, 시장경제를 나름 ‘존중’하고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고 하면서, 결국 공산당 선언의 실행노선 제2조인 80%에 달하는 높은 진보세 주장은 확실하게 베껴왔다. 피케티가 그 주장을 베껴오는 과정에서 경제학자라면 응당 해야 할 분석인, 세율이 오를수록 세수가 어떤 모습을 띠는지, 경제가 어떻게 돌아갈지에 대한 분석이 아예 없었다.

그러면 피케티의 이런 대안은 그가 경제 자문역을 맡았던 올랑드 대통령이 어떻게 실천했을까? 올랑드 대통령은 2012년 대선 도중에 피케티의 조언대로 최고 75% 소득세 때리기 공약을 했지만, 헌법위원회는 75%의 세율이 몰수성 세금이라고 위헌이라고 판결했고, 대통령의 인기도 추락을 거듭하여 20%까지 내려왔다. 프랑스의 국민배우 제라르 드 파르디외가 프랑스 국적을 버리고 러시아 국적을 택한 일도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런 일이 연속되자 결국 올랑드 대통령은 미국 메릴 린치 은행의 이코노미스트였던 로렌스 부네(Laurence Boone)를 새 경제자문역으로 임명하였다. 또 피케티의 주장에 따른 “그런 공약은 (프랑스를) 햇볕이 사라진 쿠바로 만들자는 거야!”라고 한탄했던 중간파 사회주의자 엠마누엘 마크론(Emmanuel Macron)을 최근 2014년 8월 26일 산업부 장관으로 기용하였다. 올랑드는 이렇게 피케티와 확실히 결별했다. 피케티의 주장은 프랑스에서도 폐기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오직 그의 주장을 실험해보지 못한(!) 대한민국이나 미국 같은 나라들에서만, 그것도 좌파들 사이에서만, 잠시 인기를 누리고 있을 뿐이다.


시장경제의 본질은 봉사주의지, 자본주의가 아니다. 자본은 수단일 뿐이다

시장경제체제의 본질을 자본주의(capitalism)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틀렸다. 본래 자본주의란 말은 마르크스가 시장경제를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낸 선전선동성 용어였다. 마르크스는 자본이 이익을 낳는다고 속였다. 사람의 사람에 대한 봉사라는 휴먼 서비스가 시장경제체제의 본질임을 감추었던 것이다.

자본 축적이 경제의 중요한 수단 중 하나라는 점은 사실이지만, 그래서 유명 경제학자들이 시장경제체제를 자본주의라고 혼용해서 쓰기도 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마르크스의 이 용어는 사실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봉사 기획이고, 자본은 수단들 혹은 자원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굳이 Capitalism이란 말을 번역해서 쓰자면, 자본이 주의(主義)가 아닌 종의(從義)인 체제, 즉 자본종의(資本從義) 체제라고 번역하는 것이 낫다.)

자본이 그 자체로 이익을 낳거나 자본을 낳는 것이 아님은 경제사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과거의 초기 은행은 개인적으로 항아리나 금고에 보관하는 것을 불안하게 여긴 사람들이 화폐를 보관하는 일을 맡고 대신 보관료를 받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은행이 이 화폐를 유용하게 쓸 ‘봉사기획(service project)’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대가를 받고 빌려줌으로써 비로소 이자제도(interest system)가 탄생한 것이다.

드디어 봉사기획을 가지고 있는 기업가에게 빌려주는 것이 유용하다는 점을 알게 되자, 저축한 사람에게 보관료를 받지 않고 오히려 이자를 주는 현대적 은행이 탄생하였다. 이슬람 은행이 이러한 이자 제도를 부인하고 투자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서구 시장경제체제에서의 은행은 이자제도를 발판으로 기업가에게 투자를 위임하고 있다.

이자에 대한 태도 차이는 있지만, 어느 경우든 기업가의 봉사가 있기에, 이윤이 있는 것이고, 자본도 축적되는 것이다. 항아리 속에 파묻어 놓은 자본이 물리적으로 시간만 지나면 이익을 낳는가? 그렇지 않다. 자본은 시간이 지나면 열매를 맺는 과일 나무가 아니다.

마르크스나 피케티가 사람의 사람에 대한 봉사가 시장경제의 진면목이란 점에 의도적으로 눈을 감은 것은 자연과학주의(scientism)의 기계적 자동성으로 세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뉴튼적 물리법칙에 따라서 움직인다고 보았기 때문에, 기업가라는 사람을 제거해버리고 수단인 자본만 본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목적을 가진 존재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이며, 인과관계를 어떻게 파악하고 대처했느냐에 따라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지는 존재다.

안재욱 교수의 피케티 반박 주장처럼, 원균은 130척의 배를 가지고도 왜군과 싸워 참패했지만,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에서 살아남은 패잔병들과 12(+1)척의 배만 가지고도 133척의 왜군과 싸워 이겼는데, 이것처럼 사람이 자본(배)보다 더 중요한 것임을 보여주는 예도 없다.

   
▲ 최근 피케티 열광 현상을 보면 과거 사회주의로의 회귀가 아닌가 의심된다. 피케티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서 나왔던 처방 중 일부를 되풀이하고 있으며 일부 몰지각한 좌파들만이 그에게 열광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한국 근현대사에서도 화신백화점의 박흥식은 그 아들 대에 와서 망해버렸지만, 일개 공업사와 일개 상점에서 시작한 정주영과 이병철은 큰 부를 일구었다. 그 아들 대에서도 그룹을 물려받은 정몽헌과 그의 부인은 대북사업에 매달리다 초라한 성과를 냈지만, 현대차를 물려받은 정몽구는 현대차를 세계적 수준으로 키우고 현대건설도 되찾아오는 등 놀라운 경영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들 사례도 자본보다 사람이 결정적인 것임을 잘 보여준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30대 기업군 중에서 17개 기업군이 몰락했던 것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자본이 자본을 낳고,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이 부를 세습하는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인터넷 시대가 되자 다음과 네이버, 카카오가 뜨고, 게임기업들이 뜨는 일이 일어났는데 그들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었다. 애플의 잡스가 유행시킨 스마트폰 시대를 맞이하여 세계적으로 휴대폰 1위 기업인 노키아가 지고, (안철수의 예상과는 달리) 삼성이 스마트폰 1위 기업으로 뜨는 일이 일어났던 것도 기업가의 차이였다.

이처럼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다는 것, 따라서 부의 세습이 이뤄지는 것이 문제라는 피케티의 주장이 얼마나 문제 접근 방식이 잘못된 것인가를 잘 알 수 있다. 집단주의적(collectivistic) 분석 태도는 오류를 낳는다는 것이 그간 (사회주의 내지 케인스주의) 경제학의 문제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피케티는 개별 기업의 수익률을 보지 않고, 총체적 자본 수익률만 봄으로써 자본주의는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밖에 없는 체제라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개별적으로 봉사를 잘한 기업가가 그리고 기업이 소비자들로부터 대가를 많은 받은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의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의 평등화는 약탈이고, 처지의 개선이 기본이다!

불평등은 그 자체로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도 바람직한 현상도 아니다. 그것은 그냥 개선이 필요한 자연적 현상일 뿐이다. 예컨대 우리는 류현진처럼 야구를 잘하지도 못하고, 김연아처럼 피겨를 잘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들의 수입은 (광고수입까지 포함하여) 우리가 류현진의 야구를 즐겨 봄으로써, 그리고 김연아의 피겨를 즐겨 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우리 소비자가 준 것이다. 우리는 이병철이나 정주영처럼, 혹은 더 최근에는 이건희나 정몽구처럼 경영을 잘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의 수입도 그들이 만든 물건을 우리 소비자가 사줌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특출난 신체적 조건을 갖춘 사람도, 특출난 경영능력을 발휘한 사람도 모두 소비자들이 보태준 돈으로 부자가 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우리 소비자들에게 봉사를 잘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장경제는 유형 무형의 봉사를 잘 한 사람이 그 대가를 많이 받아서 부자가 되는 체제다. 따라서 시장경제체제의 본질은 봉사주의(servicism-필자가 만든 용어임)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시장경제 체제의 개념을 Human Service라고, 관건이 봉사자(기업가)라고 제대로 파악한다면, 내 처지를 개선하는 방안도 도출해내기 쉽다. Human Service를 중시하고, 봉사자(기업가)적 태도를 갖는 것이다. 과거 대한민국 경제가 급속하게 성공했던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선진국의 시민들에게, 선진국 시장에게 봉사했던 데 있다. 거기서 번 돈이 우리 생활수준을 높였다. 이처럼 시장중시의 태도를 가지고 봉사하다 보면 개선이 급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첫째 사람들에 대한 봉사를 잘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이 원하는 것이면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소질도 갖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10년 후 20년 후를 내다보고 그때 필요한 직업을 준비하는 것이다. 로마시대의 세네카는 준비가 기회를 만나는 것이 행운이라고 했다. 세 번째로 나보다 봉사기획을 잘하고 봉사 조직을 잘 해내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다.

좌승희 박사의 주장대로 흥하는 이웃이 있어야 나도 흥할 수 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사촌이 땅을 사야 밥 한 그릇 국물 하나라도 더 얻어먹을 수 있고, 그에게서 비결도 배울 수 있다. 질투를 억누르고 생산적 비결을 배우고 실천할 때만 내 처지를 개선할 수 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이 인간에게서 필요한 것을 구하는 세 가지 방식인 약탈 교환 구걸 중에서 비문명적 방식인 약탈로 기울게 된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있으면 계속 황금알을 얻을 수 있지만,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갈라버리면 지금 당장은 황금알을 더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일부터는 황금알을 얻을 생각은 포기해야 한다. 만인 대 만인의 약탈이 횡행하게 되면, 사회는 야만 상태로 후퇴하게 된다. 피케티의 주장대로 입법에 의해서 그 약탈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지니계수니, 자본수익률이니 하는 집단주의적 분석에 현혹되지 말고, 또 남의 주머니를 털 생각에 시간을 보내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봉사기획이나 성공학 같은 개인주의적 분석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 소비자에게 봉사하다 보면 그의 주머니를 털지 않아도 그가 지갑을 연다. 피케티의 약탈적 몰수적 주장과는 달리, 그럴 때만 실질적으로 우리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가들도 정신차려야 한다. 피케티의 불평등의 평등화 유행에 현혹되어, 피케티의 주장에 동의한다고 그릇되게 말하지 말고, 실제로 처지의 개선을 이룰 때만 국민들로부터 권력을 길게 위탁받을 수 있음을 명심하자. /박종운 시민정책연구원 연구위원